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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상석에 앉는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하는 시대 (눅 1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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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석에 앉는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하는 시대 (눅 14:7-11)

제가 과거에 섬기던 교회에서 겪은 일입니다. 어떤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의사였습니다. 남편은 그 교회 장로님인데 남편도 의사였습니다. 자녀가 셋인가 있었는데 다 시집장가를 보냈습니다. 하루는 그 권사님이 구역이 모인 자리에서 저에게 자식 자랑을 하면서 ‘애들 직업이 다 ‘사’자로 끝나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그 말은 자식과 사위까지 포함해서 의사 아니면 변호사 아니면 판사라는 뜻입니다. 

저는 그 순간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분이 지금 나에게 농담을 하나. 만일 진담이라면 제정신인가.’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 자랑하고 싶은 본능이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자식의 성공을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을 가진 것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그것을 입으로 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느끼는 것을 다 입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사회경험을 하면서 배우는 첫 번째 교훈은 내 마음속에 있는 욕망을 다 남이 알게 하지 말라는 것 아닙니까. 왜냐하면 내 욕망과 느낌에 대해서 남들이 관심을 갖고 있지도 않거니와 이해를 해준다는 보장도 없고 무의식적으로 하는 말이 우리의 본모습을 노출시키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권사라는 분이 저럴진대 다른 일반인들은 오죽할까.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제가 그 교구의 담당목사인데도 제 귀에 거슬리게 들린다면 남이 들을 때는 오죽할까. 저는 그 순간에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제 직업도 ‘사’자로 끝나거든요!’ 물론 목사지만. 그러나 그분은 목사를 사자로 끝나는 직업으로 인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영화 타이타닉을 보면 타이타닉을 설계한 사람이 원래는 승객들이 다 탈만큼의 구명정을 달아야 되지만 그것이 미적 감각을 훼손한다고 생각해서 승객의 절반만을 태울 수 있는 수의 구명보트를 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타이타닉 호를 가라앉힐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부자 청년이 -케이트 윈슬렛의 약혼남입니다-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십니까. ‘더 나은 반수는 살아남겠네-the better half’ 타이타닉 호에 승선한 승객을 사회계급을 따라서 둘로 나눈다고 했을 때 자신은 더 나은 반쪽에 속한다는 말이고 이 더 나은 반쪽은 구명선을 타고 살아남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듣는 사람이 그 사람이 귀족이든 평민이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을 떠나서 이런 말을 들을 때 얄미운 마음이 들고 분노를 자극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대사가 영화에 포함된 것입니다. 그 당시 영국의 계급사회를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 청년이 ‘더 나은 반수는 살아남겠네’라고 말한 게 아니고 ‘더 나은 수는 죽어야지’라고 말했다면 그건 별개가 되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더 나은 반쪽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렇기 때문에 남을 살리고 자기가 죽어야 된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이야말로 멋있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타이타닉 호에는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구겐하임 씨입니다. 뉴욕에 구겐하임 박물관을 세운 구겐하임은 부자요 일등석의 VIP였지만 구명보트를 타고 살아남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양보하고 배에서 최후를 맞았습니다. 다만 브랜디 한잔을 갖다 달라고 주문하고 브랜디를 마시면서 배와 함께 가라앉았습니다. 세상에 더 나은 반쪽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로 반쪽다운 인물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물이 바로 그런 인물입니다. 

이차대전시에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준비할 때 최고의 극비사항은 언제, 어디서 상륙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정보가 빠져 나가면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최고 극비사항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군을 혼동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거짓 정보를 흘릴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작전이 이루어지기 며칠 전에 미국 육군 중장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다가 술에 취해서 날짜를 말했습니다. 

6월 5일! 6월 5일! 헨리 밀러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 보고가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올라갔고 헨리 밀러는 당장 영창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이젠하워와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의 룸메이트요 동기였습니다. 아이젠하워가 밀러 중장을 찾아가서 왜 그런 일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내가 술에 취해서 그랬다. 이제 나를 어떻게 할 거냐?’ 아이젠하워가 ‘너를 본국으로 보낼 거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그렇게 하지 말라. 우리는 다 같이 핵심 서클이 아니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핵심 서클. 그 말을 듣고 아이젠하워가 싸늘하게 대답했습니다. ‘핵심 서클이란 없다. 전쟁에서는 죽는 자와 사는 자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헨리 밀러 중장을 대령으로 강등해서 본국으로 보냈습니다. 실화입니다. 모름지기 군대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람이 극비사항을 노출시키고 그것으로 인해서 많은 사병이 생명을 잃을 수 있는 그런 사건에서 자기가 핵심 서클이라는 이유로 면책을 주장한다면 그건 지도자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핵심 서클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열두 명 중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핵심에 속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가실 때도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가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도 이 세 사람을 데리고 가셨기 때문에 이 세 사람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그야말로 제자 중의 제자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열 두 명중에 최초로 순교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야고보입니다. 이 세 명 중의 한 사람 야고보가 최초로 순교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 헤롯이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고 했습니다. 핵심인물인데 왜 먼저 죽느냐. 핵심인물이기 때문에 먼저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핵심인물이란 없습니다. 가장 핵심이신 예수님이 특권을 누리려고 하지 않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는데 누가 예수님 앞에서 특권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를 인간의 심리를 통하여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에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심리가 일치하는 경우는 별로 없어요. 대부분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사람의 생각은 어긋납니다. 서로 상반된 경우가 많아요.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만은 하나님 나라의 원칙과 사람들의 일반적인 심리가 일치하는 경우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 상좌에 앉지 말라’ 왜 그러느냐?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원칙을 말씀하시는 것인데 사람들의 본성과 일치하는 면이 있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누가 임의로 상좌에 가서 앉으면 우리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얄밉지요. 그 사람이 건방져 보입니다. 거만해 보입니다. 그래서 만일 누가 자리 좀 비키라고, 여기 다른 분이 앉아야 되니까 저리 가라고, 이런 일이 발생하면 말은 안하지만 마음속으로 통쾌하다 이렇게 생각하지요. 우리 다 못됐습니다. 그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도 이와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11절에 그 결론이 나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평소에는 어려워하고 또 멀게 느끼지만 하나님의 나라에는 이와 같은 통쾌한 면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소위 보수와 진보 간의 골이 너무 깊습니다. 이것이 나아질 조짐을 보이지 않습니다. 원래 보수와 진보라는 것은 정치철학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철학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보수가 될 수도 있고 진보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정부를 선호하면 진보이고 작은 정부를 선호하면 보수입니다. 성장을 통한 발전을 선호하면 보수이고 분배를 통한 발전을 선호하면 진보에요. 시장경제 차이를 더 많이 원할수록 보수이고 규제를 원할수록 진보에요. 자의를 강조할수록 보수이고 평화를 강조할수록 진보에 속합니다. 이것은 정치철학의 차이에요. 세계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란 대화가 필요하고 담론이 필요하고 흥정과 타협이 필요한 것이고 생각의 시장에서 자신의 의견을 마음껏 개진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는 이러한 대화가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아요. 상대방의 의견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철학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지위의 차이에서 비롯됐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어떤 의견을 말하면 그건 당신이 어떤 지위에 있기 때문이고 당신 가정에 어떤 배경이 있기 때문이라고 매도해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소신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소신이란 없어요. 철학이란 없어요. 사람이 속한 배경과 지위가 있을 뿐입니다. 

프랑스의 배우 중에 이브 몽땅 이라는 사람이 있었지요. 그는 부자였는데 80년대 초에 프랑스의 미테랑 후보가 사회당 대통령 후보로 나왔을 때 이브 몽땅이 미테랑을 지지했습니다. 미테랑이 대통령이 되면 사회당이기 때문에 세금이 올라갈 것이고 이브 몽땅은 부자이기 때문에 세금을 많이 내게 될 것입니다. 그는 그 사실을 알지만 국가의 정치를 철학 원칙의 차이에서 이해했기 때문에 미테랑을 지지했어요. 과연 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은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지 궁금한 것입니다. 대한민국 사회에 정치적인 발전, 타협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철학적인 차이보다는 이것을 계층 사회적인 지위의 문제로 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보수라는 것이 정말로 있다면 왜 대한민국의 보수는 존경을 받지 못하느냐? 그 이유는 아까 말씀드린 권사님 같은 분이 보수의 핵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같은 사람의 귀에도 거슬리는데 남에게는 오죽하겠습니까. 제가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것은 그분의 말의 내용이 아니고 그분이 말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이미 본인도 엘리트요 남편도 엘리트입니다. 사는 동네도 엘리트에요. 다니는 교회도 엘리트에요. 이미 많은 혜택을 누리면서 삽니다. 그런데도 자기 아들딸, 사위까지 그 혜택을 지속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랑스러워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것, 그건 추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저는 그분이 실수로 그 말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누구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 그런 식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언중유골이라고 실수로 흘린 말 속에 그 사람의 진심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은 사람이 당연히 상석에 앉으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인물이 왜 누가 인도하지도 않았는데 당연하게 상석에 가서 앉았습니까. 평소에 그것이 습관이 됐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당연히 상석에 앉을 인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영화 타이타닉의 케이트 윈슬렛의 약혼 남처럼 자기를 더 나은 반수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절만을 고려하더라도 누군가가 자리 안내를 할 때까지 기다려야죠. 여기 와서 앉으라고 인도할 때까지 기다려야죠. 왜 덥석 가서 앉습니까. 

요즘 식당을 가면 덥석 앉는 데는 아무데도 없고 주인이 자리 안내를 할 때까지 서서 기다려야 됩니다. 입구에 쓰여 있습니다. ‘자리 안내를 할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만약 그런 자리에서 기다리지 않고 자기가 먼저 가서 앉는 사람은 세상을 모르는 사람이고 예절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건 겸손하지 않은 것입니다. 

제가 결혼할 때 장인어른께서 제게 누차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목사가 교인들과 같이 식사할 때는 나이 순서대로 앉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젊은 목사가 연세 드신 장로님들과 어디 식사하러 가서 당연히 자기가 상석에 앉는 것을 보면 목사, 장로를 떠나서 이건 일반적인 예절에 맞지 않고 보기가 좋지 않다는 얘기에요. 저는 그때 그 말씀을 늘 유념하고 어디 식사하러 갈 때 일부러 옆자리에 앉으려고 하고 특별히 여자들만 있는 자리에서 나를 상석에 앉히지 말라고 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아니, 저 남자는 왜 이 중년 여자들 사이에 앉아있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거 아닙니까. 제가 봐도 이상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일부러 등을 돌려 앉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띠지 말라고. 저도 목사이지만 목회자의 세계를 보면 당연히 자기는 어른이기 때문에 당연히 상석에 앉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분들 많습니다. 이건 습관이 잘못 들은 것입니다. 대접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얘기인데 그래도 믿음이 있고 교회생활에 익숙하기 때문에 대접하려고 하지, 일반 세상에서 그렇게 했다가는 욕먹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원칙에 맞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뭐라고 부른다고 하셨습니까. 벗이라고 부른다고 하셨습니다. ‘벗이여 올라 앉으라’ 그러니까 청한 사람이라면 상석에 앉든 말석에 앉든 친하기 때문에 부른 것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석에 앉을 때에 벗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얘기에요. 말석에 앉을 때에 그 주인이 벗이라고, 친구라고 부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심리에요. 같은 친구끼리도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친구처럼 여기고 싶지 않아요. 친구처럼 친하게 생각되지 않아요. 거부감이 들어요. 자기를 낮추고 겸손할 때 친구끼리도 대접을 받습니다. 

사람이 이렇다면 하나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기 전에 사람의 마음부터 얻는 법을 배워야죠. 하나님을 감동시키려고 하기 전에 사람부터 감동시키는 법을 배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람도 감동시키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가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든 우리의 믿음의 음악이든 우리의 글이든 적어도 신앙인이라면 사람의 마음도 감동시키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이든 하나님이든 감동시키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애들 앞에서도 자기를 낮추면 애들도 마음을 엽니다. 남자든 여자든 상대방이 누구든 내 자신을 낮추면 상대방이 마음을 열고 소통이 가능해 집니다. 그러나 나를 당연히 대접받을 존재로 여기고 내가 이 세상의 핵심 서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한, 같은 교회 목사의 마음도 얻지 못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낮출 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뿐만이 아니고 사람들도 좋아합니다. 낮춤이라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스스로 자기를 낮추고 싶은 사람은 없지만 때로는 자의로, 때로는 타의로 낮아질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의가 됐든 타의가 됐든 낮아지면 낮아진 다음에 높임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귀중한 것입니다. 자의든 타의든 우리가 낮아질 때 낮아진 후에 높아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지금 낮아지고 계시다면 그건 앞으로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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