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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3 22:27

우물가의 여인처럼 (요 4: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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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가의 여인처럼 (요 4:3-10)


어느 목사님이 아주 열정적으로 설교를 하는 중에 큰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니고데모는 신분이 세리였고 키가 매우 작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몹시 보고 싶어했지요∼"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있던 교인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교인들이 설교가 은혜가 있어서 그런 줄을 알고 더 큰소리로 힘있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니고데모가 사는 동네에 오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앞으로 나아갔지만 키가 작아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옆에 있는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설교가 이쯤 되자 성도들은 결국 "와"하고 웃어버렸습니다.  그때서야 목사님은 자신이 실수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황되고 얼굴도 화끈거렸습니다.  그렇지만 목사님은 순간 재치를 발휘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삭개오가 나타나 이렇게 외쳤습니다.
"야! 그 자리는 내 자리야!  빨리 내려와∼"

타인의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 자신의 실수를 실패로 받아들이려는 사람들, 이것이 오늘 우리의 시대가 경험하고 있는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들 주변에 보면 산산조각이 난 채 파편처럼 튀는 인생을 살아가는 수많은 이웃들이 있습니다.  산산조각이 난 인생은 오늘 포스트 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인생의 전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가리켜서 '포스트 모던'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포스트 모던'이라는 단어 속에는 '모든'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포스트 모던주의'가 '모든 주의'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포스트 모던 시대의 현상을 설명할 때, 그것은 지나간 모든 시대에 대한 반발, 혹은 모든 시대의 반성으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기 전 시대, 혹은 우리가 태어나서 살기 시작한 시대가 모던 시대였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우리는 포스트 모던 시대로 시대를 바꾸어 살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언제부터 포스트 모던 시대가 시작되었느냐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베트남의 월남 전쟁을 기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소위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포스트 모던 시대가 우리들에게 다가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나간 모든 시대의 특성을 설명할 때 그것은 합리적인 이성과 도덕적인 보편성의 틀을 가진 진보를 추구하던 그런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포스트 모던이라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와서 우리는 갑자기 그 동안 우리가 중시했던 이성과 도덕의 틀을 깨는 파괴와 해체를 실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포스트 모던 시대를 상징하는 두 개의 열쇠가 있다면 그것은 파괴와 해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내 자신의 자아가 파괴되고, 가정은 해체되고, 도덕적인 권위와 질서는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소위 포스트 모던 인생은 어떤 인생일까요?  어떤 문화 학자는 소위 포스트 모던 인생을 가르쳐 세 가지의 인상적인 단어를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고립되고, 둘째는 상처 나고, 셋째는 목마른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고립되고, 상처 난, 목마른 인간"

저는 이런 포스트 모던 시대의 인간을 상징하는 세 가지의 특성을 들으면서 성경 속에서 한 사람이 생각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요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우물가에 찾아왔던 어떤 여인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물가에 찾아왔던 이 여인의 모습을 통해서 소위 포스트 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포스트 모던 인생의 문제와 해답을 함께 알아보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포스트 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인생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이미 말씀을 드린 것처럼 그것은 고립된 인생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성경에 등장하는 이 여인은 제 6시에 우물가에 물을 길러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시간으로 6시는 우리 시간으로 환산하려면 6시를 더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시각으로 6시면 우리 시각으로는 낮 12시 정오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막 지대의 낮 12시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더운 12시인데, 사막 지대의 12시면 더위의 절정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도 우물가에 올 수가 없는 시간입니다.  오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오지 않는 그 시각을 선택해서 이 여인은 물을 긷기 위해서 이 우물가에 찾아왔습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부담스럽고, 사람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녀는 고립된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풍경이 아닌가요?  우리는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더 이상 이웃에 대해서 정겨운 관계를 갖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도 인사하지 않고 지나갑니다.  심지어 영원을 함께 누릴 천국의 가족이라는 우리들이 교회에 와서도 인사를 나누지 않습니다.  만나면 인사 좀 하십시다.

어떤 분들은 그럽니다.  "인사를 해도 인사를 받지 않습니다."  인사를 받지 않거든 화를 내지 말고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포스트 모던 인생이구나" 라고 생각하십시오.  옆에 있는 분들에게 이렇게 한 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포스트 모던 인생이십니까?"  전혀 반응을 하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전형적인 포스트 모던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웃들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내 스스로 문을 닫아걸고 이웃을 외면해 버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립되어 버렸고 우리의 뼈 속까지 스며드는 춥고 떨리는 외로움을 당연한 존재의 모습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관계가 단절된 시대, 관계가 파괴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피플스(Peoples)'라는 잡지에 미국의 어느 한 대학교 미식축구 팀 코치가 이런 에세이를 실었습니다.  자기가 코치하던 축구팀이 잘 나갈 때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친구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자기 팀의 성적이 계속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친구들이 하나 둘씩 그의 곁을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자기 주변에는 온통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만 많아져 갔습니다.

그는 마침내 위로 받지 못하는 홀로가 되었습니다.  유일하게 위로를 기대했던 아내에게서조차도 위로를 받지 못하고 외로움을 느끼던 어느 날 그는 애완용 개를 사다가 기르기로 작정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자기가 기르고 있는 개를 바라보며 한 숨을 지으면서 이렇게 독백처럼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 내 친구는 너 밖에 없어"
그런데 개가 꼬리를 흔듭니다.  약간의 위로를 받습니다.  마침 옆에 보니까 무신경하게 앉아 있는 아내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 아내의 옆모습을 훔쳐보면서 그는 다시 개를 향해 계속해서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너 같은 친구가 하나만 더 있으면 좋으련만."

그날 저녁에 무슨 일이 생겼을까요?  그날로 아내는 개 한 마리를 더 사다가 남편 곁에 갖다 놓았습니다.  곁에 있는 배우자조차 친구가 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풍자한 그런 이야기일 것입니다.

오죽하면 설교가 촬스 스윈돌의 글에 보면 미국 캔사스 신문에 어느 날 이런 광고 기사가 실려 있었다고 합니다.
"저에게 전화를 해 주셔서 30분을 이야기 해 주시면 제가 5불을 지불하겠습니다."

고립된 인생, 우리 시대의 아파트에서 고립되어 고독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는 이 시대 사람들의 풍경인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광고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희망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적어도 이 사람은 자신을 오픈하고 이웃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에 희망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 수 있는 의욕도, 용기도 상실한 채 스스로 관계를 차단해 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들 주변에는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이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이 바로 이런 고립된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포스트 모던 인생의 한 특성입니다.

포스트 모던 인생의 두 번째 특성은 상처 난 인생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어떤 사람도 상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문제의 인생이라는 것은 정도 이상의, 자기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를 끌어안고, 그러면서도 그 상처를 전혀 치유 받지 못한 채로 계속해서 상처를 끌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믿지를 못합니다.  아무도 믿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이웃 사람들의 어떤 말이나 태도를 다 부정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들은 이웃들에 대해서 공격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는 기준을 이웃들에게는 적용하면서 과도하게 이웃들을 비판합니다.  소위 과잉 정의감에 취해서 이웃들을 지나치게 비판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이들은 이런 과거의 상처를 끌어안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지나가는 이웃들이 평범하게 던진 한 마디의 말도 그것을 순수하게 받지를 못하고 거기에 의문부호를 붙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여인이 바로 그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을 만나서 물을 좀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면 드리겠다고 하든지, 아니면 지금은 드릴 수가 없다고 하든지 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반응을 보십시오.  본문 9절의 말씀을 함께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유대인인 당신이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이 여인의 말속에서 이 여인의 상처가 느껴지십니까?  어쩌면 이 여인은 자기가 사마리아 사람으로써 유대인에 대한 깊은 상처를 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 당시의 대부분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에 대한 깊은 역사적 상처를 안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고, 이 사람들은 유대 나라 북쪽에 살면서 이웃으로부터 들어오는 외국 사람들과 썩여서 약간의 혼혈이 되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피가 썩였다는 이유 하나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하고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심지어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해서 이런 말을 다반사로 했다고 합니다.
"사마리아 놈들의 빵을 먹는 자는 돼지의 살코기를 먹는 것과 같다."

어쩌면 여러분은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나 여러분은 돼지고기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생각을 해서 절대로 돼지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사마리아인들을 향한 이 이야기는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인간 취급도 하지 않고 불결한 짐승으로 취급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상종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사마리아 지역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지만 그쪽으로 가지도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상종하지 않는 땅입니다.

이러한 편견과 상처가 이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속에 존재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와 같은 반응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 이 여인의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냥, 말 걸지 말고 가세요.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두세요."

심리학자들은 소위 포스트 모던 시대에 현대인들이 가장 잘 사용하는 두 가지 단어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시대의 특성을 잘 그려내고 있다고 합니다.  그 하나는 ""I dont care.  나는 상관없어요.  나는 몰라요" 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Leave me alone.  나를 버려 두세요."  어쩌면 우리들 가운데는 지금도 이런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시시때때로 이렇게 말하고 싶은 지도 모릅니다.  "나는 상관없어요.  그러니 제발 나를 좀 내 버려 두세요."  혹여 이런 생각이 들고 있다면 별로 놀라실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지금 포스트 모던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 속에는 아직도 해소할 수 없었던 상처가 당신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상처받은 인생, 이것이 바로 포스트 모든 인생의 전형적인 특성입니다.

포스트 모든 인생의 세 번째 특성은 목마른 인생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물을 길러온 여인과의 대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대화가 갑자기 반전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처음에 이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 10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지금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사실은 내가 당신에게 물을 달라고 하였지만 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오히려 당신이 내게 물을 달라고 했을 것이고, 그러면 내가 너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주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 여인이 목마른 인생인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목마른 사람의 특성은 한 가지 일에 안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계속 무엇인가를 바꿉니다.  명품에 빠져서 끊임없이 명품을 찾아 바꾸는 사람은 목마른 사람의 대표적인 전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명품을 사는 사람들은 남들이 갖지 않는 물건을 내가 갖고 있다는 것에 대리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명품을 삽니다.  그런데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가 그 물건을 사면 그것을 버리고 또 다른 명품으로 바꿉니다.  바로 목마른 인생인 것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이 여인은 무엇을 바꾸었습니까?  남편을 바꾸었습니다.  그것도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었습니다.  이것이 목마른 인생의 모습입니다.  얼마나 목이 말랐으면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었을까요?

목마른 인생은 결코 한 자리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쉴새없이 바꿉니다.  마음에 진정한 안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인을 바꿉니다.  파트너를 바꿉니다.  직업을 바꿉니다.  직장을 바꿉니다.  종교를 바꿉니다.  심지어 교회도 바꾸어 봅니다.  그래도 만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은 방황입니다.  끝없는 목마름, 타는 목마름으로 허덕이는 인생입니다.

암울했던 군부 독재 시절에 시인 김지하가 남겼고 많은 젊은이들이 사랑했던 유명한 시 '타는 목마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 타는 목마름으로 /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만세"

세상이 참으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민주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대통령을 향해 "가카 빅엿"이라고 조롱을 해도 잡아가지 않습니다.  "가카 빅엿"이라는 말은 "각하, 큰 엿 먹어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더 이상 권위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바뀌고 변화된 세상을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은 더 이상 목마르지 않으신가요?  아니 이 땅의 사람들이 더 이상 목마르지 않고 만족하게 살고 있는가요?

민주화를 성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여전히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경제가 발전되고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인간의 목마름은 정치 환경만으로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경제 회복만으로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보다 뿌리 깊은 우리 인간 실존의 문제입니다.  우리 실존 자체가 경험하는 영혼의 목마름, 이것이 우리의 목마름의 실상인 것입니다.  지금 사마리아 여인은 이런 목마름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신데렐라라고 불렸던 비운의 여인 다이애나 비가 바로 이런 목마름의 질병을 앓았던 것입니다.  다이애나는 본래 영국의 스펜서 백작의 셋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다이애나의 생애를 연구했던 한 심리학자는 다이애나는 나이가 6살 때부터 심리적인 한 충격을 받았는데 그 때부터 평생 그 마음에 허기짐과 굶주림을 채울 수가 없었던 여인이었다고 했습니다.  다이애나가 6살 때 그녀의 어머니가 자녀들을 버리고 돈 많은 사업가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래서 엄마의 집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전전하면서 채울 수 없었던 사랑의 빈 공간을 끌어안고 젊은 인생을 보냈던 것입니다.

후에 그녀는 찰스 황태자와 결혼을 합니다.  그렇지만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남편인 찰스 황태자와 카밀라 파카볼스와의 염문 사건이 터지자 다이애나는 다시 자기의 위축된 공간 속으로 돌아옵니다.  그녀는 내면의 고독한 허기짐의 공간을 채우지 못하고 치열한 대리 만족에 매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머리 손질에만 연간 5천 4백달러를 썼고, 몸매 관리와 의상 구입에만 년간 87만 달러(한화 7억 5천만원)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도 채워지지 않는 그 마음의 허전한 공간을 달래지 못해서 무려 5번이나 자살기도를 했습니다.  거식증에 시달리고, 다이어트를 하고, 다시 먹고, 계속해서 애인을 바꾸어도 그 허기짐은 결코 채워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슬프고 쓸쓸한 종말을 맞이합니다.

다이애나, 그녀는 영락없는 우리 시대의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에 나타난 사마리아 여인과 다이애나와는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사마리아 여인은 비극이 아니라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이 이 두 여인의 차이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까?  성경에 나타난 우물가의 여인은 해답을 발견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물가의 여인이 발견했던 인생의 해답 속에서 우리는 포스트 모던 인생의 해답을 발견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 해답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 해답은 아주 단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 여인이 달라졌던 원인은 그녀가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의 마지막 인생이 충만한 빛으로 채워졌던 원인은 그녀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우물가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어떤 변화가 찾아왔는가를 주목해 보십시오.  우선 사람들을 피해 다녔던 이 여인이 동네에 들어가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더 이상 고립된 인생이 아니라 사람들과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입을 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자기의 상처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상처를 끌어안고 하루종일 고민하는 여인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를 뛰어넘어서 자기가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이웃들에게 입을 열기 시작하는 복음의 전도자로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목마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약속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셨던 것입니다.

우물가에서 예수 만난 이 여인의 변화는 한 동안 유행한 세속 유머 가운데 "어느 날 변한 여자"라는 유머가 있었는데 이 유머에 딱 들어맞는 변신이었습니다.  "어느 날 변한 여자"라는 유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단어의 변화이기 때문에 잘 들으셔야 합니다.
"여우같은 여자에서 여유 있는 여자로
화난 여자에서 환한 여자로
따지는 여자에서 따뜻한 여자로
착각하는 여자에서 자각하는 여자로
색기 있는 여자에서 색깔 있는 여자로
밝히는 여자에서 밝은 여자로
남들에게 애 먹이는 여자에서 남들 때문에 애 태우는 여자로
답답한 여자에서 답을 아는 여자로
빚이 많던 여자에서 빛을 발하는 여자로"

옆에 여자들이 앉아 계시면 "그렇게 되기를 축복합니다"라고 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이 변화는 여인들에게만 있어야 하는 변화는 아닙니다.  남성분들에게도 똑같이 필요한 변화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여인이 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에 보면 그 이유가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의 매우 중요한 질문이 남습니다.  도대체 예수는 누구이신가?  도대체 예수가 누구이기에 이 고립되고 상처 나고 목마른 인생이 이렇게 한 순간에 바꿀 수 있다는 말입니까?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에 대하여 오늘을 사는 평범한 이웃들이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예수님의 두 가지의 면모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이 여인의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아는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 대해 완벽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과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이런 주문을 하십니다.  "네 남편을 불러 오라."  그러니까 여인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을 충격 속에서 당황하게 만드는 예수님의 말씀이 18절에 나옵니다.  본문 1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처음 이 우물에서 만났지만 그러나 이 여인에 대해서 정확하게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가 존경할 만한 그런 도덕적인 스승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정확하게 아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를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는 메시아이십니다.  구세주이십니다.  메시아이시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여인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동일하게 그분은 오늘 저와 여러분을 찾아오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던 사건이라고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오신 이야기입니다.  이 여인의 모든 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미리 그 땅에 찾아오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과 이 여인의 만남은 우연한 만남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담겨 있는 필연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4절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당시 사마리아인들을 경멸했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땅을 피해 다녔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반드시 그 땅을 통과하시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사람 때문입니다.  이 여인을 만나시려고 말입니다.

이 여인의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이 이 여인을 만나서 그녀가 인생에서 정말로 필요로 했던 놀라운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 그는 이 땅을 일부러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먼저 우물가에 오셔서 기다리시다가 이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건네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과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 여인을 만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로 찾아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렇게도 나를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내 모든 것을 하시는 그분, 그리고 나를 그렇게도 만나고 싶어하시는 그분, 그분이 이 자리에 와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 앞에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한 번이라도 내 인생을 통해서 그 분 앞에 이런 솔직한 고백을 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주님, 저는 무척 외로웠습니다.  그 동안 인생의 상처로 많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저는 목말랐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렇게 고백을 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주님, 저에게는 주님이 정말 필요합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십니다.  이것은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한 번 만나보십시오.  지금 말입니다.  지금이 중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오늘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포스트 모던 인생으로 고독과 상처 난 가슴으로 목마르게 살아가는 당신의 인생은 성령의 역사로 놀랍게 변화될 것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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