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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덜’의 길과 ‘더’의 길 (눅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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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의 길과 ‘더’의 길 (눅 13:1-5)


[바로 그 때에 몇몇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었다는 사실을 예수께 일러드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져서 치여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생명과 평화의 새 세상을 열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모든 이들 가운데도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려 파란 하늘만 서럽게 바라보는 탈북 난민을 비롯한 세상의 난민들과도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세상이 참 시끄럽습니다. 한 주간 내내 사람들의 시선은 제주도의 작은 어촌 마을 강정에 쏠렸습니다. 

정부는 대양해군 건설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항만 구축을 위해 천혜의 비경인 구럼비를 화약으로 폭파하기 시작했고, 그에 반대하는 이들은 울부짖으며 공사를 중단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정부가 저렇게 제주도 지사와 여야의 지도자들․도의회 의원들은 물론이고, 다수 국민들의 반대를 무시하면서 서둘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환경영향평가도 정밀하게 하고, 안전성도 진단하는 등 충분히 의견을 수렴해가면서 추진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선거를 앞둔 정치권이 요동을 치고 있습니다. 공천을 둘러싼 계파간의 갈등이 노골화되고 있습니다. 국민의 시선이 온통 갈등의 현장에 쏠리고 있습니다. '여'니 '야'니 진영 논리에 따라 마음이 쏠립니다. 그러니 마음이 고요할 틈이 없습니다. 전쟁터에 풀이 자랄 수 없는 것처럼 우리 마음도 점점 황폐해갑니다. 가끔 화가 납니다. 우리 생활이 온통 정치의 볼모가 된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제일 좋은 정치는 국민들을 심심하게 만드는 정치가 아니던가요? 

옛날에 중국의 요 임금은 자기가 정치를 잘 하고 있나 확인하고 싶어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저잣거리로 나갔습니다. 그는 한 노인이 길가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한 손으로는 배를 두들기고 또 한 손으로는 땅바닥을 치며(含哺鼓腹) 장단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해 뜨면 일어나고(日出而作)
해 지면 들어가 쉬고(日入而息)
내 손으로 우물 파서 물 마시고(鑿井而飮)
밭 갈아서 내 손으로 먹고 사는 데(耕田而食)
임금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帝力而于我何有在哉)” 

격양가擊壤歌입니다. 이 노래를 들은 요임금은 크게 기꺼워했다고 합니다. 이런 세상에 살고 싶지 않습니까? 지금 현대 사회를 규정하는 단어들은 거의 다 부정적입니다. ‘위험사회’, ‘피로사회’, ‘팔꿈치사회’, ‘소비사회’, ‘무한경쟁사회’. 이런 사회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없는 곳입니다. 여기서는 깊고 친밀한 관계를 맺기 어렵습니다. 자기의 약한 모습을 내보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다른 사람의 기대에 어긋날까봐 두려워합니다. 

• 예루살렘 길 위에서 

1년 전 오늘은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난 날입니다. 쓰나미는 지나갔지만 원전의 피해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 사고는 원전이 안전한 에너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류에게 각인시켰습니다. 단 한 번의 사고로도 후손들의 미래까지 망가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세계는 두려움으로 체감했습니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원전의 가동을 멈추거나 줄여나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반대의 길을 선택하고 있는 듯하여 안타깝습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1주기를 맞으면서 오늘의 본문이 계시처럼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한껏 부풀어 있지만 주님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 길이 고난의 길이고 죽음의 길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전체제에 기대어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이들은 그 체제의 맹점과 위선을 지적하면서 백성들을 깨우는 예수에게 적대감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은 그 길을 피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비장합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12:35)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12:49)
“너희는 땅과 하늘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왜, 이때는 분간하지 못하느냐?”(12:56)
“어찌하여 너희는 옳은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12:57)

예수를 따르는 이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이 찾아와 소식을 전합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건이 그 때 벌어진 것인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가 그 사실을 기록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기록으로 보건대 빌라도는 참 잔인하고 문화적 우월감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기가 지배하는 유대인들의 신앙이나 관습에 무지했습니다. 

한번은 그가 로마 군대의 깃발과 이방 신들의 상징물들을 들고 예루살렘에 들어가려다가 민중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쳐 가이사랴로 돌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자기 의지가 좌절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인지 그는 식민지 백성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사단을 벌이고 말았습니다. 산에서 도시로 물을 끌어오기 위해 수도교(水道橋, aqueduct)를 건설하다가 비용이 부족하자 그는 성전 기금을 가져다가 썼습니다. 

유대인들은 거룩한 것에 손을 댄 빌라도의 처사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고, 그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항의집회에 참여했습니다. 그때 빌라도가 택한 것은 공포의 정치였습니다. 그는 갈릴리에서 온 순례자들을 성전에서 학살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어주려 했습니다.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성탄절이나 부활절 예배 때 군인들이 교회에 난입해 사람들을 학살한 것과 같습니다. 

• 때를 분간하라

사람들이 다가와 예수님께 그 사실을 알린 까닭은 무엇일까요? 예수님도 갈릴리 출신이니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하려던 것일까요? 아니면 빌라도의 행위에 대해 강하게 비난해 주기를 기대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그들의 무고한 죽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이지 신학적으로 해석해 달라는 청이었을까요?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보면 당시의 사람들이 그 사건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그런 참혹한 최후를 맞은 것은 숨겨진 죄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2b-3)

듣는 사람들은 좀 당황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바꿔놓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왜 그런 참혹한 죽임을 당했는지를 묻기 전에 자기 삶을 돌아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삶의 자리에서 보면 예수님이 참예한 정치적 사안을 두루뭉수리로 만들어 김을 빼버리는 것 같아 불편합니다. 저도 이 대목에서 저항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예수님의 마음을 알 것도 같습니다. 주님은 때를 분간하시는 분입니다. 떨쳐 일어나야 할 때도 있지만 물러서야 할 때도 있고, 목숨을 걸어야 할 때도 있지만 목숨을 아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주님은 의로운 사람이라는 명분을 취하는 대신 따르는 이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역사가 거꾸로 흐르는 듯 해 인심이 거칠어질 때, 욕망의 물결이 높이 설렐 때, 거품이 일어 실체가 보이지 않을 때, 억눌린 이들의 신음소리가 낭자할 때야말로 정신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가야 할 길을 가늠하는 이가 필요한 때입니다.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그들이 다 잘 알고 있는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성전 남쪽에 있던 실로암 탑이 무너져서 열여덟 사람이 깔려 죽는 사고가 벌어졌는데, 그들이 죄가 많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강력한 말씀입니다. 가끔 우리는 이런 저런 사고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봅니다. 

그리고 그런 사고를 겪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합니다. 배고픈 사람들을 보면서는 굶주리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합니다. 테러가 일상화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나라에 태어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차마 그것을 입 밖에 낼 수 없습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런 불행을 겪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셔서도 아니고, 그들이 죄인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세례자 요한의 말은 강력합니다. 속옷 두 벌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눠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이 회개입니다. 세리들은 법으로 정해진 세금 이외에 더 걷지 않는 것이 회개이고, 군인들은 사람들을 착취하거나 우격다짐으로 자기 뜻을 관철시키지 않는 것이 회개입니다. 

목사들은 종교적 권위를 내세워 사람들을 지배하려 하지 않는 것이 회개이고, 대기업 경영자들은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돌려주는 것이 회개입니다. 헨리 뉴엔 신부는 회개를 ‘아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고난의 쟁기로 잘 갈아진 마음이요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요 밭에 묻힌 보배를 볼 줄 아는 마음이요 부드러운 사랑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이다.”(헨리 뉴엔, <안식의 여정>, 325쪽)

이 마음이 없어 세상이 황무지가 되고 있습니다. 이 마음이 없어 생명의 바람이 잦아들고, 평화의 물결이 가라앉고 있습니다.

• 그리운 나라

불행을 당한 사람을 보며 그들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따져보는 것은 잔인한 짓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죄인인 우리에게 여전히 생명이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입니다. 쓰나미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인들이 보여준 삶의 모습은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방만한 삶을 돌아보았고,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불편한 삶을 감수했습니다. 일본 사회는 이제 ‘절전’에 민감한 사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옆 나라에서 벌어진 대재앙을 보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에너지를 과잉 소비하는 사회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2030년까지 원전을 지속적으로 확대한다는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는 말조차 무색해지는 현실입니다. 

김광규 시인은 <화산이 많은 나라>라는 시에서 평범한 삶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유황열탕 수증기 뿜어대는 호수 주변에/신경통 위장병 류머티즘 부인병 피부병에 좋다는/노천 욕장 만들어놓고/98℃ 온천수에 계란을 삶아서 판다”. 유황연기 뿜어대는 고원 지대에 화려한 호텔들이 즐비하고, 가파른 산비탈과 아찔한 대협곡을 가로지르는 로프웨이로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고, 만년설이 쌓인 정상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시인은 언제 다시 폭발할 줄 모르는 휴화산을 밑천으로 아슬아슬하게 시간의 돈을 버는 나라를 보며 아뜩함을 느낍니다. 그러고는 부글부글 지하수가 끓어올라 넘칠락말락 뜨끈뜨끈한 바위를 골라 밟으며 떼 지어 몰려다니는 원숭이 떼 없어도 좋다면서 시를 이렇게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보여줄 것 없어서 마음 놓고/가난하게 살 수 있는 곳/그립다 화산이 없는 나라”

특정한 나라를 떠올릴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도 이런 위태로운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욕망의 활화산 위에 집을 짓고, ‘더 많이, 더 크게, 더 편리하게’를 외치며 사는 동안 세상은 훨씬 위태로운 곳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더’의 길은 언제나 이웃을 배제하고 홀로 행복하려는 길입니다. 그것은 반신앙의 길이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길입니다. 이제 우리가 택해야 할 길은 ‘덜’의 길입니다. 뒤에 오는 다른 이들을 위해 좀 남겨놓을 줄 아는 마음이야말로 평화를 만드는 마음입니다. ‘덜’의 길이야말로 생명의 길이고 평화의 길입니다. 

얼마 전 T.V를 통해 남극에 사는 황제펭귄들의 생태를 보았습니다. 감동적이었던 것 가운데 하나는 그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기 위해 펭귄들이 수행하는 생존의 전략인 ‘펭귄 허들링’(penguin huddling)이었습니다. 펭귄들은 서로 몸을 밀착시킴으로 찬바람을 막아내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면 안에 있는 펭귄들이 바깥으로 나가고 바깥에 있던 펭귄들이 안으로 들어가 몸을 녹이도록 했습니다. 그 놀라운 광경에 깊이 감동했습니다. 신앙공동체란 바로 저런 것이겠다 싶었습니다. 극한의 이기심을 버리고 기꺼이 자신이 바람막이가 되기 위해 바깥에 서는 이들이 늘어난다면 세상은 훈훈해 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정말 우리 삶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가 왜 살아있는지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더’의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 ‘덜’의 길로 접어들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의 옷자락을 보게 됩니다. 사순절은 그런 삶을 연습하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여러분의 삶이 한결 단출하면서도 든든해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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