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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가 하신 축복 (민 2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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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하신 축복 (민 23:1-26)


제가 오래 전에 '월간 조선'에서 읽었던 기사였습니다.
우리나라 제5공화국 초기에 소위 '삼청교육대'라는 것이 생겼는데, 원래 목적이야 사회의 불량배들을 정화한다는 것이었지만 그 시행 과정에 있어서 무고한 사람들까지 적지 않게 희생당한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때 각 고등학교에도 자기 학교의 문제 학생들을 골라내어 삼청교육대로 보내라는 지시가 내려왔었는데,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마지못해 훈육선생 등을 동원하여 학생들 몇 명씩을 거의 강제적으로 보내었다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끝까지 그 지시를 거부한 학교가 바로 거창고등학교였습니다.
  
'만약 문제 학생이 있다면 학교 안에서 고쳐야지 우리 학교의 학생들을 어디 다른 곳으로 보낸다는 말이냐?'하고 학교 측에서 교육청을 상대로 완강하게 반발했던 것이었습니다.
군사독재의 권력이 서슬 시퍼런 칼날 같던 시기에 상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그런 용기와 결단력을 보여 준 거창고등학교 선생님들의 모습은 참으로 감동스러웠습니다.
바로 자기 학교의 선생님들을 통해 삼청교육대에 들어가게 되었던 많은 학생들이 배신감, 억울함, 분노 가운데 끔찍한 고생을 겪는 동안, 그 거창고등학교의 학생들은 자기들을 그처럼 철저하게 감싸 주시는 선생님� 덕분에 안전하게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처럼 당신의 선민(選民)을 끝까지 편들어 주시고 철저하게 보호해 주시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때는 모압 왕 발락이 지금 가나안 땅 바로 코앞에 자리 잡고 자기네들을 위협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망하게 하기 위하여 그야말로 발악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 크게 다행스러웠던 것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베풀어 주시는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그 모압 왕 발락의 악한 열심보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더 높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당신의 백성을 세상의 악한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열성이 얼마나 완강했던지 결국 이방 선지자 발람마저 완전히 손을 들어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발락과 발람을 상대로 당신의 선민 이스라엘을 감싸 주시고 옹호해 주셨던 하나님의 신의와 사랑을 통하여, 이 시대에도 성도와 교회를 위하여 변함없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당신만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선민을 그 누구도 저주하지 못하게 하시는 신실한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와 교회가 결코 망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성도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자 그들을 택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모압 왕 발락이었던 까닭에 그는 이스라엘을 어찌하든지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받게 하려고 온갖 힘을 다 썼던 것입니다.
  
본문 1절부터 6절까지에 기록하기를 "1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일곱 단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준비하소서 하매 2발락이 발람의 말대로 준비한 후에 발락과 발람이 매단에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를 드리니라 3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나는 저리로 갈지라 여호와께서 혹시 오셔서 나를 만나시리니 그가 내게 지시하시는 것은 다 당신에게 고하리이다 하고 사태난 산에 이른즉 4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시는지라 발람이 고하되 내가 일곱 단을 베풀고 매단에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를 드렸나이다 5여호와께서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어 가라사대 발락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지니라 6그가 발락에게로 돌아간즉 발락과 모압 모든 귀족이 번제물 곁에 함께 섰더라"고 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은 시종일관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과 흥정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기 나라에서 소위 가장 '신통한 선지자'라는 발람만 적당히 구슬리면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신이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까지 자기 뜻대로 조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앞의 22장 36절 이하에 나오듯이 발락은 일부러 멀리 "모압 변경의 끝"까지 나가서 발람을 몸소 영접하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일만 잘해 주면 두둑한 복채는 물론이요 "그대를 높여 존귀케" 해 주겠다는 등 온갖 사탕발림을 다 동원했습니다.
하지만 발람은 오던 길에 저 유명한 '당나귀 사건'을 통하여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단단히 혼쭐이 난 상태인지라 "내가 오기는 하였으나 무엇을 임의로 말 할 수 있으리이까 하나님이 내 입에 주시는 말씀 그것을 말할 뿐이니이다"라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던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그 다음날 발락 왕과 발람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진 끝까지 보이는" 높은 산에 위치한 "바알의 산당"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하여 준비했던 과정은 당시 우상 숭배자들의 관습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습니다.
"일곱 단"을 쌓는 것이나 발락 왕이 "번제물 곁"에 서는 것, 그리고 발람 선지자가 "사태난 산" 즉 '산꼭대기의 벗겨진 부분'에 선 것이나 "매단에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를 드렸나이다"라고 자기네가 많은 제물을 준비했다고 생색내는 것 등 이 모든 것들이 다 이방 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소원을 빌고자 할 때에 행하던 전형적인 절차와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일단 발람이 입을 열어 예언을 시작하게 되자 그처럼 발락과 발람이 자기네 딴에는 정성껏 준비했다는 제물뿐 아니라 세상의 그 무엇을 다 동원해도 하나님의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이 저주 받도록 � 수 없음이 명백해졌습니다.
  
바로 23장 7절부터 12절에 그 사실을 기록하기를 "7발람이 노래를 지어 가로되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편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 8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 9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그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10야곱의 티끌을 뉘 능히 계산하며 이스라엘 사분지 일을 뉘 능히 계수할꼬 나는 의인의 죽음 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 하매 11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그대가 어찌 내게 이같이 행하느냐 나의 원수를 저주하라고 그대를 데려왔거늘 그대가 온전히 축복하였도다 12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지금 여기서 이방 선지자 발람은 자기가 이전에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체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자기더러 누구를 저주해 달라고 부탁해 오면 그 사람이 주는 돈을 받고 그대로 저주해 주면 그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무리 그렇게 하고 싶어도 도저히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의 발람은 세상의 잡신이 아니라 참 신이시요 절대주권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상대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아무리 발락 왕이 큰 보수를 약속하면서 "야곱을 저주하라"고 요청해 와도 그는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자기 마음대로 저주할 수 없었습니다.
그 대신에 오직 여호와께서 자기 "입에 주신 말씀"만 그대로 발락 왕에게 전달해 주지 않을 수 없도록, 오히려 하나님의 권능에 완전히 붙잡혀 꼼짝 못하는 상태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방 선지자 발람을 그처럼 주권적으로 주장하시면서 이스라엘을 모압 왕 발락의 악한 계교로부터 막아 주신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9절에서 우리는 그 대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홀로 처하는" 백성이며 스스로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는"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섬기는 법은 이방인들이 우상을 섬기는 방법과 너무나도 다르고 유별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러 신을 번갈아 가며 편리한대로 모시던 우상 숭배자들과는 달리 이스라엘은 오직 여호와, '스스로 계신 자' 되신 하나님 한 분만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아주 독특한 백성이었습니다.
신의 존재 의의를 사람의 소원 성취 수단에서 찾는 우상 숭배자들과는 달리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의 존재 의의를 하나님을 섬기는 데서 찾는 지극히 특수한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민족이란 적어도 종교 생활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홀로 서기'를 하는 백성이었으며 '열방들과는 너무나도 별다른' 백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 어느 누구도 감히 저주할 수 없을 정도가 아니라 오로지 "능히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하며 남들이 부러워할 "의인의 종말"까지 누리는 축복의 가도를 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처럼 당신만을 유일한 참 신으로 믿고 섬기는 이스라엘을 결코 저버리실 수가 없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모압 왕 발락이 아무리 '굿판'을 벌이고 '제사'를 지내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해도 그 모든 것은 그야말로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어떤 백성들이 세상의 온갖 악한 것들로부터 하나님의 자상하신 보호를 받게 됩니까?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만을 유일하신 참 신으로 믿는 이 신앙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세상에서 '홀로 처할 줄' 아는 성도들입니다.
어떤 민족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완벽한 은혜의 품 안에 거할 수 있습니까?
적어도 하나님을 마음과 정성과 뜻과 힘을 다해 섬기고 따르는 자세에 있어서만큼은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 종교인들과 '완전 딴판의 모습'을 나타낼 줄 아는 교회인 것입니다.

사람이 '왕따'를 당하게 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입니다.
남들로부터 '독불장군'이란 소리 듣는 것은 누구에게나 다 기분 나쁜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걱정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다른 종교와 어찌하든지 비슷하게 맞추어 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승려들과 손을 잡고 사회에 이바지하는 좋은 일들을 함께 할 줄 알아야 도량 있는 기독교인처럼 보이고, 랍비들과도 강단을 나눌 줄 아는 정도가 되어야 좀 트인 목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늘 이 시대에 오히려 기독교의 주류처럼 되어 가는 형편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이 볼 때에는 소위 '마음이 열린' 종교인처럼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그렇게 보고 계시지 않으십니다.
그런 교인이나 교회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이미 '음녀 바벨론의 잔'을 마신 배교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사회나 종교계에서 외톨이가 되는 것이 두려워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앙을 포기하고 타협하면, 사람들은 그 곁으로 모여들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순간 즉시 떠나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정한 선민이라면 우상 종교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홀로 처하는' 것을 조금도 겁내지 말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적어도 '하나님 유일신앙'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이 세상에서 혼자만 남게 된다 하더라도 한 치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멋진 고집을 지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참 신으로 섬기는 진짜 기독교인이라면 자신을 '열방의 흔한 종교인들 중에 하나로 여기지 않는' 것이 결코 독선이 아니라 진실한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똑바로 믿고 섬기다가 이 인간사회에서 외톨이가 되면 그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의인'을 두둔해 주시며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교회가 바른 진리를 지키고 순교적인 신행일치의 생활을 사수하다가 다른 종교인들로부터 매도를 당하면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참된 이스라엘'을 오히려 '계수할 수 없을 정도'로 번성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본다 하더라도 오직 여호와 한 분만을 유일하신 참 신으로 믿고 고백함으로써 그처럼 당신만 섬기고 당신께만 영광을 돌리게 하고자 선택해 놓으신 당신의 백성을 그 어떤 원수도 감히 저주하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충만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민이 범죄할 때에도 이미 약속하신 축복을 거두지 않으시는 인자한 분이십니다.

당신의 백성을 저주하지 못하게 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그 약속하신 축복을 끝까지 내려 주고야 마시는 데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는 시종일관 요지부동이셨습니다.
일차 시도가 실패로 끝난 모압 왕 발락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13절부터 17절에 기록하기를 "13발락이 가로되 나와 함께 그들을 달리 볼 곳으로 가자 거기서는 그들을 다 보지 못하고 그 끝만 보리니 거기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라 하고 14소빔 들로 인도하여 비스가 꼭대기에 이르러 일곱 단을 쌓고 매단에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를 드리니 15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내가 저기서 여호와를 만날 동안에 여기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하니라 16여호와께서 발람에게 임하사 그 입에 말씀을 주어 가라사대 발락에게로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지니라 17발람이 와서 본즉 발락이 번제물 곁에 섰고 모압 귀족들이 함께 있더라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라고 했습니다.

발락 왕은 이제 장소를 한번 옮겨서 재시도를 했습니다.
즉 처음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진 끝까지"(22:41) 다 보이는 곳에서 발람 선지자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했다가, 이번에는 "그들을 다 보지 못하고 그 끝만" 보이는 장소로 바꾸어 보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발락은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한 이유가 이스라엘 진 전체를 다 보게 되는 바람에 그 위용에 눌려 겁이 나서 그랬다고 짐작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우상 숭배자들이 흔히 말하는 대로 '터가 나빠서 점이 신통치 않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 발락이 일단 하나님께서 한번 내리신 말씀이라 해도 장소만 조금 바꾸면 얼마든지 취소나 무효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사람을 상대로 자기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상대방을 달래어 보기도 하고 협상이나 흥정을 하기도 하듯이, 하나님도 똑같은 식으로 대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우상 숭배자들의 종교심이란 것은 사실상 이처럼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발락 왕에게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로 어떤 말씀을 내려 주셨습니까?
이어지는 18절 이하 26절에 "18발람이 노래를 지어 가로되 발락이여 일어나 들을지어다 십볼의 아들이여 나를 자세히 들으라 19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20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21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22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23야곱을 해할 사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이 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논할진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뇨 하리로다 24이 백성이 암사자 같이 일어나고 수사자 같이 일어나서 움킨 것을 먹으며 죽인 피를 마시기 전에는 눕지 아니하리로다 하매 25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그들을 저주하지도 말고 축복하지도 말라 26발람이 발락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은 내가 그대로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지 아니하더이까"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터만 바꾸면 점괘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식으로 나오는 발락을 향하여 당신께서는 말에 있어서 사람처럼 "식언"하거나 "후회"하는 존재가 절대로 아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미 내리신 "축복의 명" 역시 결코 취소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물론 이방 선지자 발람이 평소에 그가 자랑하던 그 어떤 "사술"이나 "복술" 즉 주문이나 마술을 쓴다 해도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처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이 결코 취소나 무효가 될 수 없음을 어쩔 수 없이 발락에게 예언해 주던 발람은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은 이방 선지자 발람이나 우상숭배자 발락으로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며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어떤 신이 사람에게 축복을 내려 주는 결과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 전에 사람 편에서 뭔가를 그 신에게 바치는 것이 당연한 전제였을 것입니다.
발락이 자기로서는 처음 만나게 되는 이스라엘의 신에게 특별한 청탁을 드리기 위해서 이것저것 많은 제물들을 준비하여 그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신의 비위를 맞추어 주고 생색을 내려 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발락 왕이 알던 우상신들과는 달리 그런 식으로 사람을 대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비록 "허물"이 있어도 그것을 "보지 아니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발락으로서는 정말 기절초풍하게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혹 "패역"한 모습까지 보일지라도 일단 당신의 선민에게 약속해 놓으신 축복은 끝까지 "돌이키지 아니하시는" 실로 신기한 하나님이셨던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그런 하나님을 그들 가운데 모시고 자기들의 "왕으로 부르는" 축복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고 광야 생활 중에서 "들소"와 같이 힘찬 행군을 하도록 지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암사자"와 "수사자" 같이 가나안 정복을 완수하기까지는 결코 "눕지 아니할" 미래의 축복까지 바로 눈앞에 두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발람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논할진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뇨"라고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백성의 허물과 패역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초지일관 철두철미하게 축복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발람은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라고 두 손 번쩍 들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실로 오늘날 역시 하나님의 선민 된 성도들은 그 얼마나 놀랍고도 신기한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까?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부를 수 있게 된 이것이야말로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그 왕을 모신 백성이 된 덕분에 원래 죽어 마땅� 죄 가운데 살고 있던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출애굽의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이 험한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통과하면서도 바로 그 주님께서 우리와 동행해 주심으로 인하여 시마다 때마다 '들소' 같은 새 힘을 얻어 행진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우리 역시 '사자'와 같이 천국을 '침노'하여 그 영원한 '가나안 복지'를 차지하게 될 최고의 소망까지 이미 확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쪽에서 어떤 선행이나 헌금을 통하여 공로를 쌓았기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까?
우리가 무슨 착한 마음씨를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어여삐 보시고 이런 축복을 내려 주셨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해 주셨기' 때문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쪽에서는 오로지 '허물'과 '패역'만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은 아예 '보지도' 않으시고 '기억조차' 하지 않으시면서 그저 약속하신 그대로 축복만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와 같이 무한한 인자하심 덕분에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일 무슨 '복채의 액수'나 '점괘를 보는 터'나 '젯밥의 양'에 따라서 그 뜻이 이리저리 바뀌시는 분이었다면 도대체 우리에게 그 어떤 소망이 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아니 우리 하나님이 만일 저와 여러분의 이 약한 본성과 악한 행실에 따라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신이셨다면 축복은 고사하고 이미 지옥의 밑바닥에 떨어져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 택하신 선민은 혹 그들이 실족할 때조차 오로지 당신의 변치 않으시는 인자하심만을 좇아 시종일관 축복해 주시는 이 고마우신 하나님께 그저 감지덕지 '우리의 참된 왕'이시라고 뜨거운 감사찬송을 올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여호와만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선민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보호로 인하여 절대로 망할 수가 없습니다.
일단 택하심을 입은 성도는 비록 부분적으로 범죄할지라도 그 하늘 아버지의 무한하신 인애와 자비로 인하여 결국은 축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무궁토록 변함없이 당신의 자녀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와 여러분은 세상으로부터 '왕따'가 되더라도 오직 이 하나님만을 참 신으로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온 세상이 나를 반대하더냐? 가서 나도 온 세상을 반대한다고 전해라."고 외쳤던 아타나시우스의 용기를 우리 역시 발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신앙고백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확증된 성도는 아무리 '발락'이 날뛰고 '발람'이 저주를 하려고 해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 37)는 사도 바울의 승리 체험만 따라올 뿐인 것입니다. 

실로 '그가 이스라엘에게 하신 축복'은 아무도 막을 자 없고 하나님 편에서도 절대로 변개치 아니하시는 축복입니다.
열방 중에 홀로 처하게 되더라도 오직 하나님만을 유일신으로 섬기며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주님만을 왕으로 모시며 따라감으로써, 모든 원수의 저주를 이기고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서 승리하는 이 시대의 선민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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