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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절망에서 기쁨으로 (시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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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시편 13편 1-6절                 
제목 / 절망에서 기쁨으로                       

여러분, 누군가를 기다려본 적이 있으시지요? 저는 어려서부터 기다리는 데 익숙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저희 가족은 영등포역에서 인천 방향으로 가는 길가 집에 살았습니다.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주도로였기 때문에 차량 통행도 많고, 사람도 많이 다녔습니다. 어머니는 교회 일 등으로 외출이 많으셨습니다. 어머니는 늘 <길거리는 너무 위험하다. 차도 위험하고, 요즘 아이들 유괴하는 나쁜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학교 갔다 와서 엄마가 없어도 절대로 집 밖에 나가지 말고 마루에서 놀아라. 엄마 곧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학교 갔다 와서 어머니가 안 계시면 마루에서 놀았습니다. 어둑어둑해져도 마루에서 놀았고, 마루에서 잠이 들기도 했습니다. 왜 방으로 들어가지 않았냐구요? 길가 집이라 도둑이 많다고 생각한 어머니께서 방문을 잠그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직 저는 어려서 열쇠를 간수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열쇠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차 길 쪽을 바라보면서 어머니를 기다렸습니다. 그 때부터 전 기다림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래 기다려도 어머니가 빨리 오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어머니께서 아주 깜깜해진 후에 오셨습니다. 사연인즉슨 쓰리꾼에게 지갑을 털려서 무일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먼 거리를 걸어오시느라고 늦으셨습니다. 어머니는 지갑을 잃어 속상하고, 저는 기다리느라 속이 상했습니다. 

본문 말씀에도 기다리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다윗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다윗이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습니다. 이 시는 매우 다급하고 안타까운 다윗의 비탄을 잘 보여줍니다. 시편에는 모두 서른여섯 편의 <비탄시>가 나옵니다. 본문은 그 중 하나입니다. 

이 시를 지을 때 다윗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나라를 건지는 큰 공으로 세우고 군대 장관이 되었고, 사울 왕의 사위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빠른 성공은 오히려 사울 왕으로 하여금 그를 경계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왕권의 위협으로 간주했고, 결국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수차에 걸쳐 시도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보호하심으로 무산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다윗은 몹시 고단하고 위험한 도망자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  기간이 거의 십여 년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는 여기서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라고 묻습니다. 여러분, <얼굴>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엄마를 애타게 찾는 아이는 먼데서 엄마의 얼굴만 보여도 울음이 터지면서 엄마에게로 달려갑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반가운 얼굴이 엄마의 얼굴입니다. 거기 수백 명, 수천 명이 있어도 금방 눈에 들어오는 얼굴이 엄마의 얼굴입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은 하나님의 얼굴을 사모하였습니다. 고통 받는 자신에게 어서 빨리 하나님께서 얼굴을 보여주시길 갈망했습니다.그러나 사방을 둘러봐도 하나님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 <번민>이란 단어는 개역성경에서는 <경영>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마치 사업을 하는 사람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그 위기의 원인에 대해,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 많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선택하셔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라고 하셨다. 내가 먼저 왕이 되겠다고 한 게 아니다. 난 베들레헴에서 조용히 살길 원했다. 나를 치열한 전쟁터로, 권력자들의 모임으로 끌어낸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왕으로 선택하셨음에도 왜 이토록 힘든 처지에 있는 나를 그냥 두시는 것일까? 이 상황에서 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일까? 과연 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어디로 피할까? 모압 땅인가? 블레셋인가?>, 아마 별별 생각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의 많은 생각과 계획도 그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고통만 가중되었습니다. 잠언 17장 22절에서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고 하신 그대로입니다. 그는 밤낮없이 괴로워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항의하듯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잊으신 것인가? 얼굴을 숨기고 나타나지 않으시기로 작정하셨는가? 날 버리시는 것인가?>, 다윗의 마음에 안타까움이 가득했습니다. 

왜 이렇게 안타까움이 컸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도움이 빨리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다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는 시간과 관련된 항의가 계속됩니다. <어느 때까지니이까,  아드 아나>란 항의가 무려 네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살다보면 정말 힘든 일과 고통스런 일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때론 그 일이 질병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지난 주간 울산의 어느 교회에 갔더니 젊은 여 집사님이 기도해 달라고 찾아왔습니다. 30대 초반의 집사님은 학교 양호선생님이고, 남편은 장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척추 신경 일부가 자리를 이탈했다고 하는데, 전 세계적으로도 십 여 케이스만 보고되어 있는 매우 희귀한 질환이라고 합니다. 그 분은 이미 다리 일부에 감각이 없어지고 있었고,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수술을 받기로 하고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울까요? 어떤 때는 고통이 경제적 어려움으로 다가옵니다. 회복이 안 됩니다. 오랜 세월 동안 뼈를 깎는 수고를 해도 일어설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식으로 인해 평생을 우는 부모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삶에서 당하는 어려운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저희 가정도 예외는 아닙니다. <어느 때까지이니까>란 부르짖음에 담긴 고통은 제 아버님에게서 늘 보고 있습니다. 아버님은 지금까지 북한에 두고 오신 칠 남매를 만나기 위한 삶을 살아오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수십 년의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아직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탈북했다가 붙들려 끌려들어가는 사람들 중에 혹시 제 조카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아버님의 기다림은 세월과 함께 묻히고 때로 정신도 혼미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여기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태도는 둘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포기하든가, 아니면 끝까지 붙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려도 소용없다고 하면서 포기하든가, 아니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더 간절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여기서 제 경험을 먼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제 삶의 연한이 교우님들보다 짧고, 인생의 아픔을 교우님들보다 더 깊이 경험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경험을 말씀드릴 수 없기에 저는 먼저 성경에 입각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성경에 입각해서 말한다면 <우리는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됩니다. 더 기다려야합니다. 더 매달려야 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이 지칠 정도로 너무 오래 침묵하시곤 했습니다. 요셉은 열일곱 살에 하나님으로부터 연거푸 꿈을 받았습니다. 두 번의 꿈의 공통점은 그가 존귀한 사람이 되어 다른 이들로부터 절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그를 높여주실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은 꿈과는 반대로 전개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높아지기는커녕 밑바닥까지 낮아져서 애굽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러고 설상가상으로 너무도 억울하게 강간미수범이란 치욕적인 죄목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기간이 무려 십삼 년이었습니다. 그 십삼 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단 한 번도 요셉에게 눈앞의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신 적이 없습니다. 물론 노예살이할 때, 감옥에 있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신임을 얻게 하셨지만, 단 한 번도 속 시원하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답답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 이야기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십삼 년 후 하나님께서는 그를 애굽의 총리로 세우셨습니다. 열일곱 살의 꿈이 성취되게 하셨습니다. 그를 붙잡고 묻는다면 뭐라고 말할까요? <땅끝교회 성도 여러분, 힘들더라도 끝까지 하나님을 놓으면 안 됩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십삼 년은 곧 지나갈 것입니다. 끝까지 싸우십시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한 것은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무려 사십 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침묵을 받아들여야 하는 고통에 던져졌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나섰다가 미디안으로 도피했습니다. 거기 장인의 집에서 머무는 사십 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침묵하셨습니다. 단 한 번도 <십 년만 있어라. 이십 년만 있어라>고 하시면서 <미디안 광야에 두신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세도 기다리는 데 성공했다고 말해 줍니다. 사십 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호렙산 떨기나무 가운데에 그를 찾아오셨고, 그의 삶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무엘이 와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이야기한 후, 어느 날 그는 아직 어린 소년티를 벗지 못한 상황에서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그는 하루아침에 영웅이 되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노래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머지않아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웬걸요? 그는 사울 왕의 사위까지 되는 데는 승승장구했지만, 그 후엔 죽음 같은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가 헤브론으로 가서 유다 지파의 왕이 된 것이 삼십 세였으니, 다윗도 요셉이 견딘 정도의 세월을 견디면서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힘들지만 참고 있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분들은 모두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일어나 말씀하시고 행동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경험했습니다. 교우님들도 그렇게 하시길 기원합니다. 

이제 저도 여기서 성경이 무엇이라고 하시는지 살펴보았으므로, 저의 작은 경험을 고백드릴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분들처럼 십 수 년, 혹은 수십 년은 아니지만, 저도 기다리다가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중학교 삼 학년 시절 4월 5일 식목일 다음 날부터 저는 얼굴과 상체가 뒤틀리고 마비되는 병을 앓았습니다. 서울의 유수의 병원에서 고개를 저었습니다. 원인도 찾지 못했습니다. 온갖 요법을 동원했으나 별 효험이 없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침묵이 저와 부모님을 짓누르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여러 달 계속되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11월 말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침묵하신 것은 아닙니다. 요셉과 다윗에게 십 수 년씩, 모세에게 무려 사십 년이나 침묵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저의 연약함을 아셨기에 몇 달 후 11월 말이 될 무렵 제게 다가오셨습니다. 주님의 손으로 직접 치유하셨습니다. 주사도, 투약도 없이 <깨끗이 나을 것>이라는 주님의 응답을 받은 그 다음 날부터 매일 조금씩 풀리기 시작해서 보름째 되던 날 완벽하게 치료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침묵을 참아내십시오.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부르짖고 싶을 때, <더 이상은 기다리지 않겠다>고 화를 내면서 뛰쳐나가고 싶을 때, 그 고비를 넘기시길 바랍니다. 기다리게 하시는 데는 다 뜻이 있는 줄 믿고 기다리시길 바랍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침묵을 잘 기다려 복을 받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사울 왕입니다. 다윗을 제거하려고 늘 자객과 군대를 보내던 사울 왕이 몰락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울이 몰락하게 된 첫 단초는 그가 기다리는 데 실패한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3장을 보면 사울 왕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때 사울의 마음이 몹시 급했습니다. 그는 사무엘 선지자가 오길 기다렸으나, 빨리 오지 않자, 사울 자신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는 제사장이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블레셋을 앞에 두고 불안하여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만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실망시킨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3장 8절 이하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성도 여러분, 기다리게 하시는 데는 뜻이 있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에게 고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축복입니다. 저는 봄부터 가을까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중에 목사가 될 것을 서원했고, 지금 이렇게 사역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저를 하루 이틀 사이에 금방 고치셨다면, 저는 목사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다리게 하실 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기도입니다. 다윗은 기다리는 동안, 마음이 답답한 그 와중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본문 3-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걱정이 많았습니다. 사망의 잠을 잘까 걱정되었고, 원수가 나를 이겼다고 통쾌해할까 걱정되었고, 대적들이 기뻐할까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걱정만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라고 불렀습니다.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동안 성도는 결코 쓰러지지 않습니다. 수많은 걱정도 기도 안에서 녹아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라고 부르는 한 우리는 아직 진 게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답답할 때 기도하십시오.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 더ㅗ 더 간절히 외치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4장 1절의 말씀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베드로전서 5장 7절 의 말씀입니다. 

기도하는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응답하셨습니다. 그를 사울 왕의 칼에서 건지셨습니다. 사울 왕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었고, 다윗은 칼을 쓰지 않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사울 왕을 죽인 블레셋을 정복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현실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전에 먼저 주시는 게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서 그를 구원하기 전에, 아직 그가 쫓기고 있을 때, 먼저 다윗에게 다가온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그것은 <확신과 기쁨>이었습니다. 아직 사울이 그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아직 왕이 된 게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그의 마음에 두려움과 근심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실 것을 믿는  확신과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할렐루야!  그는 주의 사랑, 주의 구원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어땠을까요? 앞에서 마루에서 엄마를 기다리던 이야기를 말씀드렸지요? 날이 어두워지면 옆 집 아주머니가 절 부르러 옵니다. <운성아, 혼자 있지 말고 우리 집에 가자. 영옥이가 기다린다. 가서 함께 밥 먹고 놀아. 그러면 엄마 오시겠지....> 그러나 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아니에요. 조금 있으면 엄마 꼭 오실 거예요....> 그 때 갔으면 지금 영옥이와 살고 있겠지요....조금 있으면 정말 어머니가 오십니다. 영옥이네 집도 좋지만, 엄마가 가져오는 기쁨에 비할 수 없습니다. 엄마가 대문을 열고 들어올 때, 그 때의 기쁨이 최고입니다. 어머니가 오시는 것만도 좋은데, 어머니는 빈손으로 오지 않고 제게 줄 맛있는 것까지 가져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상치 못한 선물까지 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하나님 안에서는 <설마가 사람 잡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고백합니다. 6절을 함께 읽읍시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아직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 것은 아니지만, 다윗은 이미 구원을 받은 것처럼, 이미 은덕을 입은 사람처럼 확신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하박국이 도달한 결론과 같은 것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하박국서 3장 17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다윗을 비록한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도착한 결론이 이르고, 하나님의 구원과 은총을 맛보게 되길 기원합니다. 끝까지 하나님만 바라보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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