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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업으시는 하나님 (사 46:3-4, 마 28: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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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업으시는 하나님 (사 46:3-4, 마 28:19-20)

지난 해 어느 항공사의 승무원이 즐거움을 주는 일을 했습니다. 인천공항에서 미국 LA로 가는 비행기에 어느 미국인 부부가 입양한 한국 아기를 데리고 탔습니다. 얼마쯤 가다가 아기가 요란하게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당황한 미국인 부부는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이 때 두 승무원 아가씨가 아기의 옷을 벗겨주고 번갈아 가며 아기를 안아주었습니다. 미국인 부부가 몇 시간 후 잠이 곤히 들었지만 승무원은 아기를 업고 있었습니다. 아기에게 자신의 등을 내어준다는 것은 쉽지 않았겠지만 선뜻 자신의 등을 내어준 것입니다. 승무원의 등에서 아기도 곤히 잠이 들었습니다. 한국인 승객들은 승무원들을 칭찬하며 격려하였는데 승무원은 아마 아기가 미국인 부부를 보고 낯가림 심해 울었던 것 같다고 하며 오히려 당연한 일을 하였다고 했답니다. 한국 아기를 입양한 미국인 부부도 우리 승무원들에게 감사를 표했다고 합니다. 
  
한국 아기는 업어야 잘 자나 봅니다. 업어준다는 것은 자신의 등을 아기에게 내어 준다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아기에게 내 등을 내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더구나 비행기 승무원들은 비행기가 비행하는 동안 쉬지도 못하고 승객들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데 아기까지 없고 일을 하는 것은 힘이 들었을 것입니다. 인터넷에는 승무원이 아기를 업고 있는 사진까지 올라와 있습니다. 들을 때 코끝이 찡한 미담입니다. 
  
‘모체접촉’과 ‘모유수유’는 한국의 장래이며 국민의 건강입니다. 여러 면에서 한국의 미래는 여성에게 달렸다는 증거가 뚜렷합니다. 초중고등학교에서 여교사의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것도 여성이 한국의 미래라는 증거입니다. 
  
모체접촉이 많은 아기가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머리가 좋아진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체접촉이 많으면 암 발생률이 낮아지고, 병의 치유률이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훨씬 높다고 합니다. 모유는 아기의 건강과 직결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원래 한국인은 모체접촉이 가장 많은 민족입니다. 아기를 업어서 키우고, 젖을 먹고 자라고, 어머니 등에 업혀서 잠이 들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모체접촉이 적어지고 어머니의 품에서 아기를 떼어놓고, 업어주지도 않고, 밖에 나갈 때는 바구니에 넣어 짐처럼 들고 다닙니다. 이런 아기들이 병에 노출되고 육체적으로 약해지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다고 합니다. 
  
아이를 업어주는 것이 건강한 것은 하나님의 정성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강하게 하고, 평안하게 하시기 위하여 업어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9:4에는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이 걸어간 것 같지만 알고 보니 하나님이 ‘어부바’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업어서 옮겨놓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60만 명을 다 업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허리가 부러졌겠습니다. 
  
모성애가 강한 동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료에 보니 답이 다 다릅니다. 포유류나 조류가 모성애가 강하다고 합니다. 난생류 보다 포유류가 일반적으로 모성애가 강하다고 합니다. 원숭이도 모성에가 굉장히 강합니다. 새끼를 업고 안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위험한 일을 만나면 원숭이는 새끼를 품에 안고 내놓지 않습니다. 
  
인터넷에는 고양이가 화재현장에서 새끼를 구하려고 불난 집에 들어가 세끼를 구해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털이 있는 짐승들은 본성적으로 불을 무서워하고 싫어하는데 새끼를 구하기 위해서 불도 두렵지 않는가 봅니다. 꼬마물떼새라는 조류는 새끼가 알에서 갓 태어났을 때 침입자가 오게 되면 어미가 죽은 척하고, 다리를 저는 척하여 침입자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여 새끼를 보호한다고 합니다.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보호본능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본능은 거기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낳으시고, 안으십니다. 탕자의 비유에는 그 아버지의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20에는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안아주시고 입을 맞춰주십니다. 그리고 지키십니다. 시편 17:8에는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업으십니다. 

첫째, 우리가 태어나면서 안겼고 업혔습니다. 

이사야 46:3에는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은 특별 보호를 받고 자랐습니다. 날 때부터 하나님은 업어 키우신 것입니다. 
  
안고 업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성애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십니까? 하나님은 어머니이십니까? 성경에는 하나님의 모성적 표현이 많습니다. 내가 너를 낳았다고 합니다. 너를 안아 주었다고 합니다. 먹여 주었다고 합니다. 업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모두가 하나님의 모성애를 표현하는 말들입니다. 
  
흔히 히브리적 사유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의 사유는 히브리사람들의 사고에 의해 기록되었으므로 히브리적 사유로 봐야 정확히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히브리적 사유에 익숙합니다. 성경은 동양적 사고와 동양적 풍습에서 기록되었습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고 기독교는 서양의 종교라고 하는데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시고 굳이 따지자면 기독교는 동양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 제일 이해가 빠릅니다. 하나님께서 안아주시고, 업어주신다는 말이 우리에게는 실감이 나고 현장감이 있지 않습니까? 서양 사람들은 업어준다는 말이 실감이 별로 안 날 것입니다. 
  
데일 브루너는 “세례와 성찬은 하나님의 포옹이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안아주시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포옹이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친밀감, 보호와 안전의 표시입니다. 안아주는 것은 가장 큰 사랑입니다. 가장 큰 안전입니다. 가장 큰 보호입니다. 
  
흔히 요즘에 과잉보호라는 말을 합니다. 자녀수가 적다보니 자연히 아들딸에 대한 보호가 지나치다는 말입니다. 과잉보호하면 자녀들을 망친다고 하지만 누구나 자녀에 대하여 과잉보호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이 과잉보호 아닙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은 우리에 대하여 과잉보호하고 계십니다. 사랑받을 자격 이상으로 사랑하고 계시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휴가철이 되어 레저용 4륜구동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는데 자동차 앞에는 자전거를 매달고, 뒤에는 보트를 끌고, 그 뒤에는 사륜오토바이를 얹어 끌고 갑니다. 지나가던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차를 보더니 “저 사람은 아예 걸을 생각도 없구먼”하고 중얼거리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아예 걷게 할 생각도 없으십니다. 안아주시고, 업어주시고, 독수리 날개로 비행기 태워주시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40년 동안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발이 부르트고, 피곤하고, 넘어지고, 지치고, 쓰러지는 것을 차마 못 보셔서 안고 업고 가시는 것이 더 편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보호구역이 참 많습니다. 어린이 보호구역, 상수원 보호구역, 철새 보호구역, 문화재 보호구역, 삼림 보호구역, 야생동물 보호구역, 해양 보호구역, 반딧불 보호구역, 군사시설 보호구역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곳도 완전한 보호구역은 없습니다. 항상 빈 곳이 있고, 더렵혀지기 마련입니다. 
  
미국에는 ‘인디언보호구역’ 있습니다. 말이 좋아 보호구역이지 인디언들을 집단수용하는 곳입니다. 인디언들의 종족 보존을 위하여 보호구역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인디언들은 백인들 틈에서 잘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디언 보호구역에 날짜를 맞추어 먹을 것을 가져다  주고, 용돈을 주고, 연어 떼가 올라올 때는 다른 사람들은 못 잡게 하지만 연어잡이의 특혜를 줍니다. 이 인디언보호구역은 절대 안전합니다. 그러나 그 보호구역에서 나오면 더 이상 보호받지 못하고, 보조비도 없습니다. 그 후로는 위험에 노출 되어 살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들은 깨어 있을 때보다 잘 때에 더 많이 자란다고 합니다. 갓 태어난 영아는 만져 주지 않으면 성장에 지장이 있습니다. 아기들을 잘 만져주지 않으면 때로는 죽기까지 합니다. 어떤 분이 교육 연구를 하였는데 생후 첫 18개월 동안 꾸준히 안아주지 않고, 반응해주지 않으면 평생 남을 신뢰하는데 애를 먹고 산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안아주시고, 업어주시고, 만져주시고, 손을 잡아주시고, 눈을 마주치시고, 동행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반응을 통하여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되고 하나님을 평생 신뢰하고 살아가게 하십니다. 
  
“친손자는 걸리고 외손자는 업고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데 그런 말이 있는 것이 좀 불편합니다. 친손자도 외손자도 다 있으면 섭섭할 것도 없는데 한 쪽만 있으면 좀 불편할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딸이 다 있어야 하나 봅니다. 제가 볼 때는 하나님은 외손자만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업어주신다는 데 외손자처럼 사랑하십니다. 
  
어느 책에 보니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의사 스마트박사가 사고로 눈꺼풀이 크게 찢어진 어린 딸을 아버지가 안고 황급히 응급실에 들어오는 일을 맞았습니다. 스마트박사는 “찢어진 곳을 당장 꿰매야 합니다. 그런데 따님을 마취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아버지에게 말하고 다시 소녀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바늘로 상처를 꿰맬 때 참고 뛰쳐나가지 않을 수 있겠니?” 그 때 아이는 “아빠가 내 손을 붙들어 주면 괜찮을거예요”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아빠가 잡아주는 손은 꼭 붙잡고 아픔을 참으며 몸부림치지 않고 수술을 잘 끝냈습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아플 때 하나님은 안아 주십니다. 손을 잡아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등에 안겼고, 품에 업혔습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의 완전한 보호 아래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둘째, 우리를 구하시려고 품고 업으셨습니다. 

이사야 46:4에는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품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업을 것이라고 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안아주시고, 업어주신 하나님은 노년이 되기까지, 백발이 될 때까지 품을 것이라고 합니다. 늙을 때까지 업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품에 품고 구하여 내십니다. 
  
이사야 43:6에는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류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억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포로 된 백성을 풀어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절대로 하나님의 품에서 내 놓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품에 품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여 내십니다. 하나님의 보호본능을 발동하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9장에는 두 천사가 소돔을 방문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소돔에 온 천사를 롯이 성문에서 맞습니다. 롯은 천사들에게 자기 집에 들어와 밤을 지나라고 하였지만 천사들은 “거리에서 밤 새우리라”고 합니다. 롯은 천사들을 억지로 자기 집에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롯의 집에 낫선 사람들이 온 것을 보고 소돔백성들은 노소를 막론하고 그 사람들을 이끌어내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소돔 사람들이 두 사람과 “상관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동성애자들이 그들과 관계를 갖겠다는 말입니다. 

롯은 두 천사를 내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롯에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두 처녀 딸이 있는데 그들을 내어줄테니 두 사람을 요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소돔 사람들은 롯의 집 문을 부수려할 때에 두 천사는 롯을 집안으로 들어오게 하였고, 소돔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문을 찾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롯은 하나님의 천사를 지키기 위하여 자기 딸의 생명과 같은 정조와 바꿉니다. 롯이 두 천사를 내어 놓지 않은 것은 품에 품고, 생명을 구하고, 절대 원수에게 백성의 목숨을 내 놓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민수기 11:12에는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나더러 양육하는 아비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급하였지만 계속 투정하고, 불평하고 모세를 속상하게 합니다. 이 때 모세는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모세는 낳지도 않은 백성들을 왜 품어야 하느냐고 불평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뜻은 ‘하나님도 너를 품듯 너도 백성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의 ‘양의 문’의 비유를 보세요. 요한복음 10:28에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합니다. 목자는 이리에게서 한 마리의 양도 끝까지 품에 안고 빼앗기지 않습니다. 절대로 이리에게 내 양을 내놓지 않습니다. 이것이 목자의 심정입니다. 
  
캥거루에게는 새끼 주머니 ‘파우치’가 있습니다. 아기 캥거루는 파우치에 들어가서 놀고, 젖을 먹고, 위험할 때는 그 속에 들어가 있으면 어미가 도망합니다. 캥거루에게 파우치는 안전을 넘어 생명입니다. 목자를 신뢰하고, 아버지를 신뢰하면 백발이 될 때까지 품고, 안아 주시며, 평안케 하십니다. 이 영원한 하나님의 샬롬이 을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1859년 줄타기를 하면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횡단한 찰스 브론딘(Charles Blondin)이란 곡예사가 있습니다. 이 곡예사는 한 사람을 등에 업고 건넜다고 합니다. 이런 실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찰스 브론딘의 이야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떤 곡예사가 계곡의 폭포 사이에 외줄을 묶고 건너는 시범을 보입니다. 너무 쉽게 왕복을 다녀온 곡예사가 묻습니다. “내가 외줄을 타고 건너갔다 온 것을 믿습니까?” 모두가 “예” 했습니다. 

곡예사가 다시 묻습니다. “내가 어떤 한 사람을 내 등에 업고 외줄을 타고 건너갔다 올 줄로 믿습니까?” 모두가 또 “예” 했습니다. 곡예사는 “그러면 누구든지 한 분만 내 등에 업혀 보십시오” 했더니 아무도 업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내가 업히겠습니다”. 알고 보니 곡예사의 딸이었습니다. 

그 위험한 곳에서 곡예사의 등에 업힐 수 있는 열쇠는 바로 신뢰입니다. 두 사람이 안전하게 건널 수 있었던 열쇠는 바로 신뢰입니다. 두 사람의 신뢰가 아니면 곡예사도 등에 업힌 사람도 절대 안전하지 못합니다. 그분의 등이 안전하고 평안하다는 신뢰감이 업히고, 업고 건너게 됩니다. 신뢰감이 없으면 업는 사람이나 업히는 사람이 다 위험하고, 사고를 당하고, 심지어는 죽게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신뢰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업어주는 것뿐만 아니라 구하여 내리라고 하십니다. 
  
그리스의 동화에 ‘오페이로’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페이로는 헬라말로 ‘업다’, ‘지다’(to bear, to bring)라는 뜻입니다. 오페이로라는 아주 힘이 센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람의 부하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아주 힘이 센 장수의 부하가 되었습님다. 그런데 하루는 장수가 마귀를 보고는 놀랍니다. 오페이로는 마귀가 더 힘이 세다고 생각하여 마귀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힘이 세지만 한 번은 십자가를 보고는 놀랍니다. 그래서 다시 십자가의 주인의 부하가 되기로 작정하고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주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찾기에 지친 오페이로는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강을 건너는 사람을 업어 강 건너편에 옮겨주는 일을 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다음 하루는 한 소년이 강을 건너겠다고 하여 등에 업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별로 무겁지 않던 아이가 갈수록 납덩이처럼 무거워졌습니다. 강 중간에서 도저히 무거워 발을 땔 수 없어 물어보았습니다. “누군데 이렇게 무거워요?” 그 때 그 아이는 “나는 예수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무거워요?” “나는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다 지고 가기 때문에 무거운 겁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오페이로는 다른 사람을 업어주고 섬기다 가장 힘센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업어주면 생명을 만납니다. 예수님이 업어주시면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품에 안기면 구하여 내십니다. 예수님께 업히면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구하시려고 우리를 품고 계십니다. 우리를 절대 원수에게 내어주지 않습니다. 내가 위험에 처하여 급하면 나를 업고 뛰십니다. 

  
결론 

동물 중에 가장 어버이답게 새끼를 키우는 것이 새들이랍니다. 새 가운데서도 박새가 가장 열심히 새끼를 키우는 모범적 새로 알려져 있습니다. 새끼가 부화하게 되면 약탈자로부터 새끼를 보호하기 위하여 분주합니다. 새끼를 청결하게 하기 위하여 둥지를 청소합니다. 부지런히 먹이를 물어와 새끼의 왕성한 식욕을 채워주는 일을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새끼가 비명을 지르게 되면 적에게 둥지의 위치가 노출 되기 때문에 박새 부부는 하루 6백회 이상 벌레를 잡아야 합니다. 두 마리가 600회라면 한 마리 당 300회 이상 벌레를 잡아 와야 합니다. 한 마리가 시간당 30회 이상 벌레를 물어 와야 새끼들의 식욕을 채울 수 있습니다. 2분에 한 번꼴로 먹이를 물어 와야 하니 엄청난 중노동을 하는 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보호하시고, 옮기시고, 생명을 주시어 구원하시기 위하여 잠시도 쉬지 않으십니다.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십니다. 눈도 깜빡거리지 않고 뚫어지게 쳐다보십니다. 품고, 안고, 업고 다니십니다. 
  
‘두 발자국’이란 시를 아시지요? 예수님과 내가 함께 길을 갑니다. 내가 신음하고 고통 당할 때 한 사람의 발자국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 주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건 네 발자국이 아니라 내 발자국이야. 네가 너무 힘들어해서 내가 너를 업고 갔지”. 

최근에 새로운 버전이 나왔습니다. 다시 주님과 함께 길을 갑니다. 가다보니 두 사람의 발자국이 완전히 지그재그로 흐트러져 있습니다. “주님, 우리가 왜 이렇게 헤맸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둘이 함께 가다 너무 좋아서 둘이서 춤을 췄지”.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주님이 늘 함께 가십니다. 내가 힘들 때 업어주십니다. 안아 주십니다. 내가 가려고 애쓰지 말고 주님께 업혀 버리세요. 주님의 품에 안겨 버리세요. 우리 주님과 함께 춤추며 즐겁게 인생길을 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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