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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께서 자신을 주신 목적 (딛 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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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자신을 주신 목적 (딛 2:11-14)
 
 
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5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릭 워렌 목사는 그가 쓴 ‘목적이 이끄는 삶’의 첫 페이지에서 “삶의 목적이란 개인의 성취감, 마음의 평안과 행복감 이상의 것이다. 가족과 직업 그리고 우리의 가장 큰 꿈과 야망보다도 훨씬 더 큰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삶의 목적을 알고 사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같은 책에 또한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일리노이 대학의 철학 교수인 휴 무어헤드 박사는 세계의 저명한 철학자, 작가, 학자 250명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삶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는 그 응답들을 모아서 책으로 출판했다. 몇몇 사람들은 가장 좋은 답을 제시했다고 자신했고, 또 몇몇은 삶의 목적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솔직하게 시인했다. 그 학자들 가운데 몇 명은 무어헤드 교수에게 그가 답을 발견하거든 자신들에게 알려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는 철학자, 작가, 학자들도 사실은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런가하면 이현주 목사는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라는 그의 수필집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나의 형은 머리도 좋고 항상 공부도 잘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였고, 따라서 아버지는 중요한 심부름을 언제나 형에게 시키시는 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아버지가 나를 부르시더니, “현주야, 너 오늘 학교 가기 전에 군청엘 좀 다녀오너라.”고 했다. 처음에는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좀처럼 없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망설일 것인가? 군청까지 2킬로 남짓한 거리를 뛰다시피 단숨에 달려갔다. 그런데 마당에 들어서서 한동안 가쁜 숨을 고르고 나서야, 자기가 무슨 일로 군청까지 달려왔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그날 아침 군청 서기였던 아버지는 ‘결근계’를 써서 그것을 둘째 아들에게 전달하라는 심부름을 시킨 것인데 “너 오늘 군청엘 다녀오너라.” 했을 때 ‘예’ 하고 대답한 녀석이, 서랍에서 결근계를 꺼내 들고 보니 금방 온데간데없더라는 것이다. 

하릴없이 4백년 묵었다는 느티나무만 서너 바퀴 똥마려운 개처럼 빙빙 돌다가, 맥 빠진 걸음으로 터덜터덜 돌아오니, 아침 밥상에 앉아 있던 식구들이 나를 보고서 “넌 아버지 심부름은 안하고 어딜 갔다 오는 거냐?”면서 나무랐다. 이렇게 해서 모처럼 얻은 심부름 기회는 어이없는 낭패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 다음에 굉장히 중요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사건이 한바탕 웃어 버릴 수 있는 철부지 시절의 실수담으로 끝나고, 시방 내 현실에서 그대로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참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내가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또한 모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한평생 군청 마당의 느티나무나 돌다가, 자기가 왜 세상에 태어났는지, 태어나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끝내 그것을 모르고 부질없이 생을 마감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감사하다는 것이다.>

다음 주일은 ‘행복 나눔 잔치 주일’이고, 그 다음 주일은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고난 주일’이 다가오는데, 오늘은 주님께서 죽으신 목적이 과연 무엇이고,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본문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11절을 보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나타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가리켜 만민구원설의 근거로 삼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모든 사람’이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역사 속의 모든 인류를 가리킵니까? 아닙니다. 

칼빈은 여기 ‘모든 사람’을 교회에 소속된 각 계층에 있는 모든 사람으로 설명을 합니다. 유대인의 사고 속에는 여자나 어린아이나 종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있어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차별 없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차별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같은 죄인들이 구원의 은총을 받게 된 것입니다. 

흔히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은혜라든지 거저 주신 다든지 하면서 싸구려인양 치부하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받는 나는 은혜였고, 거저 받은 선물이었습니다만, 그 은혜와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며 죽게 하시고, 그 공로로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결코 값싼 은혜도 아니고 싸구려 상품이 아닌 것입니다.

고층 빌딩마다 엘리베이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돈을 내고 엘리베이터를 타본 일이 없습니다. 미국의 경우 무역센터 빌딩이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은 관광객들에게서 돈을 받습니다만, 그러나 대부분의 빌딩은 공짜로 엘리베이터를 탑니다. 그렇다고 해서 엘리베이터 자체가 공짜인 것은 아닙니다.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당 5천만 원, 1억 혹은 2억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 엘리베이터를 공짜로 탄다고 해서 엘리베이터가 공짜인 것은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죄 사함 받고 구원받기까지에는, 예수님의 희생과 십자가에서의 피 흘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외아들을 보내셨고, 죽게 하신 슬픔을 겪으셨습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주십니다. 단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2. 구원받은 성도는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15절에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살고”라고 하였습니다. 출생한 아이에게는 어머니의 지극정성을 다한 양육이 따르듯이, 하나님은 은혜로 구원하신 성도들을 온갖 사랑으로 양육을 하십니다. 구원은 영적으로 출생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태어난 생명은 양육과 보호가 필요합니다. 미숙아로 태어난 생명은 인큐베이터 안에서 보호받으며 자라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정기간 동안으로 끝나야 합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갓 태어난 새 생명은 엄마의 품속에서 고동소리를 들으며, 사랑받고 보호받고 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이 자라고 신앙이 자라는 것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받으며 양육되는 것이 제일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하나님이 우리를 양육하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내가 누구의 보호를 받고 양육 받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대통령은 경호원들의 철통같은 경호를 받습니다. 그러나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는 간수의 경호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지키는 사람은 마귀의 소유인 것입니다. 미국의 시인이었던 롱팰러는 보통 종이 위에 그의 시를 써내려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훗날 그의 시는 6천 달러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10불미만의 종이 위에 그렸던 모나리자나 만종은, 지금 수십만 달러의 명화가 되었습니다. 누구의 것이 되느냐, 누구의 보호를 받느냐, 누가 나를 키워주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키워주시고 양육해주시는 복된 인생들임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양육한다’라는 말은 본래 ‘어린이와 함께 있다’라는 뜻이나, 그 의미가 확대되어 ‘어린이를 가르치다’ 인격을 도야시키기 위해 ‘징계하다’ ‘훈계하다’리는 의미도 지니게 되었습니다. 어린이의 양육에는 단지 젖을 주고 밥을 먹여서 기르는 것만이 아니라, 징계도 따르는 법입니다. 캐넌 해이 에잇킨은 그의 저서 ‘은혜의 학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은혜는 단지 구원하는 일뿐 아니라, 연단하고 훈련하는 일도 한다.” 그렇습니다. 구원과 연단, 훈련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은혜의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과거에 한 번 구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 이후에도 양육으로 계속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양육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인에게 두 가지로 작용하여 성장케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는 죄악을 버리게 합니다. 즉, ‘경건치 않는 것’인 부도덕과, 우상숭배와, 탐욕, 분쟁, 사기, 망령되고 헛된 말들을 버리게 합니다. 또한 ‘세상 정욕’인 쾌락과 권력욕 명예욕 무절제한 소유욕 등을 버리게 합니다. 이렇게 양육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죄악 된 모습과, 죄 짓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게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때로 징계와 채찍을 들어 사용하기도 하십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해서, 우리의 탐심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서, 때로는 질병으로 징계하기도 하시고, 사업 실패의 채찍을 사용하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징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식과 같이 대우하신다는 증표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그렇습니다. 아들을 징계하지 않는 아비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아들답게 양육하시기 위해서 징계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양육하실 때에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아니라, 때로는 징계와 채찍을 통해서 우리를 훈계하시고 양육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소극적 측면에서는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버리게 하고, 적극적인 측면에서는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양육을 하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호화여객선 아틀랜틱호가 핼리팍스 해안에서 조난당해 수백 명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다행히 살아남은 생존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우체국을 찾아가 가족들에게 전보를 보냈습니다. 전보내용은 간단했습니다. 그것은 ‘구원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훗날 그는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길이 간직하기 위해, 전보용지를 액자에 넣어 사무실 벽에 걸어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날마다 ‘구원 받았다’는 전보내용을 읽으면서 신앙생활의 채찍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3. 성도가 복스러운 소망을 갖고 살도록 양육하십니다.

13절에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복스러운 소망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은 같은 뜻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양육하시는 은혜는 또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복스러운 소망을 갖게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 복스러운 소망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합니다. 

11절의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라는 말씀이 그리스도의 초림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이란 말씀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캐넌 해이 에잇킨은 그의 저서 ‘은혜의 학교’에서 두 번에 걸친 그리스도의 강림을 두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학교에는 서쪽 창문을 통해서는 갈보리 산으로부터 장엄한 광선이 흘러나오고, 동쪽창문을 통해서는 더 밝은 소망의 광선이 빛난다. 이처럼 은혜의 학교는 훌륭한 조명을 갖추고 있는데, 우리는 이 두 빛 가운데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없으면 살 수 없다.”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는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신 초림과는 달리, 천군 천사를 대동하고 신적 위엄을 지닌 채 장엄하게 오실 것을 나타내기 위해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구원의 완성으로서, 사탄이 결박되고 그리스도께서 심판장이 되셔서 온 세상을 공의와 평화로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기쁨과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는 미국 남부 전쟁을 배경으로 하여 마가렛 미첼이라는 한 남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썼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그 영화가운데 압권은 역시 마지막 장면입니다. 파란만장한 일들이 지난 후 스칼렛 오하라는 대지 위에 다시 굳게 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내일은 또 다시 새로운 태양이 뜰 거야!”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희망을 갖고자 할 때 이 대사를 중얼거리곤 합니다. “그래, 내일은 또 새로운 태양이 뜨겠지!”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내일 반드시 새로운 태양이 뜬다면, 그 태양을 만드신 주님, 그리하여 의로운 태양으로 불리시는 그리스도께서 어찌 다시 뜨지 않으시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내일 다시 태양이 뜬다면서 희망을 가지고 주먹을 불끈 쥔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아무리 고난을 당할수록 더욱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신다고 외쳐야 할 것이며, 마라나타!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는 신앙으로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4.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주신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14절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라고 했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대적들의 모략이나 강압에 의해서 별 수 없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 위해 기꺼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심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주신 첫 번째 목적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라고 하였습니다. 

‘불법’은 ‘법이 없는 상태’ ‘법에 대한 경멸이나 위반’등의 뜻을 지니고 있는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죄악만을 일삼는 상태를 말합니다. 모든 불법이라 했는데, 우리의 죄는 머리털보다 더 많은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노예를 자유롭게 풀어주기 위해서는 그 몸값을 지불해야 하는 것처럼, 죄와 사망의 노예로 살아가던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자기 목숨을 그 대가로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의 모든 더러운 죄를 눈보다 더 희고 깨끗하게 씻어주셨습니다. 할렐루야! 

두 번째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신 목적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구역 성경에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는데, ‘친 백성’이란 ‘내 소유’라는 말씀에 기초한 것으로, ‘특별한 보배’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즉 전쟁에서 승리한 왕이 전리품 가운데 자신을 위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구별해 놓은 보화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대속을 통해 우리를 정결케 하여 특별한 보배로 삼으신 것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선한 일’이란 단순히 윤리나 도덕적 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영국 웨스트민스터 교회 목사인 모건 박사에게 한 소년이 편지를 보냈습니다. “저는 지난밤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집회에 참석한 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 이후로 나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기까지 편지를 읽은 모건박사는 깊은 생각이 잠겼습니다. 설교를 듣고 깊은 슬픔에 빠지다니.......그러나 그 다음을 읽는 순간 기쁨이 되살아났습니다. “목사님 제가 그토록 슬퍼하는 이유는 제 아버님이 아직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사는 날 동안 해야 할 가장 귀하고, 크고, 위대하고, 절실한 선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내 가족, 내 친척, 내 이웃, 내 동족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 내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이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 개척자 중에 영국의 두 탐험가가 있었습니다. 로드와 리빙스턴입니다. 로드는 아프리카에 황금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을 노예로 사로잡아갔습니다. 또 엄청난 황금을 본국으로 가져갔습니다. 국민들은 세상을 위해 일하는 로드를 영웅으로 우러러 보았습니다. 반면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 복음 전쟁을 일으켜서, 수많은 사람을 사단의 노예에서 해방시켰습니다. 

그리고 황금을 본국으로 가져가는 대신, 아프리카 영혼의 문제를 가져갔습니다. 또 본국이 아프리카를 침략하는 것을 반대했으니, 국민들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리빙스턴을 눈에 가시로 여겼습니다. 많은 세월이 지나간 지금 로드는 죽었고, 그의 무덤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고 합니다. 리빙스턴 역시 죽었지만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혀 있고, 오늘도 많은 사람이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주일은 ‘행복 나눔 잔치 주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신 목적을 잊지 마시고,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 인도해서 살려내는,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로 선한 일에 열심 하는, 하나님의 친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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