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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눅 10: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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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눅 10:30-37)
 
학교 폭력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입니다.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서 왕따 문제가 매우 심각합니다. 특히 중학교에서 왕따 현상이 자주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왕따로 인한 폭력사건과 자살사건이 자주 일어나면서 이것이 단순히 학교 문제가 아닌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다수의 학생들이 한 특정 학생을 대상으로 2주 이상 심리적, 언어적, 신체적 폭력을 행사하거나 금품을 갈취하는 것을 왕따, 집단 따돌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힘센 학생들이 약한 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상해를 가하는 일종의 병리적인 현상이기도 합니다. 왕따를 당하다가 자살한 어느 학생은 일기장에 자기의 모습을 이렇게 그려놓고 있습니다. 

“오늘도 학교를 가자마자 그들이 나를 괴롭혔다. 하는 짓들을 보면 아주 짐승이다. 내가 동네북이라도 된 것 같다. 학교 가는 게 너무 두렵고 떨린다. 광활한 정글에 나 혼자 둔 것 같다. 무섭다. 여자애들 보는 앞에서 개처럼 머리, 가슴, 배, 어깨, 엉덩이, 등을 아무런 반항도 못한 채 맞는 내가 참 부끄럽고 한심스럽다. 더군다나 나의 친구도 이를 보면서 말리지를 못한다. 그가 힘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하게 자살한 아들을 둔 부모의 이런 고백도 있습니다. 
“우리 애가 속이 깊다. 내가 걱정할까봐 아파도 말을 안했다. 새 학기가 돼서 용돈을 올려달라고 하고 가끔 신경질도 냈다. 이상해서 물어보니 ‘요즘 먹고 싶은 게 많아. 사춘기여서 그렇지 뭐’라고 말해서 별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장기간 집요하게 내 아이를 괴롭혔다니 끔찍하다. 이런 폭력은 처음 봤다. 정말 잔인하다. 가해자들이 우리 아이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두 번 죽였다. 우리 아이는 자살 전에 이미 죽은 상태였다.” 

이것이 과연 학교에서 일어나는 청소년들만의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학교에서의 청소년들의 문제는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전문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청소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왕따 현상은 어른 사회 내부의 문제가 그대로 비치는 내시경입니다. 사소한 폭행과 욕설쯤은 의례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드리는 폭력 무감각증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약자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 대한 공감 부족이 사회 곳곳에 잠재해 있기 때문에 학교생활에서도 그런 문제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청소년의 문제가 아니라 어른들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학교생활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가 그렇게 달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이런 아픔들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하고 있습니다. 더 살벌해지고, 더 정죄하고, 더 폭력적인 사회로 달려가는 이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우리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인간관계를 해야 하고, 이러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가?’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나갈 수밖에는 없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이웃은 누구입니까?”

본문 말씀에는 ‘왕따’ 당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본문의 앞 상황을 잠깐 설명하자면, 어떤 율법 전문가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합니다. ‘과연 저 사람이 지혜로운가? 저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사람인가?’하는 의심의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영생을 얻는 길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직접 대답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되물으십니다. 
“자네 생각에는 율법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 같은가?” 
그랬더니 이 사람이 의기양양하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칭찬하십니다.
“네 말이 맞다. 그것이 율법의 정신이다.” 

예수님의 칭찬을 받자 이 사람은 자기를 좀 더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질문을 합니다. 
“사랑해야 할 대상이 이웃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이웃이라고 말합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누가복음 10장 30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누가복음 10:30)

혹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이 어떤지 아십니까? 예루살렘은 해발 800m인 고지대이고, 여리고는 사해 근처에 있는 조그마한 도시로서 해저 200m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과 여리고의 고·저가 한 1000m정도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과 여리고의 거리는 약 30km 정도입니다. 즉 총 거리는 약 30km인데 두 지역의 높이는 1km정도 차이가 나니 꽤 경사가 진 길입니다. 또한 여리고로 가기 위해서는 ‘유대광야’라는 아주 황폐한 곳을 지나가야 합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바로 이 길,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어떤 한 사람, 아마도 유대인일 것입니다. 그가 이 길을 지나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이 사람을 두드려 팼습니다. 그리고 그가 갖고 있는 재물뿐만 아니라 유대인에게 생존권과도 같았던 겉옷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 겉옷은 밤이 되면 이불삼아 덮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매맞고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긴 그는 벌거벗긴 채로 길가에 버려졌습니다. 마치 왕따 당한 아이처럼 내버려졌습니다. 이대로라면 그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는 강도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성경에는 죽음에 직면한 이 사람을 둘러싼 세 종류의 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부족한 모습이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등장하는 사람은, 바로 남의 것을 빼앗은 강도들입니다. ‘들’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한 사람이 아닙니다. 떼를 지어서 다니는 ‘여럿’입니다. 때로는 협박으로, 때로는 폭행으로 내 것이 아닌 것들을 강탈하는 자들입니다. 

강도형의 인간상은, 모든 것은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이 존재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잘 되기 위해서라면 남을 해치는 것도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에게 피해를 입히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갖지 않습니다. 나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고, 나의 쾌락을 탐하는 인간형입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고방식이 이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는 생명을 우습게 여기고, 누군가가 죽어도 나 몰라라 하고 도망가는 존재들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이 강도짓을 해야 할 삶의 처지라고 항변했을지도 모릅니다. ‘나도 이렇게 강도짓을 당했다. 그래서 세상을 저주할 수밖에 없다. 나도 내 것을 빼앗겼다.’라고 사회적 불의와 구조를 한탄했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없어야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야 내가 풍요롭게 된다고 하는 생각으로 강도짓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복수의 칼날을 갈았습니다. 선한 목적이 사라졌고, 선한 수단이 상실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없는 자가 있는 자의 것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나쁜 것이 있습니다. 있는 자가 욕심을 갖고 없는 자의 것을 탐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사회는 이처럼 탐욕스러운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경제와 시장 경제주의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돈 있는 곳에 인간의 탐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것을 원하는 자들의 탐욕이 많은 사람들을 고통 받게 하고 있습니다. 

큰 나라, 더 강대한 나라가 될수록 너그러워야 됩니다. 대기업일수록 너그러워야 됩니다. 대기업은 현찰로 수익을 얻으면서, 중소기업에게는 몇 달씩 어음을 주고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대기업 정신은 잘못된 것입니다. 탐욕스러운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저는 소망교회 목사가 되면서 ‘대형교회가 어떻게 되어야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블랙홀처럼 수많은 다른 교회 교인들을 우리 교회로 불러 모으는 것은 교회의 참다운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와야 합니다. 한국교회와 이 땅에 고통 받는 사람들을 섬기는 교회가 될 때에, 대형교회의 역사가 바르게 세워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교회를 상대로 강도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였던 제사장과 레위인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는 ‘나 몰라라 형’입니다. 다시 말하면, ‘수수방관 형’입니다. 여기서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사회적, 종교적으로 존경받던 인물들이었습니다. 문벌도 좋았고, 교양도 높은 인물들이었습니다. 권위를 자랑하고, 세상을 이끌어가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생명의 자리가 끊어지는 고통을 받을 때, 그들은 외면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1~32절 말씀입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누가복음 10: 31~32)

여기 제사장과 레위인이 했던 행위가 똑같습니다. 그들의 행동을 나타내는 동사를 살펴보면, ‘보았다’, ‘피했다’, 그리고 ‘지나갔다’입니다. 그들은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을 안 보려고 했습니다. 보기가 싫었습니다. 그것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남이 상처받는 것을 심상히 여겼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이 사람들도 아마 마음이 아팠을 겁니다. 그러나 이내 내가 해결할 위치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만 잘 살면 그만인 것처럼 남의 어려움과 불행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습니다. 내가 받은 특권만을 누리고,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만을 즐기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게 주어진 의무와 책임은 중요하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보았으나 피했고 결국 지나간 것입니다. 

우리도 이들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돕겠다는 마음이 생겼을 때도 우리는 멈출 때가 있습니다. ‘나는 돈도 별로 없는데...’, ‘나는 도울 만한 재능도 은사도 없는데...’, ‘나는 매우 바쁜 사람인데...’, ‘내 일과 내 사업만 해도 시간이 부족한데...’, ‘남이 고통 받는 것에 참견하는 것이 싫은데...’ ‘귀찮아 죽겠는데...’ 우리가 이와 같이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의 손과 발에 흙이 묻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고통받는 자들을 돕기 위해서는 옷이 지저분해지고, 때로는 피가 내 옷과 몸에 묻는 것을 감수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핑계로 우리 주위의 연약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아픔을 외면하고 눈감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 인물은 다른 사람의 위기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인물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개와 돼지처럼 천대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앞서 지나갔던 제사장과 레위인이 상종도 하지 않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사장과 레위인이 아니라 바로 이 ‘사마리아인’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인물이라고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무엇이 달랐습니까? 그는 당시의 종교적, 사회적 차별성을 넘어섰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갖고 있는 불쌍함과 위기, 그리고 그 아픔에 동참하기를 원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종교는 수많은 교리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그 교리로 제약시키고 억압합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가짜 종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 수많은 교리와 규정들을 단순화 시키셨습니다. 어떻게 단순화 시키셨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예배드려라. 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이웃의 연약함을 가슴에 품고 함께 아파하라.” 이것이 바로 성경 전체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인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취했기에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누가복음 10장 33~34절의 말씀입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누가복음 10:33~34)

‘사마리아 사람’이 한 행동을 동사로 살펴보면, ‘보다, 피하다, 지나가다’라는 세 개의 동사로 기록된 제사장이나 레위인과는 달리 여러 동사가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무슨 동사가 나옵니까? 제사장이나 레위인에게도 나타났던 “보았다”라는 동사가 나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 후 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통 받는 자를 보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모든 행동은 동기로부터 시작됩니다. 즉, 마음이 먼저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핵심은 무엇일까요? 바로 ‘불쌍히 여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기에 이 땅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와 소외된 자, 그리고 죄 지은 자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생명의 사건이 나타났습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기에 우리가 지금 이만큼의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의 사건, 치유의 사건, 회복의 사건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이 사건에서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다음 행동이 일어났습니다. 이어지는 동사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가까이) 갔다’라는 동사가 나옵니다. 그리고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부었다’, ‘(상처를) 싸맸다’, ‘(자기 짐승에) 태웠다’로 이어집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모든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늘의 보좌까지 끌어올리십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네가 하나님의 딸이다. 네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유업으로 받을 자다.”라고 말입니다. 사마리아인의 모습이 이와 비슷합니다. 그는 자기가 타고 있던 나귀에서 내려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을 그 나귀에 태워 올렸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을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아마 사마리아인에게도 핑계가 될 만한 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거 괜히 도와주다가 강도떼들이 내게로 와서 이번에는 나를 때리고 물건들을 빼앗아 가면 어떻게 하지?’ 이런 두려움과 위기의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강도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두려움을 이기고 그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불쌍히 여기다’, 즉 긍휼이라는 의미로 영어에 ‘mercy’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compassion’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한 것 같습니다. com이라고 하는 것은 ‘with’, 즉 ‘함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passion’은 ‘열정’인데, 또 다른 뜻으로는 ‘고통, 고뇌, 아픔’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고통과 아픔에 함께하는 것이 바로 ‘compassion’, 즉 ‘긍휼이 여기는 것,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사마리아인의 모습이며, 바로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지병으로 죽음 앞에 서있는 사람의 글이 있습니다. 자기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이렇게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성공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쉽게 배반도 했습니다. 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불행했을 것입니다. 오직 나는 나만 알고 나 자신만을 알고 살았습니다. 남을 더 배려할 줄 알고, 친절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하지 못했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현대인들의 신음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아무도 내 옆에 없다고, 외롭고 슬프다고, 아프다고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왕따가 되었다고, 물질세계에서도 정신세계에도 영적인 세계에서도 외톨이라고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주변에는 우리가 도와야 할 이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탈북자들이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고통이 있습니다. 다문화 가정의 아픔이 있습니다. 병든 사람, 소외된 사람, 그리고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불안한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소망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까요? 예수님과 율법사의 마지막 대화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끝내신 예수님께서 다시 율법사에게 물으십니다. “강도 만난 자의 진정한 이웃이 누가 되겠느냐?” 율법사가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가라,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라면, 주님의 마음을 품는다면 “이와 같이” 행할 수 있습니다. 가장 작은 것부터 시작해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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