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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람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 (눅 22:3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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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람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 (눅 22:39-46)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일 년 중에서 가장 경건한 시간이며, 은혜 받기 좋은 시간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억하면서 그 깊은 뜻을 깨닫고, 감사하면서 헌신하는데 있습니다. 초대교회로부터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고 감격하면서 그 사건들을 재현하려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모일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의 감격을 기억하였습니다. 사순절은 목회적인 차원에서 아주 중요한 시간입니다. 이 사순절과 부활절은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위하여 중요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결단할 수 있는 아주 소중한 절기입니다. 

사순절은 참회하는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하여 46일을 보내고 부활절로 이어집니다. 이 절기는 영적 순례와 참회의 절기이며, 영적 성숙을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우리 스스로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이 절기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다른 날과 같이 흘려보내는 성도들이 있다면 그는 사려 깊지 못한 사람이요, 확신에 찬 신앙인도 아니요, 그분의 신앙을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뜨겁게 외쳐도 듣고도 아무런 감동이 없다고 하면 그는 여전히 큰 죄악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유월절이 사순절의 절정인 수난주간의 성금요일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새 생명을 얻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므로 거듭났으며, 참 자유를 얻었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초대교회로부터 교회는 사순절을 지키면서 우리 주님께서 광야에 들어가셔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신 것을 본받아 기도와 묵상으로 지냈습니다. 처음 사순절을 지키게 된 동기는 부활절에 새 신자들을 세례받기 위하여 준비시키던 기간이었습니다. 성도들은 세례받기 위하여 40일 동안 기도와 말씀공부에 전념하면서 경건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 죄인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 받으신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고난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주님을 따라 살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순절에 우리의 죄와 허물을 내어놓고 회개의 기도를 드리며, 십자가의 용서와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셨는데,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방황하고 죄에게 내어주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받으신 고난을 감사하면서 주님을 배우고 주님을 따르고 닮아 가면서 주님에게 좀 더 가까이 나아가야겠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기독교는 금욕의 종교는 아니지만, 금욕적인 훈련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적 순례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성공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자신을 내려놓아야 하고 자신을 말씀에 쳐서 복종시키는 일이며, 주님의 남은 고난을 나의 몸에 짊어져야 따라갈 수 있습니다. 

사순절을 잘 보내면 우리의 영성이 회복되고, 주님을 좀 더 깊이 알게 되면서 잃어버렸던 처음 사랑을 회복할 수 있고, 더 큰 영력을 얻게 됩니다. 주님과 깊은 만남이 이루어지고, 주님의 단절되었던 대화가 회복됩니다. 사순절을 잘 보내면 주님을 위하여 결단하고 헌신하게 되고, 주님이 섬김의 삶을 사셨던 것처럼 주님을 따라 섬김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본문 눅22: 39-46은 감람산에서의 최후의 기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찬송하시면서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39절입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39)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밖으로 나가셔서 습관을 따라 감람산으로 가셨고, 제자들은 자발적으로 따라갔습니다. 저녁을 마치고 나선 시간이 초저녁이 되었는데, 예수님이 가실 곳은 감람산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오시면서 감람산으로 가셔서 쉬기도 하시고, 기도하시면서 하룻밤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저녁이 되면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 되시는 분이지만 아버지 하나님과 깊은 만남과 대화와 사귐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어떤 분은 기도를 강조하면서 하루에 세 시간 이상 기도하느니, 하루에 10시간 기도한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기가 질려서 자신감이 없어집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기도해야 직성이 풀리고 기도한 것 같은데, 각 사람이 다릅니다. 어떤 성도는 하루에 3시간 4시간, 혹 10시간 기도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기도할 때에 기본적인 시간이 있다고 하면 하루에 한 시간은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영성과 신앙을 위하여 하루에 한 시간은 하나님과 대면하는 시간으로 빼놓아야 합니다. 

기도의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깊어지면 좋지만, 하루에 한 시간은 주님과의 사귐의 시간으로 성별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한 시간을 가지고 30분간은 말씀 읽기와 묵상으로, 그리고 30분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과 사귐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누가 말하기를 아니 겨우 한 시간 가지고 무엇 하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한 시간이라도 하나님과 정성스럽게 대면하여 말씀드리고 말씀을 듣는다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기도에 대한 책을 읽는 중에 척 스윈돌 목사님이 설교에 사용하신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기도에 대하여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가 만능인 것처럼 말하는데, 잘 알아야 합니다. 나는 동쪽을 가겠다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서쪽으로 가라고 인도하실 때도 많습니다. 기도하다보면 동문서답 같은 기도도 많습니다. 

“하나님께 힘을 간구하여 무언가를 성취하려 했으나/ 약하게 만드셔서 겸손히 순종하는 것을 배웠네/ 하나님께 건강을 달라 하여 더 위대한 것들을 하려 했으나/ 약하게 하셔서 더 나은 일들을 했네 / 부를 구해서 행복하려 했으나/ 오히려 가난하게 하셔서 지혜롭게 되었네/ 능력을 간구하여 사람들의 찬양을 받으려 했으나/ 약함을 주셔서 하나님의 필요를 느끼게 하셨네/ 모든 것을 구해서 인생을 즐기려 했으나/ 삶을 주셔서 모든 것을 즐기도록 하셨네/ 내가 구한 것 중 아무 것도 받은 것이 없지만/ 희망하던 모든 것을 가졌네/ 나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풍성하게 축복을 받은 사람이리라” 

기도에 대하여 고백한 글은 우리의 기도와 응답의 차이를 말하고,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사55:8-9에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 우리의 길과 하나님의 길이 다른데, 우리에게 다 유익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보다 높다는 말에 정말 기도하게 됩니다. 

엡3:20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더 넘치도록 하여 안겨주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습관을 따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습관이 있었습니다. 기도하시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좋은 습관을 만들고 정착시켜야겠습니다. 사람에게는 좋은 습관이 있고, 나쁜 습관도 있습니다. 습관이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것인데, 습관이라고 하면 “반복에 의하여 정착되고, 고정되어진 어떤 행동 양식”을 말합니다. 기도의 좋은 습관을 길러야겠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신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편에 있습니다. 감람산이라고 하는데 유대인들은 ‘올리브 산’이라고 합니다. 이 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예루살렘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나온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기드론 골짜기를 건너 감람산에 들어가셔서 기도하시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서에는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러 기도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크게 이 산을 부를 때에 감람산이라고 하는데, 기드론 골짜기에서 시작된 산 아래에 올리브 기름을 짜는 곳이 있었다고 하여 겟세마네 동산이라고 하는데, 예루살렘이 보이는 산을 겟세마네 동산이라고 했습니다. 

이 산에 들어가셔서 우리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11명의 제자들에게 함께 기도할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의 세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셨고, 우리 주님은 더 나아가 돌 던질 만큼 더 깊은 곳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조금 더 나아가사”라고 하신 것을 보아 우리 주님은 제자들이 자리 잡은 곳에서 그리 멀리 않은 곳에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에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특별히 세 제자들은 주님이 심히 고민하며 통곡하며 기도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셨는데, 근심하며 괴로워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시면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제자들에게 깨어 있어 주님과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성자 하나님이시라고 한다면 놀랄 것이 무엇이며, 슬퍼하실 것이 무엇이며, 마음에 심히 고민되어 죽데 될 것이 무엇이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신의 속성만을 가지셨다고 하면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고통을 받으시는 것이 무슨 고통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인성을 가지시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나셨고, 아픔과 고통에 두려워 떨 수밖에 없으신 사람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참 사람이셨다고 하면 예수님의 신성에 모독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걱정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인간이 아니셨다고 하면 우리를 대표자가 될 수 없으시고, 우리를 대신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하는 고난을 고스란히 받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떨어져야 하고,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짊어지고 버림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성자이신 하나님이시라고 하면 십자가 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27:46)라고 말씀하실 것이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지신 인자였습니다. 사람의 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멀어지고 떨어져야 하고, 버림받아야 하는 것이 매우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기에 그렇게 절규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버림받고, 형벌 받는 처절한 절규를 우리 주님이 대신해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제 땅에 엎드렸습니다. 본문 42절입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주님은 기도하실 때에 할 수만 있으면 이 일이 당신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였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를 세 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사실 세 번이나 기도하신 것은 완전히 기도하였다, 간절히 기도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되 엄청난 고통을 피할 수 없는지,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어떤 고통스러운 사건을 놓고 피해가고 싶은 기로에서 쉽고 안전한 길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만이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울 수 있게 됩니다.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환하게 바라보시면서 십자가의 고통을 감내하기에 중압감을 느꼈습니다.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의 뜻이 있다면 이러한 십자가의 고통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인류의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없는가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아픔도 없고, 고민도 없이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면 예수님은 인간이 아니시고 인간을 대표하신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셔야 하는 잔은 고난의 잔이었고, 피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있으면 되는데,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심판하지 않으려고 아들까지 내어버리고 포기하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워하시는 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기도야말로, 내 생각,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과 소원을 바라보게 합니다. 예수님이 간절히 기도하시는 중에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게 되었습니다. 기도는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간구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참된 기도의 모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와 같아야 합니다. 

이때에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님에게 나타나 힘을 더하여 주고 있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힘쓰고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는데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과 같이 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그냥 묵상하는 정도의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이마에서 등줄기에서 땀이 떨어지는데, 마치 핏방울과 같았습니다. 

히5:7에 보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심한 통곡과 눈물을 흘리시면서 간구와 소원을 올렸습니다. 감람산에서의 기도가 바로 심판 통곡과 눈물의 간구였습니다. 

이렇게 한참 기도하시다가 제자들에게 와보니 다 자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기도하여야 할 제자 베드로가 자는 것을 보시면서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씀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기도하시는 자리로 돌아가셔서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와서 보니 깊이 잠에 들었는데 심히 피곤해 보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깨우셔도 무슨 말로 대답할지도 모르고 잠에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다시 세 번째 돌아가서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제자들에게 와보니 완전히 골아 떨어졌습니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자,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에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러한 기도를 드리는 태도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이 말은 도저히 대항하여 싸울 수 없는 강력한 사람 앞에 항복하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완전 패배를 선언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의지하면서 아버지를 신뢰하면서, 당신 자신으로서는 피하고 싶고, 능히 피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성취되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요,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어야 됩니다. 

여기서 인성을 가진 예수님의 고민과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결단하시는 것입니다. 인성을 가지신 주님으로서는 당연히 피하고 싶고 죽고 싶지 않았고, 십자가의 죽음만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주기도문 중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그 기도를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유혹과 시험에서 이기려면 순간순간 주님을 의지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야 하는데,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고 주의 길을 걸어가는 데는 우리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가 없이는 고난에 참여할 수 없고 기도하지 않고는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도 홀로 있어 땅에 엎드리고 나의 고민되는 문제를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나의 아버지보다 더 자상하시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기도란 나의 원하는 것보다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스탠리 존스는 “기도는 복종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과 그 뜻에 대한 협력이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배에서 갈고리를 던져 해안을 잡아 끌려한다면 해안이 내게 끌려오는가, 아니면 내가 해안으로 끌려가는가? 기도는 하나님을 내 뜻에 따라 끌어오는 것이 아니고, 나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피하고 싶어지고 정말 비켜 나갔으면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까? 주님과 같이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가서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이루고 싶으신 귀한 뜻을 발견하고 돌아올 수 있어야겠습니다. 기도의 능력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간절한 기도처럼 뜨겁고 간절하게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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