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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머리 (막 15: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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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머리 (막 15:16-20)

 
❚정신적 고통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포르투갈의 예수회에서 일본에 파송한 페레이라 크리스트반 신부가 예수를 부인하고 배교를 합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으로도 유명한 일본의 지배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7년 ‘금교령’을 내려 일본에서의 천주교 활동을 엄격히 금지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엄벌에 처합니다. 

이때 페레이라 신부는 이미 30년 이상 일본에서 선교를 해왔는데 배교를 한 것입니다. 너무나 놀란 포르투갈의 예수회 본부는 페레이라 신부의 세 제자를 직접 일본에 파견하는데, 평소 스승의 성품과 굳은 심지를 잘 아는 제자들도 너무 궁금해 일본까지 직접 가서 조사해 보니 참 놀라운 이유 때문에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처음 페레이라 신부가 일본 당국에 붙잡혀 갖은 회유와 협박을 받을 때는 꿈쩍도 안 했습니다. 내가 죽을지언정 어떻게 주님을 부인하겠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 당국은 잔인하게도 페레이라 신부를 숨겨준 일본인 신자들을 고문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일부러 그 고통스러운 고문에 신음하고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페레이라 신부가 듣게 한 것입니다. 몇날 며칠을 그렇게 고문하니 귀를 틀어막고 몸부림치던 페레이라 신부는 결국 “내가 배교할 테니 저 죄 없는 사람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게 된 것입니다. 이 신부가 굴복한 것은 결국 육체적 고문이 아닌 정신적 고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살면서 겪게 되는 고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당하는 육체적 고통이 더 괴로우냐, 아니면 정신적 고통이 더 괴로우냐 할 때 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고통이 훨씬 힘들고 괴롭다는 것입니다. 몸이 힘들고 괴로운 것보다 정신적으로 힘들고 괴로운 것이 훨씬 견디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이런 경험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가난하고 돈이 없는 것, 몸이 아픈 것, 다 참고 견딜 수 있지만 더 괴로운 것은 마음이 힘든 것입니다. 정신적인 고통입니다. 그래서 온갖 실패와 시련 때문에 인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그럴까요? 왜 사람은 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고통을 더 힘들어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육체보다 정신을 더 중요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육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신이 육체보다 더 위이기 때문에 육체는 힘들어도 참지만 정신적인 고통은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누군가를 정말 못살게 굴고 싶다면 이렇게 하십시오. 그 사람의 육체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기보다 아주 집요하게 정신적으로 힘들게 만드십시오. 정신적인 고통을 가하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못 견디고 못 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받으신 모욕

오늘은 사순절 셋째 주일입니다. 우리 위해 당하신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묵상하고 동참하는 사순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주님이 우리 위해 당하신 고난을 순서대로 살펴보려 합니다. 오늘은 지난 주 ‘주님의 등’에 이어 ‘주님의 머리’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등에 채찍질을 맞은 후 일어난 일입니다. 지난주 예수님이 채찍질을 당해 그 등이 찢기고 살이 너덜너덜 해지도록 고난을 당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채찍질 후에 또 어떤 고난을 당했다고 성경이 말씀합니까?

16절에 보면 로마 군인들이 채찍질로 탈진한 주님을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로마 총독 빌라도의 집무실로 데려가 그곳 뜰에 모든 부대원을 모으고 우리 주님을 모욕하기 시작합니다. 괜히 온 군대를 소집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 죄 없는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것을 보여주려 함입니다. 온 부대가 주님을 마음껏 비웃고 손가락질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쯤 되면 더 이상 어떤 육체적 고통이나 형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모욕 주고 조롱하는 단계입니다. 어떤 정신적 고통입니까?

맨 먼저 ‘자색 옷’을 예수님에게 입힙니다(17절). 죄수가 채찍질을 당할 때는 옷을 벗겨 맨살에 채찍질을 합니다. 그런데 채찍질 당한 예수님을 끌고 가서는 자색 옷을 입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벌거벗은 것이 불쌍해서 입힌 것이 아닙니다. 잔인한 채찍질로 찢기고 너덜너덜 헤진 살 위에 자색 옷을 입힌 것입니다. 이 ‘자색 옷’은 아마 로마의 군인들이나 관리들이 입던 짧고 붉은 망또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자색 옷’은 아무나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었습니다. 황제나 입을 수 있는 색깔입니다. 

조선 시대에 ‘곤룡포’(衮龍袍)라 불리는 옷이 있었습니다. 중국 황제만 입을 수 있는 노란색 의복도 있었던 것처럼 당시 자색 옷은 아무나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라 황제만 입을 수 있는 색깔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자색 옷을 주님께 입힌 것일까요? 예수님을 황제나 임금으로 인정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하기 위해 입힌 것입니다. 

문제는 채찍질을 당해 다 찢기고 피범벅이 된 주님 몸에 자색 옷을 입혔다가 20절에 보면 다시 벗겼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자색 옷에 피가 묻고 그 피가 마르면서 옷감이 상처에 들러붙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옷을 험하게 벗기면 옷에 붙었던 상처가 다시 떨어지면서 엄청난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고통은 예수님에 대한 조롱과 인격적 모독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에게 가해진 모욕과 조롱은 바로 그 머리에 ‘가시관’을 엮어 씌운 것입니다(17절). 예수님을 조롱하던 군인들은 주변에 자라던 가시나무를 꺾어 관을 만들어서 예수님의 머리에 씌웁니다. 이 가시나무가 어떤 가시나무일까요? 저는 이스라엘에 성지순례를 갔을 때 그곳에서 자라는 가시나무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가시나무가 아마도 예수님의 가시관을 만든 나무였을 것이라는 가이드의 말을 들었는데 그냥 작은 가시가 아니라 아주 길고 날카로운 가시를 가진 가시나무였습니다. 그래서 이 나무를 지금도 ‘그리스도의 가시’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에게 가시로 관을 만들어 씌웠을까요? 당시 사용되던 동전을 발굴해보니 답이 나왔습니다. 그 동전에는 로마 티베리우스(Tiberius)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데 머리에 면류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에게 황제의 관을 씌운 것입니다. 경배하기 위해서? 아니요. 조롱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서 자색 옷을 입힌 것처럼 이 가시로 만든 관을 씌우면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하고 희롱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시관이 씌워진 예수님의 머리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날카로운 가시에 찔리고 찢겨 예수님의 머리에서는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그 길고 날카로운 가시에 찔리고 찢긴 예수님의 머리가 얼마나 아프고 쓰라렸겠습니까? 하지만 이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은 예수님에 대한 조롱과 인격적 모독이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에게 가해진 모욕은 18절에 나옵니다. 자색 옷을 입히고 머리에 가시관을 씌운 후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에게 경례를 하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말합니다. 마치 신하들이 왕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전하, 만수무강 하옵소서” 하는 것을 흉내 내서 말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진정한 절이나 문안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말 속에는 “네가 자칭 유대인의 왕이냐? 웃기고 있네” 하는 조롱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주님에게 가해진 모욕은 ‘갈대’로 머리를 치며 ‘침’을 뱉고 무릎을 꿇어 절한 것입니다(19절). 이 갈대는 마태복음에 의하면(27:29)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오른손에 들게 했던 것입니다. 이 갈대는 황제의 오른손에 들려있던 ‘홀’(笏)을 대신한 것입니다. 홀은 왕이 들던 지휘봉 같은 것인데 왕의 통치권을 상징합니다. 로마 군인들은 말하자면 예수님에게 왕의 분장을 시키면서 자색 옷을 입히고, 머리에 가시로 관을 씌우고, 오른손에는 홀 대신 갈대를 쥐어준 것입니다. 그야말로 광대 분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광대에게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시키고 재미있다고 웃는 것처럼 우리 예수님에게 왕의 분장을 시키고 자기네끼리 낄낄대며 비웃고 마음껏 조롱한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 군인들은 이 갈대를 빼앗아 이번에는 예수님의 머리를 치기 시작합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저는 중고등학생 때 선생님에게 출석부로 머리를 맞아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적이 있나요? 저는 출석부로 얻어맞는 머리는 별로 안 아픈데 마음이 아팠습니다. 반 친구들 앞에서 출석부로, 그것도 머리를 얻어맞을 때 어찌나 부끄럽고 수치스럽던지 말입니다. 여기 선생님들 계시지요? 절대 머리는 때리지 마세요. 

요즘은 아예 체벌을 금지한다지만 혹 한 대 때려줄 일이 생기더라도 제발 머리는 때리지 마세요. 자녀들도 마찬가지고 누구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왜요? 머리는 그 사람의 인격이고 자존심입니다. 여러분이 혹시 인도네시아를 여행하신다면 아이들 귀엽다고 절대 머리 만지면 안 됩니다. 우리는 아이들 귀엽다고 머리를 쓰다듬지만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사람의 영혼이 머리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머리 쓰다듬었다가는 큰일 납니다. 

지난번 제가 중국 소수민족 지도자세미나 갔을 때 들은 얘기인데 거기 모인 분들이 대부분 ‘요족’이라고 불리는 소수민족인데 요족 여자는 머리를 절대 만지지 말라고 하더군요. 요족은 여자 머리를 만지면 무조건 데리고 살아야 한답니다. 큰일 날 뻔 했습니다. 물론 다 흘러간 옛날 풍급이지만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전통적으로 사람들은 머리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머리에는 신체에서 가장 중요한 뇌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징적으로 머리는 그 사람의 인격이나 자존심을 뜻합니다. 그러니 머리를 때리면 그 사람에 대한 심각한 모욕입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로마 군병들이 갈대를 가지고 예수님 머리를 때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철저하게 모욕하고 자존심을 짓밟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 장면을 한 번 떠올려 보세요. 갈대를 가지고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 머리를 때립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흐물흐물한 갈대가 아니라 꽤 길고 나무처럼 뻣뻣한 갈대입니다. 

이 갈대로 주님의 머리를 치니 안 그래도 가시에 찔려 검붉은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머리에 가시가 더욱 깊이 박혀 더 고통을 당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머리는 또 한 번 철저하게 모욕당하고 고통을 받습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습니다. 그러더니 다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합니다. 정말 몸서리 쳐지는 장면입니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장면입니다. 너무나 모욕적이고 너무나 끔찍합니다.

❚가시관과 면류관

사랑하는 여러분,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했을까요? 왜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이런 일이, 몸서리쳐지는 이런 모욕과 조롱을 우리 주님이 받으셔야 했을까요? 그것도 아무 죄도 흠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말입니다. 왜 등에는 채찍질을 당하고 끔찍한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오히려 그 육체적 고통보다 더 크고 끔찍한 정신적 고통을, 그 견디기 힘든 모욕과 조롱을 우리 주님이 당하셔야 했을까요? 그 답은 이사야 53장, 우리가 사순절과 고난주간에 꼭 읽어야 할 ‘여호와의 종의 노래’에 나옵니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누구 때문입니까? 바로 ‘우리’ 때문입니다. 죄를 지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대신해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끔찍한 채찍질, 본디 그 채찍에 맞아야 할 죄인은 우리인데 주님이 대신 맞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그 엄청난 조롱, 그 어떤 육체적 고통보다 견디기 힘든 모욕과 정신적 고통은 본디 우리가 받아야 할 것인데 주님이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에는 다 신이 있지만 세상에 어떤 신이 자기 외아들을 사람 위해 죽으라고 내어줍니까?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어떤 신의 아들이 죄도 없는데 자기 목숨을 죄인 위해 내놓고 끔찍한 모욕과 멸시 당합니까?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기 바랍니다. 내가 받아야 할 모든 고통과 그 엄청난 모욕과 조롱 다 대신 받으신 주님을 찬양하기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쓰신 그 가시관이 결국 면류관이 되셨습니다. 날 위해 쓰신 조롱의 가시관, 고통의 가시관이 결국 빛나는 영광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나 위해 흘리신 검붉은 고난의 피가 바로 우리를 구원한 보배로운 피, 보혈이 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 구원을 위해 기꺼이 가시관을 쓰시니 면류관을 받으시게 된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한다며 가시관 씌우고 온갖 모욕 주었지만 그 모든 것이 진정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심을, 만왕의 왕 되심을 증거한 셈이 되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도 주님 쓰신 그 가시관 써야 면류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 지신 십자가 함께 져야 부활의 찬란한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 아니 ‘나’를 위해 조롱당하고 십자가 지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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