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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바라보자 (히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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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바라보자 (히 12:1-3)

캐나다는 자연 환경이 아주 좋은 천혜의 나라입니다. 깨끗하고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자연을 잘 보존하고 있습니다. 아침 뉴스는 그 날의 일기와 함께 가시거리(visibility)를 알려주는데 가시거리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거리를 말합니다. 벤쿠버 지역의 가시거리는 예외 없이 48km라고 하니 120리까지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시가 깨끗하지 않으면 그렇게 멀리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공기가 맑아 가시거리가 멀다해도 시력이 없다면 볼 수 없습니다. 
  
세계 인종 가운데 가장 멀리 볼 수 있는 시력을 가진 인종은 아메리칸 인디언입니다. 이들의 가시거리는 50km라고 합니다.  
  
강영우박사는 그의 육필 자서전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에서 “나에게 장애는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었다, 나는 단순히 장애를 극복한 것이 아니라 장애를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맹인의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는데 우리 눈에는 무엇이 보입니까? 사물만 보이는게 아닙니다? 시력은 사물을 보게 할 뿐입니다. 마음의 눈이 있어야 희망이 보입니다. 영의 눈, 영적 세계를 보고 믿음의 눈이 있어야 예수님이 보입니다. 
  
“예수를 바라보자!”

  
󰊱 지나가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성경에는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예수를 바라보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여리고 성에 사는 삭개오라는 사람이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갑니다. 거기 앉아서 지나가시는 예수는 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오사 쳐다보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셨습니다.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즐겁게 영접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1-9) 
  
기회는 지나갑니다. 나타나면 곧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리고를 지나가셨습니다. 삭개오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 기회를 붙잡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기회란 유일한 순간을 말합니다. 고사리도 꺾을 때 꺾어야 합니다. 때가 지나면 질겨서 먹지 못합니다. 쇠뿔도 단김에 뽑아야 합니다. 미적거리다간 놓치고 후회합니다.
  
한 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와 절하며 말하기를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그를 따라 가고 있었습니다.
  
12년간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지나가시는 예수의 뒤로 와서 겉옷을 만졌습니다. 겉옷만 만져도 자기 병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여인을 돌이켜 보시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즉시 구원을 받았습니다(마9:18-23).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은 스스로 아시고 돌이켜 보시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물으셨습니다.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모든 사실을 여쭈니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막5:34)
  
예수님은 지금 죽은 자에게 손을 얹기 위해 바쁜 걸음으로 죽은 소녀의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손을 대는 순간 12년 동안 고통 받던 고질병을 고쳤습니다. 기회는 이때다 하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순간 예수님의 능력이 발전을 일으켰습니다. 여인의 혈루가 멈춘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맹인입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사람들은 시끄럽다 꾸짖었으나 그는 더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던 길을 멈추시고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랐습니다(막10:46-52).
  
기회를 포착한 것입니다. 기회란 일을 하는데 가장 알맞고 효과적인 고비를 말하고 포착이란 꼭 붙잡는 것입니다. 

  
󰊲 고민하며 기도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마26:38)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민은 낙담이 조금 섞여 있고 혐오스러운 반감과 슬픔에 사로잡힌 심정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세 가지 고민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물질에 대한 고민이고, 둘째는 사람에 대한 고민이고, 셋째는 자신에 대한 고민입니다. 사람이 고민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입니다. 
  
위대한 고민이 사람을 위대하게 만듭니다. 위대한 고민만큼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고민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민으로 죽을 지경에 이르러 하신 기도로 인류구원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시기를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나의 원을 이룰 것인가? 하나님의 원하심을 이룰 것인가? 고민과 기도를 거쳐서 나온 결정이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였습니다.
  
고민하는 인간을 호모 페이션스(Homo Patience)라고 합니다. 사람은 고민이 있어야 합니다. 고민이 없으면 사람이 안 됩니다. 잠자는 돼지는 고민이 없습니다. 고민하는 소크라테스가 되어야 합니다. 고민이 사람을 키워줍니다. 고민이 위대한 스승입니다. 사람은 고민하며 내쉬는 숨소리로 성장합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청춘은 즐거워! 거기에 머물면 안됩니다. 아프니까 청춘입니다. 잠 못 이루고 고민하는 것이 청춘입니다. 어떤 것을 포기하기 위해 고민합니다.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해 고민합니다.
  
당신은 진지합니까? 진지함이 문제 해결의 열쇠입니다. 어중간한 심각함, 어중간한 낙관론은 안됩니다. 진지함이란 어중간함과 반대되는 말입니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면 반드시 돌파구가 열립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를 질 것인가를 고민하셨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 몸으로 보여 줘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해방자가 되기 위한 고민이었습니다. 
  
모세의 민족에 대한 고민이 출애굽을 낳았습니다. 고민하고 고통하며 잉태된 것이 민족해방입니다. 여러분의 고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고민하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 십자가를 참으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믿음의 주를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절정은 “예수를 바라보자”는 이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밤 사경에 바다 위로 걸어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예수께서 바다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며 소리를 지릅니다. 예수께서 즉시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님이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여기까지가 믿음의 주를 바라보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가 예수를 믿음의 주로 바라볼 때 물위로 걸어간 것입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 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쳤습니다(마14:25-32).
  
베드로가 물위로 걸을 때는 예수님을 믿음의 주로 바라본 때입니다. 물에 빠진 때는 그의 시선이 바람을 향할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하고 책망하셨습니다.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히11:6).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뿐만 아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17:19)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의 믿음이 온전해졌을 때 물위를 걷는 기적을 보여준 것입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무거운 것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믿음의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분을 바라볼 때 역경은 하찮게 보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불안과 두려움을 치료하는 처방입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지신 것을 보았습니다. 믿음이 올라가면 세상의 문제는 작게 보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두명이 믿음의 눈으로 보면 밥이요 불신의 눈으로 보면 거인이었습니다.   
  
“...그는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십자가의 죽음은 수치의 극치입니다. 가롯유다의 배신은 배반자의 극치입니다. 가롯유다가 예수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왔습니다. 예수께서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나를 파느냐? 이렇게 말하는 예수님의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그래도 예수님은 참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모든 사람이 다 주를 버릴 찌라도 나는 끝까지 따르겠다고 충성을 맹세했던 베드로마저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도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 자리는 하나님이 앉혀 주셔야 앉을 수 있습니다. 높이는 일도 낮추는 일도 그의 손에 있습니다. 그 자리에 앉기까지는 인내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해야 합니다. 삭개오처럼 예수를 바라보기 위해 달려가고 나무에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사람의 눈이 닫는 곳에 발도 도착합니다. 
  
고민하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강제수용소를 체험한 빅터 플랭클은 고민하는 인간의 가치는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보다 높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고민을 기도로 해결하기 바랍니다. 
  
북극 탐험에 참가할 사람을 모집하는데, 맨발로 얼음덩이 위에서 얼마나 버티는지를 테스트했습니다. 견디면 합격, 못 견디면 불합격입니다. 참는 것이 복입니다.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는다고 했습니다(잠12:16). 배신도 참고, 환난도 참고. 십자가의 수치까지 참으신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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