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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손 (막 15: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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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손 (막 15:21-32) 
 
 
❚아름다운 손

여러분, 지금 자기 손을 한번 들여다보세요. 손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손이 예쁩니까? 두텁고 검게 그을린 손도 있을 것이고, 가냘프고 흰 손도 있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미인은 손이 예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섬섬옥수’, 즉 가냘프고 고운 손을 가진 사람이 진짜 미인이라고 했지요. 하지만 어디 가냘프고 고운 손만 예쁘겠습니까? 저는 오히려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 두텁고 투박해진 아버지의 손, 남편의 손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가끔 부르는 옛 유행가가 있습니다.

젖은 손이 애처로워 살며시 잡아본 순간
거칠어진 손마디가 너무나도 안타까웠소
시린 손끝에 뜨거운 정성 고이 접어 다져온 이 행복
여민 옷깃에 스미는 바람 땀방울로 씻어온 나날들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이 노래 아시죠? 하수영이 부른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입니다. 비록 유행가지만 멋진 가사 아닙니까? 세상에서 가장 예쁜 손은 아내의 젖은 손, 거칠어진 손마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공감하시거든 집에 가서 아내 손을 잡고 이 노래를 불러주세요.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징그럽게 왜 그러냐는 아내도 있겠지만 혹시 압니까? 저녁반찬이 달라질 지 말입니다. 보세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은 무엇입니까? 예쁘고 고운 손보다 가족 위해 일하느라 투박해진 아버지의 손, 거칠어진 아내의 손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왜요? 가족 위해 희생하고 수고한 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참 이상한 것은 우리 인간의 신체기관이 너무도 많은데 그중에도 이 손이라는 것이 참 특별합니다. 손은 우선 일을 하거나 무언가를 드는 데 사용됩니다. 또 무언가를 가리킬 때도 사용합니다. 그런데 좀 특별한 것은 우리의 손을 통해 감정이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우선 좋은 감정도 전달됩니다. 다른 사람의 손을 잡으면 감정이 교류됩니다. 아무 감정 없이 손을 잡으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특별한 감정을 가진 사람의 손을 잡으면 찌릿찌릿한 느낌이 듭니다. 그것은 감정이 교류되기 때문입니다. 연애해 본 분들은 무슨 뜻인지 아실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으면 정말 찌릿찌릿하고 전기가 흐르는 느낌이 듭니다. 

또 누군가 지치고 힘들 때 손을 꼭 잡아주면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위로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손은 좋은 감정이나 에너지를 나누는 특별한 기관입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도 병자를 고칠 때 그냥 말씀으로도 충분히 고칠 수 있는데 유독 병자에게 손을 대시거나 손을 얹어 고칠 때가 많았습니다. 손을 통해 사랑을 전달하고 손을 통해 치유의 능력과 에너지를 전달하기 위함이라고 생각됩니다.

반대로 우리 손은 나쁜 감정도 전달합니다. 그냥 비난하는 것보다 손으로 손가락질 하고 삿대질 하면서 비난하면 기분이 훨씬 나쁘고 흥분됩니다. 사람을 때릴 때도 회초리나 몽둥이 같은 것으로 때릴 때보다 직접 손을 대서 때릴 때가 나쁜 감정이 훨씬 강하게 전달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자녀를 때릴 때 반드시 ‘초달’, 즉 회초리로 때리지 절대 손을 직접 대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손을 긍정적이고 좋은 곳에 사용하기 바랍니다. 첫째, 만지지 말아야 할 것은 만지지 마십시오. 손에 대서는 안 될 것이 세상에 많습니다. 손대면 죄가 되는 것은 만지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우리 손을 좋은 일에 사용하십시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나쁜 감정 전달하는 데 쓰지 마시고 사랑을 전하는 데 쓰고, 좋은 감정 전하는 데 쓰고, 남을 위로하고 힘주는 데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무엇보다 우리 손을 주님 위해 사용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끔 부르는 찬송 중에 <충실하게 하소서>라는 곡이 있어요. 우리 권사 찬양대도 가끔 부르는데 가사가 너무 좋아요.

주님 섬기는 손 충실하게 하소서
내 손이 일할 수 있을 때 충실하게 하소서
주님 섬기는 손 주님 섬기는 손
주여 주여 충실하게 하소서 충실하게 하소서 충실하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우리의 손을 이렇게 아름답고 선하게 잘 사용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바랍니다.

❚못 박히신 주님 손

그러면 예수님은 그 손을 어떻게 사용하셨나요? 우리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게 내어주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지고 대신 죽으셨는데 두 주 전 말씀 나눈 것처럼 우리 위해 제일 먼저 채찍질 당해 그 등이 찢기셨으며, 지난 주 말씀 나눈 것처럼 다음으로 머리에 가시관 쓰시고 온갖 모욕과 조롱을 다 당하셔야 했습니다. 

이제 모욕과 조롱을 당한 주님은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로마 군병들에게 끌려 골고다 언덕으로 가서 십자가 위에 못 박히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손과 발이 못 박히신 것은 다 아는데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손과 발이 못 박히신 것일까요? 도대체 어떻게 못 박히셨기에 주님의 고통이 그토록 컸다고 성경은 말씀할까요?

1968년 예루살렘에서 1세기경의 유골함 하나가 발굴되었는데 그 속에는 ‘예호하난’이라는 이름을 가진 20대 남자의 유골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유골의 발뒤꿈치 뼈에는 대장장이가 불에 달궈서 망치로 두들겨 만든 굵고 긴 쇠못이 박혀있었고, 이 못에 붙은 나뭇조각들을 살펴본 결과, 못이 나무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못의 뒤끝이 안쪽으로 구부려져 있었습니다. 십자가 자체는 올리브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못은 죄수의 발등이 아니라, 발뒤꿈치 옆 복사뼈 밑에 박혀 있었습니다. 

죄수의 발등이 아닌 복사뼈에 못을 박은 것은 죄수의 몸을 십자가에 매달 때 몸무게를 지탱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발등에 못을 박는다면 죄수의 몸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발등이 찢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렇게 추정합니다. 죄수의 손에도 못을 박을 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손바닥에 받는 것이 아니라 손목 위 두 개의 팔뼈 사이에 박았을 것이다. 발과 마찬가지로 손바닥에 못을 박는다면 죄수의 몸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손이 찢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근거로 과학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재구성하였습니다. 죄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먼저 땅에 눕혀진 십자가 위에 죄수를 눕히고 손과 발에 못을 박는데 손목 위의 두 뼈 사이에 못을 박고 못이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손목과 십자가 나무를 관통하여 뒤로 빠져나온 못 끝을 망치로 쳐서 구부리는 것입니다. 또 죄수의 발도 마찬가지로 발등이 아니라 발을 옆으로 뒤틀어 복사뼈 바로 밑에 못을 박고 뒤로 빠져나온 못 끝을 쳐서 구부리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면 죄수는 손목과 발꿈치에 박힌 못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몸을 지탱하게 됩니다. 하지만 죄수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엄청난 통증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쉽게 죽지는 않습니다. 낮에는 뜨거운 땡볕과 밤에는 추위를 견뎌야 하고, 때로는 새 같은 날짐승의 공격을 받으며 고통 중에서 서서히 죽게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사도 바울과 베드로 모두 순교를 당했는데 베드로는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고 바울은 머리가 잘려 참수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두 사도의 처형 방법이 달랐을까요? 로마 시민을 사형에 처할 때는 목을 쳐서 죽이는, 듣기에는 대단히 끔찍하지만 오히려 고통이 적은 처형방법을 사용했고, 끔찍한 십자가 처형은 이방인들에게만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처형이 얼마나 끔찍하고 고통스럽기에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들에게는 절대로 이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바로 우리를 위해 이 끔찍하고 무서운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손에는 못이 박히고 발에도 못이 박히고 십자가 나무 위에 달리셔서 오랜 시간 서서히 고통을 받으며 죽어가셨습니다. 자신의 몸무게를 지탱하는 못 때문에 손은 찢겨나가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우리 주님의 그 귀한 손은 이렇게 무참하게 못 박히고, 아픔을 당하고,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도마와 바울의 손

그런데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손, 우리 위해 그 엄청난 고통을 당한 주님의 손에 대해 전혀 다른 두 개의 반응이 성경에 나옵니다. 바로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와 사도 바울의 반응입니다. 먼저 도마의 반응을 봅시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 열두 제자 중에서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흥분해서 도마에게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전하는데 이 의심이 많은 제자 도마는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

그런데 여드레가 지나서 부활하신 주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순전히 도마 한 사람을 위해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절)

그제야 도마는 주님의 부활을 믿고 “나의 주님이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고백하게 됩니다(28절). 그래서 우리가 도마를 ‘의심 많은 제자’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뭡니까? 예수님 손의 못 자국, 옆구리의 창 자국, 이런 증거들을 봐야 믿겠다는 것이지요. 불신입니다. 봐야만 믿겠다, 믿음보다 내 오감으로 체험하고 머리로 이해해야만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래가지고서는 주님의 손이 그 어떤 일도 하실 수 없습니다. 주님의 못 박힌 손, 보혈의 피 묻은 손도 아무 역사를 일으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절)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주님 손의 못 자국에 대해 사도 바울은 뭐라고 말하는지 보십시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자랑합니다. 예수의 흔적이란 주님 위해 복음 증거하다가 박해 받고 얻어맞아 난 상처자국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온 몸에 흉터가 많았을 것입니다. 세상에 자기 몸에 난 흉터를 자랑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조폭들은 몸에 난 칼자국과 상처를 자랑합니다. “나 이런 사람이야”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 외에 그 누가 몸에 난 흉터를 감추고 싶어 하지 자랑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바울은 이 흉터를 자랑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 흉터가 그냥 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난 상처고 복음을 위해 난 흉터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흔적’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스티그마’인데 이 말은 소나 양에게 낙인을 찍어 주인이 누구인지 표시하거나 노예에게 낙인을 찍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 스티그마, 즉 상처의 흔적은 ‘낙인’으로 내 주인이 예수님이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내 주인되신 주님을 위해 박해 받고 얻어맞아서 난 자랑스러운 흉터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에 난 못 자국과 그 상처, 주님의 발과 옆구리에 난 못 자국과 창 자국 이 모든 상처는 비록 엄청난 고통과 아픔의 흔적이지만 또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영광스러운 상처자국인 것처럼, 오늘 나도 주님 위해 고난 받아 난 이 온몸의 상처가 내게는 가장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자국이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상이군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연세가 지긋하신 그 분은 6.25 때 참전한 용사인데 용감하게 싸운 공로로 훈장을 받았지만 어찌어찌 하다가 그만 그 귀한 훈장을 잃어버리고 말았답니다. 하지만 그분은 제게 자리에 난 상처, 포탄에 맞아 아주 길고 흉하게 난 흉터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비록 훈장은 잃어버렸지만 내 몸에 난 이 상처가 바로 훈장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 참전용사처럼 복음을 위해, 주님을 위해 고난 받아 난 온몸의 상처가 내게는 세상 어떤 훈장보다 더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자국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손은 이렇게 영광스러운 손입니다. 그 못 자국 난 손, 그 상처 입은 손은 우리를 구원하신 놀라운 손입니다. 그러니 이 손을 꼭 잡으시기 바랍니다. 이 손 붙잡아 구원에 이르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특히 지금 고난 중에 힘들고 어려운 분들은 주님 손잡고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그 못 박힌 손, 십자가의 피 묻은 손으로 우리를 만져 고치고 회복시키기 원하십니다. 

환자를 손 얹어 일으키시고 죽은 자도 손 얹어 “청년아 일어나라, 소녀야 일어나라(달리다굼)” 하신 주님이시니 그 주님의 피 묻은 손을 붙잡지 아니하고는 구원 받을 그 어떤 방법도 없음을 깨닫고 세상의 그 어떤 손보다, 어떤 권세나 능력보다 오직 주님의 손을 굳게 잡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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