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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죽음을 심고 생명의 열매를 (요 12: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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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심고 생명의 열매를 (요 12:20-33)
   
리더쉽 분야에서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연설가이면서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티븐 코비(Steven Covey) 박사를 아시는 분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그 분의 최근 베스트셀러 가운데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서두에 보면 결혼한 딸과 나누었던 대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똑똑하고 유능한 딸은 결혼해서 셋째 아이를 낳아 기르는 중이었습니다. 딸이 아빠인 코비박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너무 속상해요. 아버지 제가 이 아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빠도 아시죠? 하지만 이 아이는 말 그대로 제 시간을 몽땅 뺏고 있다고요. 전 정말이지 다른 일은 하나도 할 수가 없어요, 제가 꼭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말예요” 이 얘기를 들은 코비박사는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딸아, 그냥 마음을 편하게 가져. 편안한 마음으로 그 아이를 즐기려무나. 너만큼 그 아이를 사랑하고 돌볼 사람이 없지 않니? 그렇다면 이 아이를 돌보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야.” 그러면서 코비박사는 리더십의 대가답게 딸에게 아주 흥미로운 충고를 했습니다. “시간 관리 같은 거 신경 쓰지 말아라. 달력을 잊어버려. 다만 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이 아이를 즐기도록 해라. 네 내면의 나침반을 따르고 벽에 걸린 시계는 신경 쓰지 말아라.” 

코비박사의 마지막 얘기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네 내면의 나침반을 따르고 벽에 걸린 시계는 신경 쓰지 말아라” 시계는 시간을 알려주지만 나침판은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우리에게도 시간의 관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생의 방향입니다. 그 방향을 바로잡고 사는 것이 중요함을 알아야겠습니다. 우리는 너무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가치가 있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려면 단순히 바쁘게 움직이는 것보다, 올바른 방향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우선순위를 따라 사는 사람이 가치 있는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한 글을 보았습니다. 우체부 집배원인 요한이라는 사람은 수십 년간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로스알데 힐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매일 50마일(약 80Km)의 거리를 매일 오가면서 우편물을 배달해 왔습니다. 어느 날 요한은 우편물을 배달하기 위해 모래먼지가 뿌옇게 일어나는 마을길을 걸어가면서 생각에 잠겼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이 길을 수십 년 간을 오갔는데, 나는 앞으로도 계속 이 먼지가 나는 황폐한 거리를 오가며 여생을 보내야만 하는가?’ 정말 따분한 인생을 보낼 것을 생각하니 치가 떨려왔습니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피어 있지 않은 황폐한 거리를 걸어가는 요한의 걸음걸이는 더욱 힘이 없었습니다. 한 참을 그렇게 깊은 시름 속에서 길을 걷다 그는 무릎을 탁 치며 다시 가벼운 걸음걸이로 우편물을 배달했습니다. “어차피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면 그것이 매일 반복된다고 해서 무엇이 걱정이란 말인가? 그래, 아름다운 마음으로 내 일을 하자!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름답게 만들면 되지 않은가!” 

다음날부터 요한은 들꽃 씨앗을 주머니 속에 가득 넣어 가지고 다녔습니다. 우편배달 하는 틈을 내어 주머니 속의 꽃씨들을 길가에 뿌렸습니다. 50여마일의 거리를 오가는 동안 그는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 씨를 뿌렸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자 요한이 다니는 마을의 길 양쪽에는 노랑, 빨강, 초록의 꽃들이 다투어 피어났습니다. 이른 봄에는 봄꽃들이, 여름에는 여름 꽃들이, 가을이면 가을꽃들이 철을 따라 아름답게 피어났습니다. 50마일의 거리는 더 이상 황막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즐거운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기쁨의 거리였습니다. 휘파람 불며 걸어가 우편물을 배달하는 요한의 뒷모습은 한 폭의 수채화를 방불하게 아름다웠습니다. 요한의 씨 뿌림을 통하여 씨앗이 죽고 새로운 생명이 움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글을 읽으면서 세상에 이렇게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그만 노력하면 이 세상을 사람 살만한 사회로 바꿀 수 있습니다.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과 사건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그 날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말씀을 전파하시고 있었는데, 헬라인들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중에 헬라인-그리스인 몇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왔는데,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어디서 온 헬라인인지,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이들 헬라인들은 예수님 앞으로 직접 오지 않고, 빌립이라는 제자에게 예수님을 만나볼 수 있게 해달라고 청을 넣었습니다. 그들은 신사적인 사람들이요, 서양의 예절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12제자 중에 빌립이라는 제자에 다가와서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빌립은 벳세다출신으로 한 고향 사람인 안드레에게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 가서 헬라인들이 찾아온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놓고 보면 예수님이 이방인들의 방문을 받은 것이 두 번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때에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찾아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면서 경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이 마지막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 헬라인들이 찾아와 만나 뵙기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의 방문은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사건이 되었고, 마지막 헬라인들의 방문은 예수님의 영광을 얻으실 때, 곧 십자가의 죽으심을 알리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헬라인들이 찾아와 만나뵙기를 원한다는 말을 들으시고, 마치 동문서답하시듯이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를 분별하고 때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다 때가 있습니다. 전도서는 구약의 지혜문학 작품입니다. 전3:1 이하에 보면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라고 하셨습니다. 때가 있으니 때를 잘 분별하고 때를 잘 맞추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막1:15에서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때가 찼다고 하셨습니다. 분위기가 무르익었다는 말이요,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 문화적으로 모든 환경이 메시아의 사역을 시작하라는 뜻으로 받았습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은 “이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씀하시는 어머니에게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2:4)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사역을 제쳐두고, 이적이나 행하여 메시아임을 드러내는 것이 시기적으로 아직 성숙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7장에는 주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사람이 크게 되려면 시골에 묻혀 지내지 말고, 큰 도시인 유대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활동하여 이름을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요7:6)고 하셨습니다. 이번 명절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몇 번(요7:30, 요8:20)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헬라인들의 방문을 받으시고는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인자의 때는 영광의 때요, 죽음의 때였습니다. 인자의 때는 영광의 때이면서도 죽음의 때입니다. 

헬라인은 이방인의 대명사였습니다. 헬라인들이 방문은 예수님의 죽음은 만민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이제는 유대인들을 넘어서 이방인들에게까지 확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박해하는 유대의 교권자들은 예수님의 인기와 이적의 소문이 유대를 넘어서 이방인들에게 확산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한 알의 밀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요, 많이 읽고 즐겨 암송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죽지 아니하면”, “죽으면”이라고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으로 인자의 때는 죽음의 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거절하지 않고 단호하게 죽음으로 나아가겠다고 하시는 의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라는 은유적으로 해석해야 하고, 상징적인 말씀입니다. 이 한 알의 밀알에 대한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결심이요, 이제 죽음을 향하여 담대히 나아가려고 하시는 결단입니다. 

본문 32-33에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고 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들리십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을 예수님에게로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요6:38-40을 보면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고 살리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당신이 죽으심으로 많은 생명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을 가시려고 합니다. 그러나 한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고 소중한 생명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소중하고 예수님의 생명은 천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어야 하는 생명을 가지고 오셨고, 우리는 보존해야 하는 생명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닙니다. 

한 알의 밀알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에 한 방향을 지시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건이나 사람을 대할 때에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까? 나로 인하여 저 사람이 살아나고 나로 인하여 이 일을 해결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은 그냥 있으면 영원히 한 알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파종의 원리입니다. 지금은 파종의 시기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지는데 반드시 땅에 떨어져야 하고, 흙에 묻혀야 합니다. 공중에서는 저절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단단한 그릇에 담겨 있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한 알의 밀알은 반드시 땅에 떨어져야 하고, 흙에 묻혀야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흙에 묻힌다는 것은 단단한 껍질이 벗겨지고 썩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땅에 떨어져 보셨습니까? 비참할 정도로 인격이고, 인품이고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무참하게 땅에 내던져지고 온갖 더러운 흙이 얼굴에 들어옵니다. 나의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땅에 묻어버립니다.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않고 죽은 척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우리 사회는 살 소망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죽어지낸다는 말도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죽은 척 하자는 사람도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는 산 자들이 하는 대로 합니다. 팔을 꺾으면 그 팔은 꺾인 채로 있고, 팔을 비틀면 비튼 대로 그냥 비틀려 있습니다. 

내가 죽은 다음에 싹이 나고 잎을 내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은 나의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시고 100배의 결심을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잘 죽기만 하면 됩니다. 죽음에는 인내가 따라야 하고, 절제가 따르고, 낮아지고 겸손하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나를 드러내고 내가 살아나고 내가 인기를 얻고 알아달라고 하면 아직까지도 흙을 뒤집어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땅에 떨어지고 흙으로 덮이기를 바라는 사람만이 희생을 감수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것을 다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새생명을 받아 구원받았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기에 지금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엄청난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1865년 아주 추운 겨울, 눈보라가 치는 날입니다. 한 여인이 영국의 사우스 웨일즈라고 하는 곳의 언덕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남편 없이 갓난아이를 안고 가다가 그만 길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추위에 떨다 떨다 못해 이 어머니는 죽었습니다. 눈보라가 그친 다음, 사람들이 한 여자가 앉아서 죽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얼어 죽은 여자가 옷을 다 벗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안고 있는 아들을 살리려고 자기는 하나씩 하나씩 옷을 자꾸 벗어서 그 아이를 감쌌던 겁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죽었는데 아이는 살아 있었습니다. 이 아이를 데려다가 한 선한 사람이 키웠는데 이 아이가 커서 1916년 영국수상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1863. 1. 17~1945. 3. 26)백작이라는 수상입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의 희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자기를 살리시고, 나를 위해서 내 대신 죽었는데, 그것도 알몸으로 죽었다고, 그 뜨거운 사랑에 감격하고 되새기면서 한평생을 부모 없이 살았지만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세계 제1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또 다른 사람을 살리고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그 몸을 찢기면서 죽으신 그 고통스러운 죽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25절을 봅니다. “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

이 말씀을 자기 죽음을 희생이라고 할 때에 그 희생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생명이라는 말은 헬라어의 ‘프쉬케’라고 인간의 영혼을 포함하여 생명 그 자체를 말합니다. 생명이란 목숨입니다. 

이 본문의 말씀은 아주 대조적입니다. 사랑과 미움, 잃어버림과 보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의 24절에 한 알의 밀알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25절에서는 우리에게 그러한 삶을 적용하라고 하십니다.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라고 하신 말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의 생명을 과도하게 사랑하거나 아끼려고 하지 않고, 다 사용하는데, 희생하며 헌신할 때에 참된 생명으로 보전되는 것이요, 한번 주어진 생명인데, 그 생명을 가치 있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을 참으로 값어치 있게, 가치 있게 사용하고 마감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가다가 죽음을 맞이하겠습니까? 이제 남은 인생을 규모 있게 사용하고 의미와 가치를 찾아 잘 사용하다가 마감할 것입니까? 

우리의 생이란 지나간 때가 있고, 육체의 남은 때가 있습니다. 벧전4:2-3에서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우리의 죄악은 지나간 때로도 충분하고 족합니다. 그러나 육체의 남은 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시는 사람의 정욕대로 살지 말아야겠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다 죽음으로 가고 있습니다. 어차피 죽을 인생인데, 병으로 죽든지, 사고로 죽든지, 늙어 죽든지 인생을 마감하는 고통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누군가를 구원하기 위하여 죽을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입니까? 죽는 순간까지 열매를 맺는다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내가 희생하고 헌신하고 내어놓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열매를 맺었으면 그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간 사람입니다. 예수님처럼 잘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잘 죽기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잘 살아가려면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바울은 날마다의 죽음을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했습니다. 이것은 선택적인 죽음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죽음을 선택할 것입니까? 희생적인 인생을 살면 희생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요일2:15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비록 발을 붙이고 살아가고 있지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안에 거하려고 날마다 죽는 희생과 헌신으로 살아야겠습니다. 

26절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은 자기희생과 더불어 섬김의 삶을 말합니다. 섬기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우리도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롬14:8을 보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을 섬기고 주님처럼 살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는 사람들, 사나 죽으나 주님의 소유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주님이 받으신 고난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땅에 떨어지는 낮아짐과 수모와 자신의 모습은 흙에 감추어지고, 나를 보호하고 있던 단단한 껍질이 벗겨지고 썩어질 때에 한 생명이 태어나고 열매를 맺는데, 수백 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구주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으심으로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들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우리의 생명을 아낌없이 희생하고 헌신하면서 주님에게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주님과 같이 섬기며 살아가다가 주님이 예비하신 그 나라에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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