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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회자의 신앙적 준비 (눅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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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신앙적 준비 (눅 1: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눅 1:80) 

I. 본문해설 

세례 요한은 예수의 오시는 앞길을 예비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그는 선지자로 등장을 해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몇 편의 설교만을 남기고 비극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생애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손가락과 같은 생애였습니다. 

정치적으로 정적의 관계에 있던 헤롯까지도 그를 거룩한 사람으로 알아 마음속으로 그를 두려워했고, 완악했던 유대인들조차도 그는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흔들어놓은 위대한 말씀의 역사는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긴 세월동안 외로운 광야에서 연단된 그의 영성을 통해 나타난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II. 역사와 사람 

하나님께서는 역사와 사람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모든 역사에서 사람들의 이름을 꼭짓점 삼아서 줄을 이으면 그것이 곧 하나님이 일하신 역사입니다.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기이한 성력의 능력, 지성을 찢고 들어오는 찬란하고 밝은 빛, 놀라운 중생과 회심의 능력, 말씀의 탁월한 능력은 인간이 만든 방법 위에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 위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A. 성경의 역사 

창세기를 열면, 하나님께서는 무의 상태에서 세계를 창조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본떠 사람을 만드십니다. 죄가 들어오고 인간은 자신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능력으로 세계를 구원하실 계획을 펼치십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가문을 이어가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수됩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중요한 인물인 모세가 나타납니다. 영적이며 세상의 학문에도 탁월하여서 구약성경 중 첫 번째 다섯 권을 저술하는 영예를 누립니다. 다음에는 믿음의 역사성을 보여준 여호수아가 등장합니다. 또한 그 후에는 직임적인 선지자와 왕의 제도를 도입한 훌륭한 인물인 사무엘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놀라운 사랑을 부어주셔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기초를 놓는 중요한 역사를 이루십니다. 또한 신구약을 통틀어 높은 준봉을 이루는 위대한 신학자이며 철학자가 등장합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한 인물입니다. 그 후 내리막길을 달리다가 이사야라는 높은 봉우리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태양과 같은 분이 등장하는데, 세례요한 다음으로 등장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B. 교회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가 떠나신 후 사도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모세나 다윗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사도 바울이 등장합니다. 그는 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선교가요, 목회자요, 교회개척자요, 철학자요, 사상가였습니다. 신약성경 전체의 절반이상을 저술하는 영예를 안게 됩니다. 그 후 속사도 교부들이 지나가며, 오리겐(Origenes, 185-254)이나 이레네우스(Irenaeus115-202),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60-220)이라는 중요한 교부들이 등장합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3-430)가 나타나는데, 그는 기독교 역사와 서구 역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입니다. 

중세로 접어들면서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 1095-1160), 안셀무스(Anselm of Canterbury, 1033-1109)가 나타납니다. 11세기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필적할 수 있을 정도로 가톨릭에 영향을 끼쳤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가 등장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철학으로 기독교를 설명했고,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기본으로 기독교를 설명하려 했으며 기독교 역사상 가장 방대한 기독교 사상의 집적을 이루었던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12세기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등장합니다. 또한 루터가 이뤄 놓은 종교개혁을 실질적으로 마무리하고 개혁신학의 기초를 놓은 중요한 인물인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이 등장합니다. 

주후 16세기 후반에는 개신교의 전성시대라 할 수 있는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가 열립니다. 천재적인 학문의 역량과 깊은 경건을 소유한 그 시대의 위대한 인물들은 종교개혁 1, 2세대가 굵은 붓으로 그린 커다란 종교개혁의 대의를 미세한 붓으로 상세하게 그리면서 어마어마한 유산을 남겨놓습니다. 이때 또한 저의 학문적 스승 중 한분인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이 등장합니다. 

17세기에 오웬이 활동하고 있을 때, 이성주의와 치열하게 싸우면서 『변증신학강요』를 쓴 프란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in, 1623-1687)이 높은 산으로 나타납니다. 18세기에는 자유주의자들이 등장합니다. 그 후 미국 대륙에서 위대한 사상가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가 나타납니다. 19세기에는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 20세기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 등등의 인물들이 나타나고 또 벤저민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1851-1921) 같은 인물들이 나타납니다. 개혁주의 시대는 거의 막을 내리고 이제 자잘한 신학자들과 유구한 개혁신학의 전통을 잘 모르는 목회자들이 작은 산을 이루면서 살아가며, 우리도 그 중 한 구릉과 같은 세대입니다. 

세상의 역사의 중심은 구원의 역사이고 구원 역사의 핵심은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이 위대한 인물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이었고 동시에 그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신실한 믿음과 신앙과 인격으로 반응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싶다면 하나님이 쓰실만한 사람이 되도록 자신을 준비해갈 때, 역사 속에서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III. 목회자의 소명 

A. 그리스도와의 만남 

목회자의 소명은 무엇일까요? 소명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예루살렘 교회의 첫 번째 목회자로 부르실 때, 그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소명의 주가 되어야합니다. 

1. 십자가와 부활사건 

소명은 사명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신앙에서 출발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설명할 수 없는 두 개의 명제가 그를 짓눌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과 다시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며, 다시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를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둘 사이에서 신적인 조화가 필요했습니다. 

거기서 바울이 충격적으로 깨달은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유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심판을 받으셔서 죽으신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으로 다시 부활하신 사실과는 아무런 모순이 없습니다. 이렇게 바울처럼 지성의 벼락을 맞지 않고는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김세윤 박사의 박사학위 논문에 의하면, ‘신적인 강제력’의 경험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나는 이제 복음을 온 천하 만민들에게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는 신적인 확신이 바울의 가슴속에 불길처럼 타올랐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신학, 목회, 선교, 모든 사역의 핵심이며 진원지입니다. 그래서 소명은 무의식이 아닌 의식의 세계 속에 밀려들어 옵니다. 

한 사람에게 목회의 소명이 밀려오기 직전 그의 의식은 요한복음 3장 16절-“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로 집약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 바쳐 영혼을 구원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싶은 신적인 강제력이 내 안에 역사할 때 그것이 바로 소명입니다. 

2. 아가페(Agape)와 까리따스(Caritas)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경험하게 되면 아가페와 까리따스에 대한 경험이 생겨나게 됩니다. 복음의 빛을 발견하면 자신의 모든 불행의 궁극적인 원인과 이유가 바로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 대해서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아가페의 사랑의 경험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을 경험하면, 그 사랑에 대한 나의 전인격적인 반응으로 까리따스의 사랑이 일어납니다. 

저는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을 ‘지순애(至純愛)’라고 부릅니다. 더 이상 순수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사랑입니다. 또한 이 사랑은 은혜의 작용이 가져단 준 결과입니다. 또한 이렇게 하나님 사랑에 대한 감화를 받게 되면 사랑해야 할 모든 대상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까리따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에게로부터 나와서 모든 창조세계를 휘돌고 하나님 당신 자신에게로 회귀하는 삼위일체적인 사랑의 우주적인 흐름 속에서 자신은 그 흐름 속에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나는 사라지고 나를 통하여 주님의 사랑만이 흐르고, 하나님만이 온 땅과 우주에 가득한 사랑으로 충만하게 나타나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 소명의 핵심입니다. 

B. 소명 없는 신학공부 

소명이 없이 신학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말로는 비참합니다. 소명이 없는 신학공부는 체계적으로 공부를 하지 못하면 인간적인 세속주의에 흐르게 되고, 공부를 잘하면 자유주의 신학으로 흐르게 됩니다. 페트루스 판 마스트리히트(Petrus van Mastricht, 1630-1706)라는 17세기의 개혁파 정통주의자는 자신의 책속에서 ‘신학을 가르치면서 경건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위선이다.’ 라고 못 박았습니다. 신학은 학문을 하는 주체보다 학문의 대상이 무한히 큽니다. 유한자가 무한자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사실 처음부터 신학은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신학은 학문의 목적이 학문이 아니라 소명이고 하나님을 향한 경배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기 싫은 사람에게 신학은 쓸모없는 것입니다. 


IV. 소명의 불변성과 가변성 

A. 과거적 소명의 유익과 한계 

목회에 대한 소명이 이러한 것이라면, 그 소명은 현실적으로 불변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가변적인 것일까요? 먼저 과거적의 소명의 유익을 생각해봅시다. 사도바울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푯대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는 것’(빌 3:10)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것을 알고 그 한길로 달려가는 것이 이 사람의 소명이었습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분께 붙잡혀 ‘오직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려하나니’ 라는 신앙 고백이 생겼고, 그것이 푯대가 됐습니다. 

앞의 푯대가 있기 위해서는 뒤의 푯대가 분명해야합니다. 그래서 힘들고 유혹에 흔들리며 침체에 빠질 때라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복음을 전하는 자로 불러주셔서 죽든지 살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는 데 나를 온전히 바치도록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중요하며 신학을 하는 길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항상 소명을 받았던 순간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과거적 소명은 한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소명 자체가 지속적인 헌신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소명은 중요한 헌신의 동기이지만 지속적인 헌신을 자동적으로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소명을 받아도 쓰레기같이 살 수 있습니다. 둘째는 지속적인 성화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바울도 소명을 확실히 받았음에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 희랍어로 갈라디아서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를 보면 현재완료형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지금까지도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붙잡혀서 예수의 성품을 닮아가는 일 없이는 성화를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셋째는 지속적인 영적인 성장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지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것을 ‘힘적인’(physical) 방식과 ‘설득적인’(persuasive) 방식으로 주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첫째로, 힘적인 방식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초월적으로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당신을 사랑하는 경향성을 심으시는 것인데, 중생시에 이러한 일이 우리의 영혼에 일어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신령한 것들에 대한 새로운 감각(new sense)을 주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설득적인 방식은 도덕적인 설득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는 날마다 내 안에 추한 것을 발견하여 자기 사랑을 버리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 그분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진리의 빛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증거 하는 자료들의 정수입니다. 회심한 사람이 새로운 감각으로써 하나님의 진리의 아름다움을 묵상하면서 예전보다 점점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지성적으로뿐만 아니라 초월적으로도 경험할 수 있도록 개인적인 영적 부흥과 지성의 설득을 동시에 추구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매일매일 말씀에 은혜를 받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알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초월적 사랑의 경험을 간구하여야 합니다. 


B. 소명을 유지하는 길 

1. 소명의 유지: 지식(知識) + 사랑 

소명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지식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 보에티우스(Gisbertus Voetius, 1589-1676)는 ‘지식은 경건과 결합한다.’ 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신학의 특성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삼십 대 중반에 신학의 모든 분야들이 어떻게 아름답게 통합을 이루는지를 영적으로 경험했고 사십 대 후반에는 모든 학문이 결합을 이루면서 창조세계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드러내는지를 경험했습니다. 모든 지식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 한 분입니다. 그분에게서 모든 지식이 나오고 모든 지식은 다시 하나님께로 회귀합니다. 그 안목은 신학만으로 모자랍니다. 그러므로 신학뿐만 아니라 인문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이런 것들을 공부해가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질서에 대해서 폭넓은 안목을 갖도록 부지런히 독서를 해야 합니다. 또한 그 중심에는 성경이 있어야 합니다. 

2. 소명의 영역: 신앙 

소명의 영역은 신학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면 공부를 좀 못해도 소명이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지를 들고 예수를 믿으라고 계속 전하며, 교회에서 어린 영혼들에게 설교를 하다가도 눈물이 쏟아집니다. 그것이 소명이며, 소명은 신앙에서 유지가 됩니다. 

a. 신앙의 질료-신학의 형상 

신앙이 빵의 재료라면 신학은 그 빵을 빚어내는 제빵사의 손입니다. 신앙은 질료이고 신학은 형상입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불특정하고 설명하기 힘든 신앙적인 체험들이 신학에 의해서 올바르게 빚어질 때 하나님에 관한 아름다운 증거가 됩니다. 생생한 신앙체험도 있고, 주님을 뜨겁게 만나고, 성경을 읽을 때 마음이 불타오르는데 주일에 설교 할 때마다 생명 없는 이야기를 한다면 신학이 정리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방향을 잃은 채 자기만의 길을 가게 됩니다. 

b. Stigmata tou Jesu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진리의 말씀에 자기를 합치시키면서 살려고 하는 비장한 몸부림이 있어야합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그 몸부림은 ‘예수의 흔적(stigmata tou Jesu)’입니다. 즉, ‘누구도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도다.’입니다. 흔적은 당신의 노예라는 표시입니다. 그것을 자기의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예수께 붙잡힌바 되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c. 신뢰할 수 없는 사역자 

제가 신뢰하지 않는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그가 추구하는 목회적 가치는 자기 신앙의 차원에서 습득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목회자의 자리에 세워 놓으면 지도자로서 일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고, 기도회를 이끌 것이며, 교회의 치리를 담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예배자였던 적이 없는 예배 인도자, 진지한 설교의 청취자였던 적이 없는 열렬한 설교자, 교회의 치리에 복종해본 적이 없는 당회장, 간절한 기도자였던 적이 없는 뜨거운 기도 인도자, 애타는 전도자였던 적이 없는 선교사, 이런 사람들은 신뢰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목회적인 과업들은 사역이지만, 그 사역들을 참으로 생명력 있게 하는 것은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3. ‘한 책’의 사람 

우리는 또한 ‘한 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철학 수업을 들어가면 철학공부를 안하면 인간이 안 될것처럼 설명하고, 실천신학과목에 강의를 들으면 실천신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나머지 신학지식들이 아무 가치 없는 것들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또 조직신학과목을 수강하면, 조직신학을 모르면 꿰지 않은 구슬인 것처럼 말합니다. 제가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존경하는 김희보 박사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항상 열심히 공부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항상 하시는 말씀이 “천 권의 책을 읽어야 한 권의 책을 쓸 수 있습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여러 종류의 신학 서적을 읽으면서 어떤 신학적 사실들을 발견하시면 해당 성경구절 여백에 깨알 같은 글씨로 기록을 해 두셨습니다. 신학을 하면서 고민하는 신학적 내용들이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에 도움을 주도록 수렵되어야 한다고 믿으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될 사람들은 많은 책을 읽어도 이처럼 한 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4. 그리스도를 사랑함 

오년 전에 LA에서 집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총신신대원 교수님으로 계셨던 이상근 박사님을 찾아뵈었습니다. 그분은 은퇴하실 때까지 저를 조교로 데리고 계셨습니다. 참 자애로우시고 경건하신 노인이셨습니다. 내가 찾아 뵈었을 때는, 사모님은 이미 칠년 전에 돌아가시고 94세가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교수님은 거동이 불편하셔서 보호장구를 의존하여 절뚝거리면서 작은 아파트에 혼자 살고 계셨습니다. 큰절을 올리고 나서 제가 여쭈었습니다. “목사님 혼자서 이렇게 계시기 얼마나 외로우셔요” 그랬더니 그분은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대답하셨습니다. “외롭긴 뭐가 외로워. 내가 혼자인가? 우리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비록 사랑하는 아내가 곁을 떠나도 불편한 노구를 이끌고 살아계셔도 그분은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고 계신 것이 느껴졌습니다.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나도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저분처럼 홀로 남겨졌을 때, 그렇게 고백할 수 있을까? 신학 공부를 하면할수록 더욱 뜨겁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와 열애에 빠진 지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5. 마음을 쏟아 기도함 

신앙적인 준비를 위해서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 앞에 열렬하게 기도하십시오. 보에티우스는 자기의 책속에서 ‘마음을 쏟는 간절한 기도야말로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경외의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로이드존스(Martyn Lloyd-Jones, 1899-1981) 목사님은 ‘설교는 항상 쉽고 기도는 매일 어렵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한 학기가 끝나면 공부는 열심히 했지만 영혼은 깊은 때가 묻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때마다 친구들과 강원도에 있는 기도원에 가서 일주일 동안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여름방학 때는 여름성경학교를 앞두고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기대하면서, 겨울방학 때는 신년 목회계획에 복을 주시도록 빌면서 친구들과 함께, 혹은 혼자서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을 의례하여야 하는 일처럼 여겼습니다. 

하나님 앞에 한 번밖에 허락되지 않는 인생인데 정말 주님을 위해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살게 해달라고 열렬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내려오면서 서로 “우리 정말 주님 뜻대로 살아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종들이 되자.”고 다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역사에 쓰임 받는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인간으로 태어날 필요는 없지만, 평범하게 살아서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소중하게 쓰임을 받을 수 없습니다.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V. 결론 

여러분의 경쟁상대는 지금 함께 공부하고 있는 동급생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경쟁상대는 존 오웬, 존 칼빈, 조나단 에드워즈,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1718-1747), 헨리 마틴(Henry Martyn, 1781-1812) 같은 위대한 인물들입니다.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았던 위대한 인물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세상에 알려진 유명한 신학교 외에 광야의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교장이 되셔서 그들을 훈련시키시므로 그들은 불꽃같은 생애를 살아서 하늘의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신학공부를 통해서만 목회자로서 준비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준비를 통하여 목회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시때때로 여러분들의 마음을 찢으며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타오르는 젊음을 핏빛 신앙으로 물들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되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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