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영적 쓰나미 경고 (히 11:7)

첨부 1


영적 쓰나미 경고 (히 11:7)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년 전인 지난해 3월 11일, 우리 이웃나라 일본에 엄청난 쓰나미(지진해일)가 발생해 지구촌을 놀라게 했습니다. 사실 쓰나미는 세계 곳곳에서 수없이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전인 1868년 8월에 칠레에서 쓰나미가 발생했는데, 그 때 사망자 수는 2만 5천여 명에 달했습니다. 1964년 3월에는 알래스카 동남부에 쓰나미가 발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날을 기념하는 성금요일에 일어난 이 쓰나미로 인해서 130여명이 사망했고, 재산피해는 3조 달러(약 3,500조원)에 달했습니다. 1976년 8월에는 필리핀에서 쓰나미가 발생해서 최소 5천 명 이상이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2004년 성탄절 다음날 일어난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에서 일어난 쓰나미는 23만에 이르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3월 11일에 발생한 일본의 쓰나미로 인해 1만 9천여 명에 달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이재민이 40만 명에 달했습니다. 유치원과 보육원을 비롯해서 무려 7200개의 학교가 피해를 입었고, 경제적인 피해액은 17조엔(약 230조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쓰나미가 발생한 후 일본정부에서는 14조 엔에 이르는 추경예산을 편성해서 복구에 나섰지만, 그것으로는 피해를 회복하는 데 별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17조엔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서 14조 엔은 (우리가 자주 하는 말로 한다면) 새발의 피에 불과합니다. 사고가 발생한지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해안가 도시들은 폐허가 된 채 쓰레기 더미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습니다. 

쓰나미로 인해 발생한 쓰레기가 무려 2250만 톤에 이르는데, 1년 동안 처리한 쓰레기는 그 중 불과 5%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본 정부는 2014년까지 그 쓰레기를 다 처리하겠다고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왜냐하면 지난 1년간 치운 5%의 쓰레기 처리 이후 이제 쓰레기를 처리할 수 있는 한계에 부딪혀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이렇게 많은 피해를 입게 된 것은 이 때 일본에 밀어닥친 쓰나미가 관측 역사상 가장 높은 38.9m에 달했기 때문입니다. 38.9m에 이르는 거대한 파도가 시속 115km의 속도로 일본 동북부 해안을 덮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일본이 그렇게 엄청나게 피해를 입게 된 것은 경고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엄청난 쓰나미가 몰려오기 불과 이틀 전인 3월 9일에 규모 7.2의 강진이 발생했습니다. 그 때 일본에서는 동북부 지역에 쓰나미가 올 수 있다고 경고를 내렸습니다. 비록 그 크기를 50cm정로라고 예측했습니다만, 이미 작은 경고를 한 번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주민들은 그런 경고에 신경도 쓰지 않고 그저 평범하게 일상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틀 후인 3월 11일에 진도 9.0의 대지진으로 인해 엄청난 쓰나미가 몰려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시속 115km속도로 밀려오는 40여m에 달하는 쓰나미야 대피할 수 있는 시간조차 없이 밀어닥쳤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할지라도, 사실 일본 쓰나미로 인한 원전사고가 보이지 않는 더 많은 피해를 안겨주었습니다. 이 원전에 대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경고를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 가운데 하나가 일본 츠쿠바대학(筑波大學) 지진연구소에 근무하는 42살의 시시쿠라 마사노부(Shishikura Masanobu) 박사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몇 명 안 되는 고지진학자 중 한 사람인 그는 일본 쓰나미가 발생하기 2년 전인 2009년 원자력발전 안전성에 관한 학회에서 공식적으로 대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원전이 파괴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는 3,500년 전부터 현재까지 발생한 지진의 규모와 빈도 등을 연구하면서 ‘400-600년 주기로 큰 지진이나 쓰나미가 발생하는데, 1707년 일본에 쓰나미가 발생했기 때문에 이제 곧 다시 쓰나미가 닥칠지 모른다고,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비록 그의 주장이 작은 메아리에 불과했을지 모르지만, 그 경고가 현실로 나타났을 때에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초래한 후가 되고 말았습니다. 

작은 경고에 조금만 더 귀를 기울였더라면 엄청난 재난은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에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반드시 작은 경고들이 주어집니다. 그 경고를 무시하고 대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큰 재앙이 임하게 됩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하인리히 법칙이 그걸 우리에게 깨우쳐줍니다. ‘1:29:300’이라는 하인리히 법칙이 있습니다. 한 번의 큰 일을 당하기 전에 29번의 경고가 있고, 300번의 작은 신호(경고)가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보험회사에서 보험관독관으로 일했던 하인리히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이론입니다. 작은 신호와 경고들을 무시하면 결국 큰 사고를 당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바꿔 이야기하면 300번의 작은 경고와 29번의 경고가 있을 때에 빨리 깨달으면 그는 큰 사고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우리 인간은 수없이 경고를 받으면서도 나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해버립니다. 그러다가 큰 사고를 겪게 되고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모습을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받을 때 그 경고를 경고로 받아들인 사람은 재난 가운데서 살아남을 수 있지만, 그 경고를 무시한 사람은 결국 낭패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에 사람들은 죄악에 깊이 물들어 있었습니다. 성경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창세기 6:4) 네피림이란 말은 거인들, 영웅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 말이 뜻하는 바에서 그들이 누구인지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골리앗처럼 신장이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컸습니다. 그리고 초인간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서 무력으로 세상을 지배했던 사람들입니다. 

고대 서사시인 길가메쉬 서사시에서는 그 네피림을 ‘초인적인 반신반인(半神半人)’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힘이 최고의 무기였고, 그 힘을 바탕으로 강포를 행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 때에는 명성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누구나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이 행하는 대로 따라했습니다. 무력이 난무하고 힘 있는 사람이 최고였습니다. 힘으로 약한 사람을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게’(창세기 6:11)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 편에 있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말하는 하나님 편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네피림이 지배하는 땅의 사람들을 흠모하여 땅의 사람들같이 되어버렸습니다. 부패와 포악함에 물들어갔습니다. 이제 하나님 편에 있는 사람은 다 사라졌습니다. 오직 노아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당시 세상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했고, 사람들의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들은 언제나 악한 것들뿐이었습니다.’(창세기 6:5) 어디를 둘러보아도 선한 구석이 없었고, 사람들이 하는 꼬락서니가 모두 악한 것들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기로 결정하십니다. 그리고는 마지막 남은 노아를 통해서 세상에 경고를 주십니다.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신 것입니다.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노아의 가족과 짐승들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한 경고입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노아는 방주를 해변에 지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다”(창세기 7:17)는 기록으로 추측하건대, 방주는 제법 높은 산에서 지어졌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해안가에 짓지 않고 산에서 지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방주를 짓기 위해서 필요한 목재를 얻기 쉬운 곳이 산입니다. 몇 명 되지 않는 인원으로 산에서 나무를 채벌하여 바닷가로 옮겨서 방주를 짓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 대한 경고의 행위였습니다. 바닷가에서 배를 짓는다면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산속이나 산 위에서 배를 짓는다면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고, 노아에게 물을 것입니다 ‘왜 방주를 거기에다 짓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면 노아는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이 너무 죄악으로 가득 차 있고 포악함이 넘쳐나서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홍수를 일으켜 이 땅을 멸하실 것입니다.’ 노아가 정확하게 얼마 동안 방주를 지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얼마 동안 방주를 지었든지, 그가 방주를 짓는 기간은 세상에 하나님의 경고를 알리는 기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노아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 듣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을 때 그것을 즉각 수용하고 경고에 대비했다고 말입니다. 노아도 그 경고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온 땅을 멸망시키겠다. 홍수로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멸절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 수용하는 것이 어찌 쉽겠습니까? 아직도 세상은 팔팔합니다. 사람들이 기세등등하게 살고 있습니다. 날로 문화는 발달되어가고 있습니다.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망할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당시에 살던 사람 가운데 어느 누구도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상을 멸망시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그 말씀을 믿지 않을 때, 그 말씀을 믿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노아입니다. 노아도 그 말을 믿는 것이 쉽진 않았겠지만, 그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는 곧 실행에 옮겼습니다. 방주를 건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경고 받은 자가 취해야 할 모습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경고의 메시지를 받고서도 실행에 옮기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정황상 그럴 수 있다고 동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으로 실행하지 않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으로는 공감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걷기 운동을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다 압니다. 그러나 실제로 걷기 운동을 한다는 것은, 걷기 운동이 건강에 좋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그 운동이 건강에 좋다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이 맞다고 인정을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신앙인답게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내 삶에서는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깨달은대로 살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면서 자기합리화를 해버립니다. ‘이것은 맞는 말이지만, 지금 내 상황에는 맞지 않아.’ ‘이 말씀은 그대로 하면 내게 손해가 돼. 아마 하나님께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이해해 주실거야.’ 그렇게 우리는 적당한 핑계를 대면서 삶으로 실천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경고의 메시지를 받을 때 그것을 경고로 받긴 받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버립니다. 그래서 나중에 하겠다고 미룹니다. 지금 당장에 뭔가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전혀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타이타닉 호가 그래서 침몰하지 않았습니까? 타이타닉 호가 침몰하기 전까지 6번에 걸쳐 경고를 받았습니다. 1912년 4월 10일 2200여명의 승객을 태우고 영국 사우샘프턴(Southampton) 항을 출발하여 미국 뉴욕(New York)으로 가던 당대 최고의 호화유람선 타이타닉 호는 출항한 지 불과 5일 만에 바다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출항한 지 4일 째 되던 4월 14일 오전 9시 타이타닉 호에 본사로부터 긴급타전이 전송되었습니다. ‘북대서양에 빙산이 떠다니고 있으니 각별히 주의를 요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11:40분에는 주변을 지나던 네덜란드 국적의 노담(Noordam) 호가 ‘빙하를 조심하라’는 경고 메시지를 보내왔고, 그 후에도 계속해서 빙산에 대한 경고전문이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경고문들은 선장의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밤 9:40분 메사바(Mesaba) 호로부터 ‘넓이가 78마일이나 되는 거대한 빙하가 타이타닉 호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경고메시지가 날라왔습니다. 이것이 6번째 경고였습니다. 그런데 무선 담당자인 필립이란 사람은 ‘그동안 계속 날아든 경고메시지에도 아무 일이 없었는데’ 하는 생각에, 그리고 ‘날씨가 맑기 때문에 멀리 있는 빙하도 쉽게 관측될 수 있고 비켜갈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에 빠른 속도로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5시간 후에 타이타닉 호는 빙산에 부딪혀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많은 경우에 경고를 받긴 받지만 그것을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몸에 이상 신호가 계속 오는데도 별로 관심 갖지 않다가 큰 병에 걸리는 것과 같습니다. 경고를 받았을 때 바로 실천에 옮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천에 옮기지 않는 경고메시지는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우리를 재난에서 건져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노아는 경고를 받고서 나중에 해도 된다는 안일한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경외함으로’ 그 경고를 받아들여 곧바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창세기 6:2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해 줍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나중으로 미뤘다는 이야기도 없고, 자기 생각에 좋은 대로 계획을 바꾸었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했습니다. 그게 경고 받는 자의 자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노아는 경고를 받고서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노아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렵게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홍수로 멸하시겠다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경고를 농담으로 여겼다가 몰락한 사람의 이야기가 창세기 19장에 나옵니다. 소돔이 불과 유황으로 멸망당할 때, 롯은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서 자기 딸들과 곧 결혼할 두 사위를 찾아가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그러자 그 두 사위는 장인인 롯이 전해 준 그 경고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창세기 19:14) 농담으로 여긴 사람이 그 경고를 심각하게 듣겠습니까? 결국 롯의 두 사위는 롯이 전해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긴 결과 소돔과 함께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말씀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자기 가족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경고를 주십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을 때 말씀을 통해서 경고해 주십니다. ‘그 길 끝에는 큰 구렁텅이가 있으니 여기에서 멈추고 방향을 바꾸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욕망 때문에 하나님을 잊고 살 때에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심령에는 하늘의 평화가 없다’고, ‘다시금 하나님을 기억하는 신앙의 자리로 돌라오라’고 경고해 주십니다. 

우리가 세상과 타협하려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타협함으로 얻어지는 것은 곧 사라질 것이고, 믿음의 고집을 가지고 손해를 감수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기업이 되어주신다’고 경고하십니다. 신앙이 게을러지고 나태해질 때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는 신앙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니, 다시금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라’고 경고하십니다. 사명의 자리에서 이탈해 세상을 즐기고 있을 때 ‘이 세상의 즐거움은 극히 짧다’고, ‘세상의 즐거움에 취하면 하늘의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넓고 편한 세상의 길을 따라 가려할 때 ‘그 길은 신앙인의 길이 아니라’고, ‘신앙인의 길은 좁은 길이요 십자가를 따르는 길이라’고 경고하십니다. 
  
때로는 말씀을 통해서 경고의 메시지를 주시기도 하고, 때로는 양심의 소리를 통해서 경고하시기도 하십니다. 때로는 가까운 이웃이나 친구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통해서 깨닫도록 경고를 주시기도 하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통해서 경고를 주시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평안할 때 경고의 메시지를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 평안을 계속 갖고 싶은 욕망 때문입니다. 그런데 평안의 때에 우리의 신앙과 우리 사회의 도덕적인 모습이 타락하기 쉽습니다. 타락하여 죄악에 물들어가고 있는데도, 삶이 여유롭다는 이유만으로 경고를 무시하곤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데살로니가전서 5:3) 평안하다고 말하는 때, 안전하다고 말하는 때를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때가 더 위험한 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고난의 때에는 경고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때에는 하나님의 경고를 쉽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평안의 때에는 다가올 재난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경고를 무시해버립니다. 그러다가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남 유다가 멸망할 때도 그랬습니다. 여러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멸망을 경고했습니다. 그런데 유대 백성들은 그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경고의 말씀을 듣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줄기차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심지어 미움을 받아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우물에 던져져 죽을 고비를 맞을지라도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제사장이나 거짓 선지자들은 그 경고를 듣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평안한 때라는 것입니다. 평안할 때 멸망한다고 경고를 함으로 나라를 어지럽히지 말라고, 백성들을 혼란에 빠뜨리지 말라고 예레미야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오히려 예레미야를 핍박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전 586년 바벨론에 침공을 받아 처참하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평안할 때가 조심할 때입니다. 평안할 때가 경고를 받아야 할 때입니다.

나무타기 달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무타기 달인은 한 제자에게 까마득히 높은 나무에 올라가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는 스승의 말씀에 따라 커다란 나무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가지가 곧 꺾일 것만 같은 꼭대기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나무 아래에 있던 스승이 제자에게 소리를 칩니다. ‘나무의 맨 꼭대기에서 낭창낭창하게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베어내라’고 말입니다. 나무 아래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쥐고 그 아슬아슬한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제자는 조심조심하여 낭창거리는 맨 꼭대기 나뭇가지를 베어냈습니다. 그리고는 나무를 내려옵니다. 제자가 맨 꼭대기에 있는 그 위험한 가지를 베는 일을 잘 마치고 내려오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던 스승은 제자가 거의 다 내려왔을 때 이렇게 말해 줍니다. 

“이보게, 조심하게.” 그러자 나무 주변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참 이상하시네요. 나무 꼭대기에 올라 가지가 부러질지 모를 아슬아슬하고 위험할 때에는 아무 말씀 없으시더니, 이제 펄쩍 뛰어내려도 될 정도로 다 내려왔는데 이제야 조심하라고 말씀하시니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스승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조금도 이상하지 않네. 사람이 위험한 지경에 이르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조심하는 법이지. 그래서 위험지역은 위험지역이 아니라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위험지역을 벗어나 안전지역에 도달하면, ‘이제 다 되었구나’하고 방심하게 된다네. 그 때가 바로 사고를 당할 수 있는 위험한 순간이라네.” 

여러분, 그렇습니다. 안전하다고 생각할 때가 위험할 때입니다. 그러기에 경고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안전하다고 생각할 때 들려오는 경고를 무시해버립니다. 그래서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갑자기 닥친 힘든 일을 겪기도 합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평안하십니까? 평안하다고 생각할 때 일본 동북부에 갑자기 쓰나미가 몰려왔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평안하다고 생각할 때 쓰나미가 몰려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쓰나미가 몰려오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경고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그 경고의 메시지를 무시하지 마십시다. 평안할 때 경고의 메시지를 듣고 내일을 준비하십시다. 평안할 때 방주를 짓는 것이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그것만이 살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경고의 메시지를 경외함으로 듣고 순종하십시다. 그게 믿음이요, 그게 내일을 준비하는 자세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