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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회자의 인격적 준비 (눅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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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인격적 준비 (눅 1: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눅 1:80) 


I. 들어가는 말 

어린 시절부터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기 전, 빈들에 있는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하니라.”고 한 누가복음 3장의 보도는 전형적으로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사의 소명 기사를 따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에게 임했다고 하는 것은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그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메시지와 그 메시지에 담긴 하나님의 심정까지 선지자에게 이입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임재를 경험했고, 빈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외치면서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하여 회개 없는 세례를 수단으로 삼으려고 하는 이들의 삶을 규탄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외친 선포,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놀랍게도 잠시 후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 선포와 일치하였습니다. 그는 광야에 있는 긴 세월동안 하나님 앞에서 신앙의 연단의 과정을 통하여 한사람의 설교자로서 그의 외침에 적합한 인격으로 변모 되어갔습니다. 그는 이렇게 철저하게 자신을 준비하다가 어느 순간 그가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인격의 그릇에 담겨서 고고한 울림으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하나님의 음성으로 다가갔습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II. 목회자를 세우심 

A. 성육신의 원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서 삶과 인격, 섬기는 모든 것으로써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우리에게 계시해주셨습니다. 그분 자신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사랑을, 당신의 자비를 보여주시기 위해 말씀으로만 증거 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위해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비참하게 죽으시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고 주님께 이르는 거룩하고 새로운 산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리를 보여주신 방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성육신의 원리가 그대로 목회자들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셨더라면 어떤 모습으로 사셨을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교훈이 우리에게 육화될 때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지를, 하나님께서 몸소 들려주실 뿐 아니라 보여주시기 위해서 목회자를 세우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내가 곧 그 길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도(道)’삼아 따라가는, 구도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목회자입니다. 그래서 진리에 관심이 없는 목회자는 목회 사역을 그릇된 지점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벽한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완벽하게 본받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똑같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원리를 본받아서 성도들과 구도의 길을 걸어가며 주님의 사람이 되어가고, 또 성도들과 한 형제로서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 다르지만 진리이신 그리스도 한분을 사랑하며 일치를 이루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B. 지복과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당신의 ‘이마고 데이’(Imago Dei) 즉, 형상을 따라서 창조하셨습니다. 이 형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원 안에 있는 형상이고, 이 형상의 가장 고귀한 표현이 지성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님과 모든 세계에 대해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는데, 바로 지성입니다. 지성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서 사물들을 아는 라티오(ratio, 이성)와 직관을 통해 모든 사물들을 논리를 초월해서 인식할 수 있는 인텔레겐티아(intellegentia, 오성)로 나뉩니다. 지성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형상의 가장 고귀한 기능이며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책속에서 인간이 행복을 느끼고 누리는 것은 인텔렉투스(intellectus), 지성을 통해서라고 갈파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 받는 세상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지복을 상실했습니다. 죄가 들어오고 인간이 타락하면서부터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내적인 기반인 하나님의 형상이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물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두 개의 인식능력을 주셨는데, 하나는 이성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이었습니다. 이성은 어느 정도 남아있지만, 신앙은 산산이 파괴되어서 하나님을 알 수도 없게 망가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수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를 선택하여 주시고 복음을 듣게 하셨습니다. 

어두운 밤바다와 같은 우리의 영혼에 지성의 진리의 밝은 빛이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이천년 전에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가 바로 나를 위한 십자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잃어버렸던 하나님 형상을 회복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망가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이 이 시대의 고통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C. 목회자와 그리스도의 형상(Imago Christi)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신약에 와서는 기독론적인 전환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 온전한 앎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뿐만 아니라 동시에 참된 인간의 모본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관한 이중지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구체화되어서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보다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기까지 자라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 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로버트 머리 맥체인(Robert Murray M'Cheyne, 1813-1843)은 책속에서 ‘신자에게 주시는 최고의 축복은 그리스도를 많이 닮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목회자였고, 그가 기도실에서 기도한 후 강단에 올라서서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모든 성도들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얼굴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만났고 그 분이 저렇게 거룩하신 분이시라면 지금 예배드리러 나온 우리는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라고 생각하면서 흐느껴 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에게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최고의 축복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닮기를 사모하십시오. 교회를 향한 목회자의 최고의 섬김은 참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III. 목회자로 산다는 것은 

A. 목회자의 자격 

목회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목회자의 자격이 있습니다. 

몇 해 전, 『나는 외과의사다』(강구정. 사이언스북스, 2003)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의사 중에 의사는 외과의사라고 하면서 외과의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세 가지 말합니다. 첫째는 독수리의 눈, 바로 지성(知性)입니다. 사람의 배를 갈라놓고 간이 어디 있는지 심장이 어디 있는지 모르면 되겠습니까? 치열하게 공부해서 고도의 지성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는 사자의 심장, 담력(膽力)입니다. 심장이 손톱만 해서는 의사 못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이 상처 받으면 어떡하나 걱정하면서 벌벌 떠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죄로 인해 곪아터졌으면 외과 의사처럼 칼로 갈라서 바꿔 끼우든지 잘라내든지 하는 담력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여인의 손길, 곧 기술(技術)이 필요합니다. 외과의사는 손재주가 좋은 사람들이 잘합니다. 목회자에게도 꼭 같이 적용될 수 있는 자격입니다. 탁월한 지성과, 담대한 영력, 그리고 세밀한 목회 기술이 그것입니다. 

신학 공부를 조금 잘 한다는 분들은 영력을 하찮게 여기도, 기도를 많이 하여 영력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목회 기술 자체를 인간적인 수단으로 여겨서 얕잡아 보는 데, 이는 잘못된 태도입니다. 목회자가 되기 위한 자격으로는 지성과 영력과 목회의 기술 세 가지 모두 구비되어야 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하루 아치에 터득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천천히 형성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쉬지 말고 부지런히 공부하고, 기도하고, 영혼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여야 합니다. 

B. 인격적으로 준비됨 

1. 목회와 리더십 

목회자로 산다는 것은 인격적으로 준비가 되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연단 받는 것은 지도자가 되기 위함입니다. 결국 이 일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어떤 지도력을 가지고 있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리더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소인배형 리더십과 성자형 리더쉽입니다. 소인배형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는 보스가 되고 싶어서 옆에 자신의 똘마니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는 곳에는 항상 분열과 분쟁이 그치지를 않습니다. 권력을 잃어버렸을 때는 엄청 비굴하고 권력을 잡았을 때는 잔인하리만치 가혹합니다. 이에 비해서 흔하지는 않지만 조용하지만 성자의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을 만납니다. 자신이 보스가 아니라 리더로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으면서 주님을 사랑하고 맘껏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으로 만족하는 리더십입니다. 

목회자가 되고자하는 사람은 괴로움과 고통은 자신이 짊어지고 편안하고 좋은 것은 성도에게 돌리려고 하는 마음, 자신은 잊혀 져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아로 새겨지면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해하는 사람. 바로 그런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지금 부터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붙잡히고 이타적인 리더십으로 자기를 끊임없이 훈련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 4:12)고 말했습니다. ‘너희를 위해 우리는 날마다 죽노라’ 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서서히 지도자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2. 겸손과 예의 

영성, 탁월한 소명, 헌신이라고 하는 특수한 가치는 보편가치의 토대위에 세워집니다. 그래서 저는 실력 있는 목사, 영적인 설교자가 되기 전에 먼저 신사가 되라고 항상 목회자들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이 나가서 목회를 하면 아주 비천하고 예의바르지 못한 사람부터 사회적으로 여러분과 비교될 수 없이 아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까지 폭 넓은 사람들을 만날 것 입니다. 그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겸손과 예의입니다. 너무 겸손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너무 예의바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에티켓에 관한 책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모른 채, 어느 한 순간 목회자가 됩니다.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목회자에게 쏠립니다. 그런데 그 시선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인격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정말 겸손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 되십시오. 

3. 인내와 견딤 

첫째로 모함을 참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도 다른 것은 참아도 모함을 참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악의를 가지고 나의 평판을 깎아내리거나 파멸시키기 위해서 없는 말을 지어내서 나를 모함하는 사람들까지도 목회자는 참아야 됩니다. 우리는 모함을 받을 때조차도 그리스도를 향한 평상심을 잃지 않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악을 악으로 대적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면 시간이 흐르면서 똑같은 사람이 됩니다. 둘째로는 비난을 견디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길을 가고 싶어 하는 우리는 근거 없는 비난도 견딜 줄 알아야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악의적인 비난에 귀를 기울이라. 우리를 향한 악의적인 비난 속에는 우리에 대한 진실이 담겨있다.” 그래서 자신을 성찰하는 기회로 삼아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하였습니다. “나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최대한 예의 바르게 대해주자.” 이러한 노력들은 교회의 일치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우리 자신을 때로 오해와 비난을 받아서 아파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온전한 채로 상처 없이 남기를 간구하여야 합니다. 셋째로는 혈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계에서는 끝없는 소송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 안에 모든 일치가 깨뜨려지고 도덕적으로 사회의 지탄을 받는 공동체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는 대부분의 경우 목회자들의 참지 못하는 혈기 때문입니다. 

4. 정직과 올곧음 

a. 정직의 학교에서 

목회자로 산다는 것은 정말 정직해야 합니다. 제가 교수가 되어서 수백 명의 레포트를 받았는데, 똑같은 내용의 레포트들이 있었습니다. 비교해보니 내용은 같은데 한 학생은 명조체, 다른 학생은 필기체 이렇게 낸 것입니다. 그리고 수업시간에 한 학생이 다른 학생의 출석을 대신 해줍니다. 누구에게 부탁한 사람도 나쁘지만 그 부탁을 들어준 사람도 나쁩니다. 주님이 보고 계시는데, 그런 부탁을 받으면 ‘주 앞에 바르게 살아라’ 하며 충고를 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런 부탁을 받았다면, 그런 정도의 부탁을 해도 들어줄 수 있을 정도로 양심이 혼탁한 인간이라고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부탁을 받는 것입니다. 또한 신학교에 가서 컨닝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신앙의 양심의 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날 같은 양심을 가지고 이런 문제와 더불어서 싸워야 합니다. 

b. 공짜를 미워함 

이 세상에서 정말 공짜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두 번째는 신학교입니다. 이것은 신학교에 다닐 때부터 길들여집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평생 잊혀 지지 않을 하나의 지침을 주겠습니다. ‘구원 이외의 모든 공짜는 나쁘다.’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사랑의 빚을 지는 것을 성격이 허락했지만, 받는 자보다 부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타인을 자기 성취의 수단으로 삼으려고 하지 말고, 자신을 남을 위하여 그렇게 내어주어 유익을 끼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남에게 도움을 받는 것을 어떠한 경우에라도 당연하거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말고, 더욱이 다른 이들에게는 여러분이 신학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도와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작은 연필하나라고 할지라도 도움을 받는 것을 부자연스럽게 여기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하여 부채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욱이 신학생 시절에 교회의 특정인에게 신세를 지고 그 때문에 개인에게 지나치게 굽신거리는 것은 선자지자의 후예로서 자라나는 모습이 아닙니다. 사람으로부터 오는 공짜는 늘 부자연스럽고, 기쁘지 않은 것이 되도록 여러분 안에 그러한 성향을 깃들게 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신학대학원에 다니던 시절, 학회의 경비를 연말에 결산하고 보니 구십 퍼센트에 가치운 지출항목이 식비와 간식비였습니다. 학생들의 학문활동을 돕기 위하여 책정된 공금을 그렇게 사용하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공돈으로 먹기를 좋아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서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것입니다. 

5. 고난과 기도 

a. 스트라디바리우스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까지 살았던 사람 중에 스트라디바리우스(Stradivarius)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악기를 제조하는 사람이었는데 바이올린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바이올린뿐만 아니라 하프 등 약 1100개 정도를 만들었습니다. 저도 그가 만든 바이올린을 봤는데 시가로 45억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기가 막힌 악기가 탄생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 악기를 제조한 장인의 탁월한 솜씨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무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모진 언덕에 몇 십 년 동안 자라도 조금밖에 자라지 않는 그런 차지고 옹진 나무들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선별될 수 있는 나무 자체가 아주 희귀한 것입니다. 그것이 악기의 품질을 결정합니다. 

b. 고난의 두 얼굴: 성화와 패역 

우리는 고난을 받지 않습니까? 고난을 받는다고 해서 모두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을 받을 때 우리가 어떤 반응을 하느냐에 따라 한편으로는 아주 패역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아주 거룩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전도사로 목회자 생활을 하는데 교회에서 고난을 많이 받습니다. 박한 대우, 인격적인 학대, 교인들로부터 대접받지 못하는 무관심을 겪으니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참고 고난을 신앙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모든 고난을 이겨내는 가장 커다란 힘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과 마음을 쏟아 부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제 삶에도 고난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계속 찾아 온 적이 있습니다. 신학대학원 3학년에 재학중이던 시절이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던 할머님은 암으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팔 년 동안이나 사랑하며 섬기던 사역자는 떠났고, 이제 돌도 채 안 된 사랑하던 외아들은 연일 이어지는 시위로 최루탄을 마시고 급성 폐렴으로 위중하여 소아병원에 입원까지 하고, 학교 앞에 전세 들어 살던 저희는 집주인의 사기로 길거리로 내어 쫓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공부에 전념하였습니다. 방학 때였기에, 하루에 15시간 이상씩 공부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신관 5층 채플실에 올라가서 매일 오후 시간에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빌었습니다. 그 때는 하루에 짧으면 한 시간 반, 길면 세 시간 정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해도 무엇인가 희망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계단을 내려오면서 다시 주님을 부르며 마음에 결심했습니다. ‘주님이 나 같은 사람에게 목회의 길을 걸어가라고 하셨는데 주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도 지셨는데 나도 이 고난을 믿음으로 이기리라.’ 그리고 벌레만도 못한 이 인간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 고난 속에서도 나를 붙드시는 주님의 은총을 찬양하며 한편으로는 괴로움의 눈물을 또 한편으로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게 잔인한 여름을 보내고, 다시 그 채플실에서 형언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알던 신학이 하얗게 빛을 발하는 것 같은 그런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 그의 달콤함에 대한 초월적인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고난이 올 때마다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 한분께 마음을 쏟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 고난의 신학교에서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때 배운 눈물과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던 경험들은 이후에 목회를 하면서 나의 모든 기도생활에 척도가 되어서 어떤 경우에도 성령충만하다고 교만하지 않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저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조나단 에드워즈.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9)를 6권을 샀고 6번을 읽었습니다. 21살에 회심하고 24살에 선교사로 헌신하여 28살에 꽃다운 나이에 폐결핵 때문에 숨진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소수의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죽어 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생애를 조나단 에드워즈가 일기로 영국에서 출판했을 때 그 일기책은 헨리 마틴, 짐 엘리엇(Jim Elliot, 1927-1956) 같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고 ‘이 젊음을 그리스도를 위해’라는 고백 속에서 선교지를 향하여 순교의 길을 마다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는 폐결핵 4기의 몸을 이끌고 자주 기도의 동산에 올랐습니다. 

어느 생일날의 브레이너드의 일기입니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기도하기로 결심하였다. 기도하러 숲속에 들어가는 때에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었다. 어두운 숲속에서 나는 생각나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땀과 눈물을 쏟아 부으며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기도가 끝마쳤을 때 하늘의 달콤함이 내 마음에 밀려 들어왔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하늘에 별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눈 덮인 언덕에 엎드려 잃어버린 인디언의 영혼들을 위해 몸부림치며 기도했고 그가 기도하다 일어난 언덕에는 붉은 선혈이 하얀 눈 위에 가득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서 주를 위해 살고 또한 마치 주를 위해 죽기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자신의 젊음의 한 조각 한 조각을 불태우며 주님을 섬기는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젊음의 날들을 나태와 허비, 위선과 거짓, 태만과 가치 없는 일에 대한 몰두와 허탄한 일을 좇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며 우리의 인생을 마름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고난은 기도가 없으면 상처와 패역으로 남고 기도가 있으면 그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양약이 될 것입니다. 치열한 기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IV. 결론: 하나님을 추구하라 

인생은 속히 지나는 바람과 같습니다. 꼭 한 번 주님을 위하여 살 수 있는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쏟아 부어 기도하지 않고 열렬히 공부하지 않고 보내는 오늘 하루는 어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바로 내일입니다.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으며 기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누가 여러분의 이름 석 자를 부르든지 기도하는 모습을 제외하고는 여러분의 인격의 특징을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주님의 나라를 위해 보석처럼 소중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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