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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소경입니까? (눅 18: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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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소경입니까? (눅 18:35-43)

이제희 교우의 간증을 잘 들으셨습니까? 얼굴은 알지만 저분과 삶을 나누며 교제를 나눈 분들은 아마 많지 않을 겁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외로운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이미 아셨고 역경을 통하여 찾아오셨고 위로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주님께만 소망을 두고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있어 두 아들들도 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많은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예수님 때나 지금이나 택하신 자들을 통하여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입니까? 이것이 누가복음 18장 전체의 주제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진 가치관이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신 가치관을 따라 살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백성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를 과시하는 바리새인보다 죄인임을 고백하며 애통해하는 세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아이들은 그저 어른들의 부속물이나 성기신 존재 정도로 생각하던 당시 사람들의 편견을 깨뜨리시며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이라 하셨습니다. 선한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전통적인 구원관에 도전하시며 하나님을 절대 의존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율법의 계명은 어려서부터 잘 지켰다고 자부한 부자 청년은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의 말씀은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재물과 가족을 버리고 주를 따른 자들은 훗날의 영광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이미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된다고 약속하십니다.

본문을 보니 예수님을 거지에다 소경이라 하여 무시를 당하던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며 예수님께 나아갔다가 눈을 뜨게 되고 예수님으로부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칭찬까지 듣게 됩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과 더불어 삼년을 같이 지내온 사람들이지만 믿음을 인한 칭찬을 아직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소경입니까? 제자들입니까 바디매오입니까? 누가 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입니까? 제자들입니까 바디매오입니까? 말세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제자로 살면서 주님의 쓰임을 받으려면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할까요?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바디매오가 보여준 믿음을 본받으며 주님의 은혜를 충만히 체험하며 주님을 섬기는 이 시대의 바디매오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당하셔야할 수난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을 당하실지 다른 복음서보다 자세하게 말해줍니다. 그는 이방인에게 넘겨질 것이요, 체포되어 모욕적이고 치욕적인 대접을 받게 될 것이고, 결국 죽일 것이나 삼일 만에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받을 고난을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위한 고난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지만 제자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합니다. 아직도 세상의 가치관으로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던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의 길을 앞서 가십니다. 예수님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의 본을 보이십니다.      

유월절이 가까워오자 많은 사람들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더불어 무리 속에 섞여 여리고를 지나가십니다. 여리고는 어떤 곳입니까?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믿음으로 성을 돌았을 때 무너뜨렸던 성읍입니다. 

히브리말로 ‘여호수아’가 헬라말로는 ‘예수’입니다.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의미로 예수님은 구원자가 되십니다. 여호수아가 활약하던 때로부터 1400년 후에 또 다른 여호수아인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여리고에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려면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던 때나 예수님 때나 여전히 믿음이 필요한데 제자들은 아직도 믿음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한 소경 거지가 등장하여 믿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제자가 되려면 어떻게 믿어야 합니까? 

1)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알고 믿어야 합니다.

여리고의 길가에 거지 하나가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6절에 보니 그를“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로 소개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의 차이는 ‘바’라는 단어입니다. “바”의 뜻은 아들입니다. 즉 바디매오는 ‘디매오의 아들’이란 뜻을 가집니다. 바디매오가 언제 어떻게 소경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디매오’란 이름의 뜻은 명예, 영예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는 ‘명예로운 아들’이란 이름에 걸맞지 못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니까 구걸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날도 바디매오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하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왜 그런가 물었더니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귀가 번쩍 뜨입니다. 가슴이 뛰기 시작합니다. 바디매오는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기적적인 능력을 직접 보지 못하였고 종교지도자들처럼 율법지식이 해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들을 때마다 그의 마음이 열려져서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사 35:5)라는 이사야의 예언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관해 소문만 듣고서도 그분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이심을 알아보는 영적인 안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메시아 시대에 약속된 기적을 베풀어 달라고 구합니다. 물론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어떤 메시아인지 그분이 인류의 구원을 어떻게 이룰지 온전히 깨달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실 분인 것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2) 예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앞을 지나간다는 것이 바디매오의 일생에 다시 올 수 없는 기회입니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아마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어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에게는 별 볼일 없이 보이는 바디매오의 외침이 그저 시끄러운 소리로만 들릴 뿐입니다. 그래서 바디매오를 꾸짖습니다. 야, 조용히 해. 입 닥쳐. 사람들은 바디매오를 거지 이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가 소경된 것을 불쌍히 여기고 마음 아파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전혀 상관없는 존재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사람들의 반응에 개의치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통하여 눈을 떠야한다는 생각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큰 소리로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칩니다. 

바디매오의 간절한 외침을 들은 예수님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당장 그를 부르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부르시면 응답은 이미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부름 받은 바디매오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오늘날까지 그는 기뻐하려야 기뻐할 것이 없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에 주님께서 등장하시니 완전히 달라집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바디매오는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났다고 합니다. 팔레스타인의 사막 기후에 밤에는 겉옷이 없으면 추워서 견디기 힘듭니다. 더구나 그에게 겉옷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전 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보겠다는 열망이 있었기에 주님께서 그에게 오라고 하셨을 때 그 소중한 겉옷까지 팽개치며 주님께로 달려갔습니다. 그것이 앞에 나오는 부자 청년과 다른 점입니다. 

주님께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있습니까? 아직도 집착하는 옛 사람의 것이 있습니까? 보다 귀한 것을 얻기 위하여 덜 중요한 것은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침내 예수님 앞에 섰을 때 그가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기회는 언제나 오는 것은 아닙니다.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과의 차이는 주어진 기회를 얼마나 잘 활용하는 가에 달려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이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글쎄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는 해야겠는데 어떻게 해야 할 지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는 않았다고 하였더라면 그것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기회가 왔을 때 평소에 생각해오던 바를 왕 앞에서 하나하나 조리 있게 제시하였습니다. 페르샤 사람들의 관습, 예루살렘 주변 정세, 자재 보급 경로, 공사 기간 등 관련된 성벽의 재건에 관한 청사진을 제시하자 왕은 그가 요구한 모든 것을 허락하였기에 순조롭게 무너진 성벽을 재건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께로 나올 때 우리의 진짜 필요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나오기 원하십니다. 

물론 우리가 가진 소원이 단지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려고 할 때 응답이 오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소원에 응답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한 수난을 거듭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화합치 못하는 제자들을 인하여 답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디매오에게 믿음이 있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쁨과 설렘으로 그 앞에 나아온 그 소경에게 마음의 소원을 물으십니다.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는 그의 소원을 모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디매오의 직접적인 고백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위치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다시 한 번 강화시켜주고 더 나아가서 사람들 앞에 그분의 권능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바디매오는 그 마음의 간절한 소원을 진지하게 그러나 조금의 주저함이나 망설임도 없이 아룁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 앞에 서 계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눈을 열어주실 수 있으며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실 분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답변에서 확인됩니다. 

바디매오는 주저하지 않고 꿈에도 그리던 소원 한 가지를 말합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보기를 요청하였는데 바디매오는 원하던 것보다 더 큰 것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응답은 항상 풍성합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이제부터 볼지어다’라고 하시지 않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십니다. 다시 보게 된 것은 그의 ‘믿음’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가 시력뿐 아니라 ‘구원’을 얻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바디매오는 앞을 보게 됩니다. 보게 되었을 뿐 아니라 구원까지 받았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이 말씀을 누가 듣고 있습니까? 제자들을 포함한 무리들. 소경이 주님의 칭찬을 받을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뜻밖입니다. 제자들도 그들의 믿음을 인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칭찬을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칭찬하신 이유는 제자나 무리들도 바디매오처럼 믿음이 있으면 주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3)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믿어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눈뜬 제자들이나 무리가 보지 못한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문제의 해결자라는 확신과 예수님을 통하여 자기의 문제를 해결 받겠다는 열망과 예수님께 자신의 문제를 분명히 말함으로 주님의 치유의 능력을 경험하였습니다. 바디매오는 눈을 뜨자마다 감격에 겨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뿐 아니라 바디매오는 남들이 갖지 못한 기쁨을 가지고 구원 받은 자가 되어 주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바디매오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 무리들이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한 사람이 제대로 믿음의 모습을 보이면 그 열매가 풍성하고 그 열매를 인하여 주변 사람들이 기뻐하며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길가로 밀려났던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치유를 경험하고 길 한 가운데서 기뻐 뛰며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마지막으로 가시는 길에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러 가시는 길이었으나 바디매오를 인하여 구원의 큰 기쁨이 넘치는 행렬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믿는 자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계속해서 따르는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제자도의 삶을 실천하였습니다. 인생역전을 이루었습니다.  

바디매오의 모습 속에서 구원 얻는 믿음의 특징이 나타나 있습니다. 구원/치유/회복을 얻는 믿음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1)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인식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바디매오의 호소에서 우리는 그의 자기 인식이 어떠한 것이며,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실로 자신의 소망 없는 상태,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자기의 부족함과 한계를 인정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일하기 시작합니다. 

2) 주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사랑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부르짖음에 대하여 꾸짖으며 막으려 했을 때 기가 죽기는커녕,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모든 성도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구원 얻는 믿음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은 어떠한 외적인 장애에도 굴하지 않으며 그것을 이기고 그리스도께로 담대하게 달려 나가게 합니다. 그 이유는 죄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3) 말씀의 경청

바디매오는 나사렛 예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생겼을까요? 그는 소경이었기에 비록 예수님이 행하시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그분이 자신을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는 듣고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오직 그 믿음이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눈을 열어주셨을 뿐 아니라, 오늘 영적으로 소경되고 눈먼 우리의 눈도 밝혀주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면서 우리에게 믿음이 일어나고 믿음으로 기도할 때 우리의 삶 속에 불가능한 일들이 가능해집니다. 주님의 구원의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4) 끈질긴 기도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는 체면을 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도 체면을 차리는 사람처럼 멍청한 사람은 없습니다.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열려져 있습니다. 부모에게 매달리는 어린 아이의 심정으로 주님께 매어달려야 합니다. 바디매오에게는 분명한 소원이 있었고 소원을 이루기 위해 간절히 예수님을 찾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변의 핍박과 조롱에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더 큰 소리로 자신을 긍휼히 여겨달라고 외쳤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간절히 고침받기를 원하였는지 예수님이 그를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을 그가 확신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간절히 찾고 구하는 자에게 은혜와 응답을 주시는 분입니다. 믿음은 기도로 표현됩니다. 끈질긴 기도에 응답이 있습니다. 간절한 기도는 예수님의 발걸음마저 멈추게 합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다가도 분주하다고 기도하는 것을 서둘러 마칠 때가 많습니다. 약간의 방해거리만 있어도 기도를 쉽게 포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장 기도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기도하지 않고 걱정만 하고 있는 경우를 가끔 보게 됩니다. 

우리는 바디매오처럼 기도를 방해하는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부르짖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몇 번이나 외쳤을까요? 예수님이 들으시고 발걸음을 멈추실 때까지 외치고 외쳤을 것입니다. 잠언 8:17“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했다. 예수님은 간절히 찾는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형식적이고 습관적으로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간절하고 끈질기게 기도하는 자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 바디매오와 같이 절박한 심정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원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바디매오가 어떻게 했습니까? ‘주여 주여’ 조용히 말했습니까? ‘다윗의 자손 예수여’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할 때 작은 소리로 기도한다고 주님이 듣지 못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만큼 간절하게 우리의 마음을 표현해야 합니다. 강청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나는 주님의 도움이 없으면 안 됩니다, 나는 지금 주님의 응답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는 자세로 응답이 임할 때까지 매달려야 합니다. 그럴 때 바디매오를 위하여 걸음을 멈추신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걸음을 멈추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제2, 제3의 바디매오를 찾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디매오와 같이 지금 자기의 부족함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까?
바디매오처럼 주님께서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어려움을 해결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바디매오와 같이 구체적으로 구할 바를 자신 있게 그러나 주님의 뜻에 합하게 구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성도들의 부르짖는 간구를 들으시고 가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우리 각자를 위하여 특별히 시간을 내시고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의 소원을 들으십니다. 믿음으로 나와 주님의 마음에 합한 간구를 하는 바디매오들에게 응답을 주기 원하십니다. 그러려면 자신이 주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죄인임을 고백하고, 주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고 우리 각자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곧 우리의 소원이 되도록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럴 때 문제가 해결될 뿐더러 영혼의 구원까지 체험합니다. 또한 주님의 능력을 경험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근본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주님을 그들에게 소개해 주어야 합니다. 안심하고 일어나라 주님이 부르신다는 사랑의 메시지를 담대하게 전해야 합니다.  

믿음의 끈을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합니다. 상황과 환경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열정을 좌절시킬 수 없습니다. 자기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주님을 붙들 때 자신을 살릴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살리고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전파하는 복의 통로가 됩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둘러싼 문제들이 해결될 뿐 아니라 닫혔던 영안이 열려 주님의 역사를 보고 막혔던 영의 귀가 열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마음이 열려져 주님과 교통하며 감격 속에 주님을 따르는 이 시대의 바디매오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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