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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의 교회를 위한 기도 (엡 1: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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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교회를 위한 기도 (엡 1:15-19)


제가 팔이 아파서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치료 과정 가운데 충격 치료라는 것이 있습니다. 상처 부위에 전자파로 충격을 주어 치료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픈지 눈물이 쏙 빠질 때도 있습니다. 상처 부위에 이렇게 충격을 주는 것이 치료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냐고 의사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의사가 말하기를 우리 신체는 신비하게도 몸이 위험에 처해 큰 아픔이 생기면 그곳으로 몸의 모든 에너지들이 몰린답니다. 우리 몸은 신비한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몸의 한 지체가 위협을 받으면 다른 지체는 자신에게 있는 모든 자원을 위험에 처한 지체에게 내어줍니다. 반대로, 몸의 한 지체가 강해지면 그 에너지가 다른 지체에게로 흘러갑니다. 다윗은 우리 몸의 신비함을 시편 139편 14에서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그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신비함 그 자체입니다. 몸의 신비한 조직과 마찬가지로 초대교회는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더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심한 기근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른 지역의 초대교회들은 그들도 어려운데 서로 힘을 모아 물품을 보내 주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도 조금 더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것을 팔아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에베소서가 기록되던 당시는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로 인해 모든 교회들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교회들에게 힘과 위로가 되는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하는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자신이 에베소 교인들을 다시 볼 수 없음을 알고 애틋한 마음으로 편지를 쓰면서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 내용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에는 네 가지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의 두 가지만 생각해 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더욱 잘 알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합니다. 17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께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함께 하셔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하나님을 더 깊이 바르게 아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정작 교회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또 더 깊이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사람이 중심이 되어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교회를 이끌어갑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인데 사람들이 주인이 되어 주장하고 소리를 높이니 교회가 교회다워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정신을 중심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도리어 교회의 근심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 즉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을 더 깊고, 넓게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 가운데 욥기를 보면 욥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동방의 의인이었다고 말할 만큼 하나님을 온전하게 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사단이 시기합니다. 사단은 하나님께 ‘욥이 저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욥을 너무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욥이 고난을 당하면 그는 바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부인할 것입니다’라고 참소했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믿음을 믿었기에 사단에게 욥의 생명만은 건드리지 말고 시험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은 욥을 시험했습니다. 욥의 열 자녀가 모두 죽었습니다. 재산을 다 빼앗겼습니다. 온 몸에 종기가 났습니다. 아내가 도망갔습니다. 단지 목숨이 붙어 숨을 쉬고 있을 뿐이지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갔습니다. 

욥의 세 친구와 또 한 사람 엘리후가 욥을 위로하러 왔다가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은 각 자가 하나님의 생각에 대해 자신이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주장하며 욥이 고난을 받는 원인이 죄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욥은 자신을 변호하며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인용하며 자신이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 상대방을 정죄하는데 머뭇거림이 없습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 보면 모두가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핏대를 올리며 서로를 정죄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치던 욥과 그의 친구들이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만난 후에 욥의 고백이 욥기 42장3-6절에서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욥은 자신의 무지함을 회개합니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잘못된 판단과 주장을 거둬들이고 회개합니다.

제대로 된 믿음을 가지려면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면 잘못된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어리석은 짓들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기 생각과 잘못된 경험을 중심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보령에서 있었던 세 자녀를 죽인 부부도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는 관계없이 자신의 감정과 자신의 생각, 경험에 뿌리를 둔 신앙입니다. 매우 위험한 신앙입니다. 

초대교회 가운데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많이 받은 교회입니다. 좋은 일꾼들도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운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이 중심이 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그룹을 형성하며 자신들의 힘을 자랑했습니다. 자신들의 은사를 자랑하며 자신의 믿음과 역할이 더 귀하다고 자랑하며 높임을 받기 원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좋은 일꾼과 귀한 은사가 많은 교회였는데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났고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생각과 주장이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도 우리 개인과 교회들 속에서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아픔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교회에 다니는 분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 교회에는 실업인 모임이 있고 실업인 기도회가 있다고 합니다. 그 실업인 기도회에서 담임 목사님과 한 사람씩 나와 악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을 찍어 주고 300만원씩 받았습니다. 선교 헌금이라는 명목이었습니다. 자신도 그 사진을 사서 집에 걸어 놓았다고 자랑했습니다. 그 유명한 담임목사님과 악수를 했다는 것이 자랑입니다. 그것이 300만원입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교회의 주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역할은 목회자만이 아니라 교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평신도 지도자들도 그와 같은 잘못된 역할을 할 수가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려면 사람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성령님은 통해서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가는 교회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개인과 교회가 하나님을 더 바르게 깊이 알아 하나님께 아픔과 짐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힘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두 번째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해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본문 중에 18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우리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신 뜻이 무엇인가? 우리를 모아 교회를 이루게 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물건마다 만든 목적이 있고 용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우리를 통해 교회를 이루게 하심은 우리를 통해서 하기 원하시는 일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교회로 세우심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마음의 눈이 하나님 안에서 밝아져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기시 원하시는 소망, 즉 비전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부르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복음을 증거 하는 이들로 삼기 위해 12제자를 부르신 것입니다. 12제자가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신 목적을 따라 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자신들이 높아지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목적과 다른 길로 갔습니다. 섬김의 자리로 부르셨는데 섬김을 받는 자리를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계속 갈등을 만들었고 결국은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통해 다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부르신 목적이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죽기까지 순종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합니다. 죽음이 두려워 다 도망을 갔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얻게 된 하나님 나라를 전하다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것은 바울 자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의 주장과 생각, 경험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후에 새로운 하나님의 세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죽기 직전까지도 그는 예수님을 증거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합니다. 자신의 인생의 목적과 비전을 바르게 깨달은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 ‘마음의 눈을 밝히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교회를 이루게 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부르심의 소망을 우리는 비전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 비전을 가진 개인 그 비전을 가진 가정이 그 비전만큼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나태합니까? 왜 우리가 안주합니까? 왜 우리가 흔들립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부르심의 소망을 붙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꿈이 있는 사람, 하나님의 교회로서 뚜렷한 꿈이 있는 교회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소망, 꿈은 어떤 어려운 환경과 역경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재물과 건강, 자녀의 성공과 직장과 사업의 성장은 우리 신앙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신앙인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즉 하나님입니다. 목적이 수단이 되고 수단이 목적이 되는 신앙이 되면 그것은 타락한 신앙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 하나님을 바르게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성령 안에서 마음의 눈을 열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행복한 교회 모든 성도님들과 행복한 교회가 하나님을 더 바르고 깊게 알아 신실한 믿음의 사람과 공동체가 되길 원합니다. 또한 성령님 안에서 영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세우신 뜻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아 그 뜻을 이루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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