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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요 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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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요 8:1-11)


I. 용 서

예수님의 생애를 그린 프라미스(Promise)라는 뮤지컬이 있습니다. 그 중에 인상적인 한 배역이 나옵니다. 다른 출연진은 배역에 따라 나왔다 들어갔다 반복합니다. 그러나 유독 이 배역만큼은 시작부터 마칠때까지 무대 어딘가에 자리잡고 무대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와 그 제자들을 유혹하고 조롱하고 끊임없이 정죄합니다. 바로 사탄입니다. 사탄은 무대를 떠나지 않듯이 내 인생의 무대 위에서도 떠나지 않고 나를 유혹하고 정죄합니다. 내 인생 배역 어디에선가 나를 지켜보며 나를 비웃고 유혹하고 조롱하고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사탄은 정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합니다.
지옥은 정죄하는 곳이요 천국은 용서하는 곳입니다. 
기독교는 용서의 종교요 교회는 용서를 사고 파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인들은 용서받은 사람들이요 용서의 복음을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용서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정작 내가 상처를 입고 손해를 입었다고 느낄때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옛날 어느 제자가 스승께 물었습니다. 
“스승님! 어떻게 하면 우리가 용서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원수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스승이 큰 소리로 “용서” 그랬습니다. 
못 알아들은 제자는 다시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어떻게 용서하냐고 물었는데 용서라고 또 말씀하시면 잘 모르겠습니다.”
“야, 이놈아. 용을 쓰라니까. 용서.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어. 용을 써야 용서가 되지.” 

“용서가 만든 지우개”라는 글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욕심이 당신을 화나게 할 땐
너그러운 웃음으로 되갚아 주세요

상대방의 거친 말투가 당신을 화나게 할 땐
부드러운 말씨로 되갚아 주세요

상대방의 오만불손함이 당신을 화나게 할 땐
예의바른 공손함으로 되갚아 주세요

미움은 단지 순간의 실수일 뿐 
지니고 있어야 할 의미는 없습니다

용서함으로써 우리들은 성숙해져 갑니다
미움은 늘 어딘가에 서성이고 있습니다.

미움에 지배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용서가 만든 지우개가 필요합니다

릭 워렌 목사의 “나를 위한 용서”라는 글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을
당신의 마음에서 놓아주라.
그 상처를 더 이상 붙들지 말라.
상처를 준 사람을 어떻게 놓아줄 수 있는가?
용서하는 것,
그것만이 그들을 놓아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들이 용서를 구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왜냐하면 용서는 그들보다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용서할까 말까? 선택권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서할 마음이 있느냐? 용서할 감정이 있느냐? 
물으신 일이 없으십니다. “용서하라.” 명령할 뿐입니다. 
당신은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백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용서받았듯이 내 주변의 이웃들도 용서해야 합니다. 

새는 노래하기를 기뻐하듯이, 물고기는 헤엄치기를 기뻐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용서를 노래하기를 기뻐하고 은혜의 바다에서 용서를 헤엄치며 노니는 것입니다. 

탈무드에서 랍비 하나니와 예우다라는 사람의 대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몇 번까지 용서해 줄까?” 
“동일한 잘못을 지었을때 세 번까지는 용서하기로 하자. 
네 번째부터는 용서를 구해도 안되고 용서해서도 안된다고 말하자.”는 대목이 나옵니다. 

우리도 똑같은 죄를 짓는 사람을 보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저 인간은 용서할 가치 조차 없어.” 
그래서 우리가 버린 친구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버린 우리 목장 가족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버린 소중한 교우들, 동료들은 얼마나 됩니까?

베드로는 크게 마음을 넓혀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7번쯤 용서할까요?” 
예수님께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라.”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한계가 없다. 끝이 없다. 
그러므로 너희들도 용서에는 한계가 있을 수 없다. 그 얘기입니다. 

얼마전 손양원 목사님의 일대기를 그린 「오페라 손양원」이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되어졌습니다. 저희 교회에선 손양원 CD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아시스의 성자 프란시스를 뛰어넘는, 마더 테레사보다 위대한 세계적인 성자 가운데 성자! 인류 기독교가 낳은 가장 위대한 성인 중에 성인입니다. 

왜요? 그의 용서가 위대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용서가 작은 사람은 작은 인격, 작은 신앙의 소유자입니다. 
용서가 위대한 사람은 위대한 인격, 위대한 신앙의 소유자입니다. 

II. 본문 내용 요약

우리는 손양원 목사를 한국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자로 인정합니다. 왜요?  그의 용서가 위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용서가 작은 신앙인은 작은 신앙인입니다.  그러나 용서가 위대한 신앙인은 위대한 신앙인입니다.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주님 앞에서 해결해야될 문제가 있습니다. 용서하는 일입니다. 용서받는 일입니다.

간음현장에서 붙잡힌 여인 하나가 예수님 앞으로 개처럼 끌려왔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런 여인은 돌로 쳐야 하는데 선생은 뭐라 말씀하시겠습니까?” 율법이 그렇게 되어 있으면 치면 되지 왜 예수님께 끌고 와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요?
본문 6절은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얻기 위해서, 함정을 파기 위해서, 덫을 놓기 위해서, 예수님을 딜레마에 빠뜨리기 위해서 질문을 했다고 성경 기록자는 주석하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땅에 몸을 굽혀 글을 쓰셨습니다. 
두 번 반복해서 쓰셨습니다. 
첫 번째 글을 쓰시고 일어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을 돌로 치라”
나이드신 분부터 시작해서 젊은이까지 한 사람씩 꽁무니를 뺍니다. 

두 번째 글을 쓰시다가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그 여인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너를 정죄하던 자들이 어디 갔느냐” “주여 아무도 없나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III. 성경 형성사

요한복음 8장 본문. 
성경 형성과정에서 대단히 논쟁이 많았던 유명한 본문입니다. 
어떤 오래된 사본엔 이 사건이 빠져있습니다. 후대엔 다시 들어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본엔 초창기에는 들어있습니다. 또 1세기 2세기가 지나고 다음에는 빠져 나옵니다. 
또 다른 사본에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 다 끝난 다음에 요한21장 25절 이후 마지막에 추신처럼 들어가 있기도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내용을 성경에 넣으면 교회는 간음을 용인하는 집단이란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형성과정에서 지도자들이 기도하고 이것을 어떻게 할까? 
결론을 내립니다. 넣자. 왜요? 
성경은 우리가 이해되는 안되든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든 없든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의 폭이 이런 여인 하나를 용서할 수 없겠느냐?
십자가 보혈의 능력이 간음죄 하나를 용서함으로써 오염될 수 있겠느냐?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하필이면 왜 이런 여인까지 교회가 용서해야 되느냐고요.
가르쳐 드릴까요? 오래전에 이미 어떤 가수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나를 용서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 같은 것도 용서하신다. 너를 용서하신다.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명제 하나가 있습니다. 
모든 죄는 용서 받아야 한다. 
모든 죄는 용서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서로 용서하며 살아야 된다. 

골로새서 2장 13절은 “우리 주님은 모든 죄를 사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사소한 죄 몇 가지? NO. 모든 죄를.
우리의 큰 죄 몇 가지를? No. 우리의 모든 죄를.
우리가 지금까지 지었던 모든 죄? No. 우리가 지금 짓고 있는 죄. 
심지어 미래에 지을 모든 죄를 주님은 사하셨습니다. 
아니 우리가 짓지도 않은 미래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가 사해진 출발점은 십자가입니다. 
2000년전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점으로 보면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도,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여정도 미래에 속할 뿐입니다. 

IV. 땅에 쓰신 글씨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부를때 두 번 다 “선생이여”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교회 와서 선생 만나고 돌아가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여러분의 인생의 구세주.
여러분의 주인으로 만나셔야 합니다. 
병들어 고침받기 위해서 오셨습니까?
주님께서 여러분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고쳐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에 와서 의사 선생 만나고 가면 안됩니다. 

인생이 고달프고 힘들어서 오셨습니까?
주님께 무거운 짐 내려놓으면 해결해 주십니다. 
회복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와서 부자 선생 만나고 돌아가면 안됩니다. 
도덕 선생 만나고 돌아가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런 자는 돌로 치라 명하셨는데 선생은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함정이요 딜렘마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치라” 그러면 예수님의 사랑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사형 집행권이 없습니다. 로마법을 어기는 죄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치지 말라” 말씀하시면 공의와 정의가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유대법을 어기고 모세의 법을 어기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혀, 예수님께서 몸을 굽히셨다. 이것은 대단히 신학과 심리학이며 실제적인 행동이 있습니다. 
몸을 굽혀 땅에 앉으셨습니다. 기가막힌 지혜입니다. 
사람들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저마다 금방이라도 돌을 던질 것 같은 무거운 돌 한 개씩을 들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조용히 앉으셔서 땅에 글씨를 씁니다. 
그랬더니 무거운 팔이 슬그머니 내려옵니다. 
그리고 저마다 몸을 굽혀서 글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감정을 가라앉히는 것입니다. 
손가락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손가락이 어떤 손가락입니까? 천지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손가락입니다. 
흙을 빚어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던 손가락입니다. 
별을 만들고 우주를 만들던 손가락이었습니다. 
우주를 운행하는 손가락이었습니다. 
내가 어머니 모태에 있을 때에 사랑으로 나를 쓰다듬으시던 손가락입니다. 
그 손가락이 어떤 손가락입니까? 
천군천사 나팔 소리와 함께 이 땅에 임하셔서 양과 염소를 가르시고, 
천국과 지옥을 가르실 심판주의 손가락입니다. 
그 손가락으로 글을 쓰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책을 남기신 적이 없으십니다.
글을 쓰신 적이 없으십니다. 이 본문이 유일하게 글을 쓰신 사건입니다. 
엄청난 사건입니다. 

글을 쓰셨다. 어떤 글을 쓰셨을까요?
짓궂은 사람들은 “야, 이놈아. 여자 혼자 간음하는 것 봤냐?” 그럽니다. 
그러나 짓궂은 생각입니다. 

헬라어 원문을 살펴보면 “카타그라펜”이라는 퍽 재미있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카타”라는 말은 “against” 곧 “대항하여”라는 뜻이고 “그라펜”은 “글을 썼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항하여 글을 썼다. 
그들이 어쩌면 간밤에 지은 죄, 최근에 지은 죄목을 쓰고 거기에 대한 율법을 기록했다는 얘기입니다. 어쩌면 그들의 이름 하나 하나를 쓰시고 그들의 숨겨진 죄를 기록했다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글을 쓰신 사건이 출애굽기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 손가락으로 돌판에 율법 십계명을 기록해 주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너무나도 황홀해서 내려오는데 백성들은 모세가 없는 사이 금송아지 우상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돌판을 집어 던집니다. 돌판이 깨졌습니다. 의미가 있습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뜨렸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깨뜨렸다는 것입니다. 
우리 백성에게 맡겨주신 율법을 깨뜨렸다는 것입니다. 
계명을 깨뜨리는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두 번째 돌판에 계명을 기록합니다. 
이번에는 어린양의 보혈의 피를 발라 돌판을 덮어 시온소에 보관합니다. 
저주의 계명이 용서의 계명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율법이 생명의 복음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사랑의 복음으로 바뀌어지게 된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손가락이 나타나 글을 쓰는 사건이 있습니다. 
벨사살 왕이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전쟁에 출장하기 전에 군사들 사기를 진작 시키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금기명 성구에 술을 붓고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무서운 바람이 지나가고 저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 뭔가 글씨가 지나갑니다. 

박사와 술객들을 불러 무순 글인가 해석하라고 명령하는데 아무도 그 글을 읽고 해석할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지혜자 다니엘이 불려옵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권세를 주었고 왕의 위치를 주어서 하나님을 잘 섬기라 했더니 우상숭배하고 하나님을 만휼이 여겨, 당신의 무게를 달아보니 왕으로서 무게가 모자라 이제는 적군들이 쳐들어와 당신의 생명을 앗아가게 될 것이고 당신의 왕궁을 하나님이 친히 거두어 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밤에 적들이 쳐 들어와 벨사살 왕을 죽이고 왕국을 무너뜨리지요. 

하나님께서 만약 우리를 율법의 손가락으로 심판하신다면?
오늘 이 곳에서 예배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저울에 달아서 구원하신다면?
우리의 어떤 선행이, 어떤 공로가, 어떤 자격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의 보혈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정 안에서 율법의 손가락으로 살아갑니다. 
우리의 자식들을, 우리의 남편을, 우리의 아내를, 
저울에 달아서 항상 평가하려고 생각합니다. 
지옥이지요.

교회에서 율법의 손가락으로 비판하고 비난하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교회에서 저울에 달아서 사람들을 함부로 비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가정과 교회에서 우리의 손가락이 주의 보혈에 적셔지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입술이, 여러분의 혀가, 보혈에 적셔 지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손바닥이 주의 피에 적셔지기를 원합니다. 
축복의 손으로, 은혜의 손으로 바뀌어 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주님께 끌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서받을 수 있었고, 생명을 얻었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만약에 이 여인이 율법 앞으로 끌려갔다면, 
아니 친구들에게 끌려가도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아니 가족에게 끌려갔다 할지라도 버림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가운데 무거운 짐이 있고, 실패가 있고 고통이 있고 
육체의 상처와 몸의 상처, 마음의 상처가 있고, 크고 작은 죄가 여러분을 괴롭힐 때에,
온갖 사탄의 유혹이 여러분을 시달리게 할 때에 
세상으로 여러분이 달려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께 끌려오면 구원 받습니다. 
주님께 내려 놓으면 구원 받습니다. 

여러분 주변에 인생의 낙오자가 있습니까?
죄인들이 있습니까? 실패자들이 있습니까? 
주님께 끌고 오세요. 주님이 그들을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아니 성공자, 잘난 자가 있습니까? 
모두 주님께 나오게 하십시오. 
주님이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V.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본문에 퍽 재미있는 단어가 나옵니다. “죄 없는 자”라는 단어입니다. 
신구약 성경 가운데 꼭 한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짓는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근원적인 죄, 모든 죄의 뿌리가 되는 죄, 원죄 마저 없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오직 예수 한분 밖에 없지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돌을 들어 쳐야 한다면 내가 치는 것이다. 
그의 여인을 정죄하더라도 내가 할 것이고, 그의 여인을 살려도 내가 할 것이다. 
누가 감히 심판주가 되겠느냐. 죄 없는 자가 돌라 치라. 이런 뜻입니다. 
주님이 죄 없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여인아 너를 치려 하는 자들이 어디 갔느냐” “없나이다.”
주님 앞에 왔을 때, 모든 사람의 한결같은 고백입니다. 없나이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를 괴롭히던 그 죄가 어디갔느냐? 없나이다. 

사랑하는 딸아, 너를 서럽게 만들고 억울하게 만들었던 온갖 상처가 어디갔느냐? 
예수님께 나왔더니 없나이다. 
너희 가문에 대를 이어서 흘러왔던 저주들이 어디 갔느냐? 없나이다. 
주님 앞에 와서 “없나이다”를 고백하고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없나이다를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 예수 앞에 나오면 죄 사함 받으며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쉬리라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 얻으며 영생 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선악과를 따 먹으면 죽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간음현장에서 붙잡히면 돌에 맞아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돌이 어디에 갔을까요?
그 돌이 율법이고 법인데...

뭇 남성들이 던져서 여인의 머리를 깨뜨려야 되는데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머리가 깨져서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 맞아야 될 돌을 예수님께서 온 몸으로 막으시고 손과 발로 막으셔서 손과 발에 못이 박히셨습니다. 

이 여인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있을 때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내리친 돌에 그의 등이 찢겨지고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찢겨져야 하는데 
주님께서 채찍에 맞아 피가 흘렀습니다. 
주님께서 옆구리가 터져서 물과 피를 쏟으신 것입니다. 

이 여인을 용서하기 위해서, 이 여인이 맞아야 될 돌을 주님이 맞으신 것입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 주님께서 친히 채찍에 맞으시고 못에 박히시고 창에 찔리신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여러분이 정죄하는 그 사람, 여러분이 용서할 수 없는 그 사람,
그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채찍에 맞으신 것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오늘밤에는 이 남자 품에서 내일은 저 남자 품에서 평생 창녀로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 여인,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나도 창녀가 아니라 성녀로, 성자로 살아갈 수 있구나. 주님 앞에 새로운 존재로 바뀌어 지게 된 것입니다. 

“그가 찔림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느니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이 선언은 오늘 예배에 참석한, 십자가 밑에 나온, 
주님을 의지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백성들을 향하여 주시는 주님의 선언입니다. 

십자가를 의지하면, 보혈에 적셔지면, 보혈을 통하여 나아가면,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정죄는 끝이 났습니다. 정죄감에서 자유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은 또한 우리가 우리 이웃을 향해 외쳐야 할 말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 
내게 아픔과 상처를 준 우리의 이웃을 향하여 우리는 외쳐야 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를 용서했듯이 나도 당신을 용서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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