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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나 죽으나 (롬 14: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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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 죽으나 (롬 14:7-23)

1. 어느 정신 병원에서 한 정신과 의사가 환자들과 상담하면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이 의사가 한번은 어느 환자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어서 격리실 안으로 뛰어 들어가 찾아보니 그 안에서 다른 환자들과 어울려 있으면서 대답을 하지 않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왜 네 이름을 부르는데도 대답을 하지 않느냐?” 고 꾸짖자, 대꾸하는 말이 엉뚱하게도, “이제부터는 나를 나폴레옹 장군이라고 부르라” 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의사가 “누가 네 이름을 그렇게 바꿔 부르라고 하더냐?” 고 물으니, 그 환자의 대답이 “지난밤에 하나님이 나를 나폴레옹이라고 부르시더라.” 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 누워있던 다른 정신병 환자가 벌떡 일어나면서 “내가 언제 너를 나폴레옹이라고 이름지어 주었느냐?”고 소리를 지르더라는 것입니다. 그는 바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병자들처럼 스스로가 왕이 되어 자기 소견대로 살았던 이스라엘 사사시대를 두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삿17: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B.C.1350년경 이스라엘에는 나라 백성을 통치하는 정치 지도자, 왕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보호받지 못하고 대적들의 위협이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전 민족을 통솔하는 정치 지도자가 없었지만, 통치법(統治法)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율법,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태평성대(太平聖代)를 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대적자들로부터 이스라엘을 완전히 보호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궁극적 통치자는 하나님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살던 시대를 사사(士師)시대라고 합니다. 나라 백성들에게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지도자를 세워 하나님 말씀으로 그들을 다스린 시대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주변 이방 나라들처럼 눈에 보이는 왕의 통치를 원했습니다. 사사시대의 마지막 사사가 사무엘이었습니다.(B.C.1050) 그런데 사무엘이 늙고 그 아들들은 자기 아버지와 같지 않아서 돈을 탐하여 뇌물을 받고 재판 업무를 공정하게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말씀에 따라 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벡성들도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요청합니다. “보십시오. 이제 당신은 늙으셨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본받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나라들과 같이 우리에게도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십시오.” 

사무엘은 왕을 세워 달라는 그들의 요구를 기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여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너에게 한 말을 다 들어주어라. 그들은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 더 이상 내가 그들의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고 있느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은 계속 나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겨왔으며 이제 그들은 너에게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느니라. 

이제 너는 그들의 말을 들어라. 그러나 왕을 모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들에게 경고해 주어라.”(삼상8:1-9) 결국 이스라엘의 왕으로써 하나님을 저버리고 사람이 다스리는 왕을 세워 이스라엘 왕정사(王政史)가 시작되었지만 수많은 오점들로 얼룩지다 결국에는 멸망당하게 된 것이 오늘의 이스라엘 역사였습니다. 


2. 오늘 본문 7,8절에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사사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소견,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사람은 모든 행위에 대해 자기를 판단기준으로 삼는 사람을 말합니다. 자신의 삶의 주인은 오직 자기 자신이며, 자신의 생활 가운데 어떠한 ‘왕’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두고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마서 1:28-32을 보겠습니다.

(롬1:28-32)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해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서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살아도 죽어도 오직 주를 위하여 살고 죽는 사람”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라는 고백으로 삽니다. 

성도의 생명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핏값을 주고 하나님께서 사신 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전서 6:19-20을 보겠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라는 고백으로 사는 사람은 그 삶의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삶의 목표가 오직 하나님의 영광위해 사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삶의 중심이 자기가 아니라, 오직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 삶의 중심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위해 살지 아니하고 타인을 위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Ego-centric)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God-centric)이 되어 ‘타자를 위한 존재의 삶’(Being for the Other)을 살게 됩니다. 또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라는 고백으로 사는 사람은 “살든지 죽든지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빌립보서1:20입니다. 

(빌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라는 고백으로 사는 사람은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 형제를 실족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언행심사가 다른 형제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지를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형제의 신앙 성장에 방해되거나 그를 실족케 하는 일들을 단호하게 피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형제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흘려 구원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아무리 연약한 형제일지라도 예수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을 실족케 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헛되게 하는 망령된 행동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작은 자’, 다시 말해 어린아이 하나, 믿음이 연약한 자, 힘이 없는 자 하나라도 실족케 하면 연자맷돌에 매여 바다에 던져져 다시는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9:42입니다.

(막 9: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예수께서는 또 자신이 죄의 유혹을 받아 자신이 실족하게 되거든, 자신을 실족케 한 눈이나 손이나 그 어떤 지체라도 망설이지 말고 지체없이 빼어 내버리든가 찍어 내버리든가 해서,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5:29-30입니다. 

(마 5:29-30)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사도 바울이 예를 하나 들어 설명합니다. <믿음이 강한 성도 집에 어느 잔치집에서 잔치 음식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이 음식은 잔치 전(前)에 우상의 제물로 바쳐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도는 그 사실을 모르고 그 음식을 받아 먹었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 믿음이 약한 성도가 있었는데 그는 가져온 음식이 우상의 제물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신앙지식으로는 우상의 제물을 먹어서는 안된다고 알았는데, 믿음이 강한 성도가 거침없이 먹는 것을 보고 그도 양심에 용기가 생겨서, 믿음이 강한 자를 본떠, 우상에게 바친 음식들을 먹어도 되는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약한 성도는 믿음이 강한 성도의 지식 때문에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믿음이 약한 성도를 위해서도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이렇게 해서 그를 실족하게 했다면 과연 죄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잔치 음식이 우상의 제물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분명 먹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모르고 먹었다고 해서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고전8:6-11)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결론지어 말합니다. 고린도전서8:12-13입니다.

(고전8:12-13)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바울은 어떠한 형제라도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면 우상의 제물은 물론, 그 어떠한 고기라도 영원히, 평생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셔서 구원하신 그 형제가 실족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그의 뜨거운 사랑에서 나온 결단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가 죄에 넘어가 실족하게 되면 애타는 마음, 속에서 화가 불같이 타오르는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고린도 후서11:29입니다. 

(고후 11: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라는 고백으로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과 단점을 담당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4.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라는 고백으로 사는 사람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써야 합니다.” 믿음이 강한 자들은 어떤 일을 할 때 먼저 ‘그 일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일을 한다면 믿음이 약한 형제들은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가?’를 늘 생각하여 교회 공동체의 덕을 세워야 합니다. 믿음이 강한 성도의 독선과 실수는 믿음이 연약한 상태에 있는 성도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강한 자는 자기의 행동이 아무리 정당하다해도 믿음이 약한 성도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절제하는 것이 성도의 공동체에서 아름다운 건덕 생활인 것입니다. 

성도의 자유는 자신의 신앙 양심보다 다른 사람의 신앙 양심을 더 존중하는 가운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아무리 유익하고 거리낌이 없는 신앙 행동이라도 믿음이 약한 성도들에게 유익함이 되지 아니한다고 판단된다면, 얼마든지 그 행동을 삼갈 줄 아는 것이 덕을 세우는 생활인 것입니다.(고전6:12) 강한 자들은 자신의 자유를 구가하기보다는 사랑의 원리를 따라 형제를 생각하며 행동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생활 자세를 바울이 로마서15:2-3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15:2-3)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시고 이웃을 기쁘게 하시는 삶을 살았던 것처럼 이웃을 기쁘게 하는 것이 바로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완전한 남편이 되어 주기를 바라지 않는 아내가 가장 완전한 아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완전한 사람이 되어 주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부담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이것은 상대방을 괴롭히는 일입니다. 완전한 것을 요구하는 자신은 더 형편없는 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덕이라는 것은 이런 것을 초월합니다. 덕은 내 자신에 대해서는 완전하려 하지만 남에게는 관용을 베풉니다. 남에게는 바늘 끝처럼 예민하면서 자기에 대해서는 바다처럼 넓다면 무엇인가 크게 잘못된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예리하게 철저히 완벽을 요구하면서 남에게는 바다처럼 넓은 아량을 베푸는 자가 덕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냉엄하리만큼 객관적인 비판의 자세를 가지고 남을 대해서는 가장 주관적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은 바로 이러한 덕이 있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똑똑하다는 것은 좋은 말이 아닙니다. 똑똑하다는 교인보다는 진실하고 좀 어수룩한 교인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르스(F.F.Bruce) 교수는 신앙 생활 특히 교회 생활에는 지식이 전부가 아니며 늘 사랑의 요구를 고려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8:1)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지식과 사랑은 함께 역사해야만 합니다. 믿음이 강한 자들은 영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의 지식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상처 입힐 것입니다. 지식에 사랑이 함께 역사할 때 믿음이 연약한 형제는 강하게 자라갈 것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들은 연약한 자에게 사랑으로 아름다운 영향을 주고받아야 합니다. 

믿음이 강한 자들은 연약한 자의 신앙이 성장하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다른 형제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는 자신에게 해가 되더라도 참을 수 있고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이 참 성도의 아름다운 모습이며 교회를 세우는 건덕 생활입니다. 성도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의견, 자신의 신앙 형태, 자신의 신앙 체험 등을 강요해서는 안됩니다.(본문19-23절). 

각자의 믿음을 자기 믿음과 동등하게 존중해 주는 사랑을 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록 자신은 좀 답답하고 덜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개개인의 적극적인 사랑 속에서 신앙 공동체 전체의 성숙이 촉진되는 것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신앙 공동체 전체가 성숙해질 때 자신도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형제가 성장하지 않는 가운데 자신의 성장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이나 연약한 사람이나 모두 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성장해야 합니다. 에베소서4:13-16을 보겠습니다.

(엡4:13-16)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믿음이 강한 성도는 사랑 안에서 성장해야 하며 연약한 성도는 지식 가운데서 성장해야 합니다. 믿음이 강한 성도와 약한 성도가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되어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성장해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연약한 양심을 가지고 성숙하지 못한 채 머물러 있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함께 할 것입니다.”(벧후3:18).

교회의 활동을 젖먹이 그리스도인들 수준에 맞춘다면 보다 성숙한 성도들의 봉사와 전도 사역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젖먹이 그리스도인들 자신의 성숙도 방해하는 것입니다. 연약한 사람들은 강한 자에게서 배워야 하며,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사랑하므로 성장해야 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의 양심은 지식으로 강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 20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20)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교회는 이 시대에 있는 하나님 나라와 같은 곳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특정한 음식을 먹느냐 못 먹느냐의 시시비비를 가리며 또한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외고집적으로 주장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어떤 음식을 먹고 안 먹는데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의”는 모든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가 교회 생활에 이루어질 때를 ‘의’라고 말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가 함께 성장해갈 수 있도록 피차에 하나님의 뜻과 성령에 순종할 때 교회가 하나님 나라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으로 얻게 되는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빌4:7).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 희생의 정신으로 서로 화목하게 될 때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희락”은 “의”를 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의 관계를 누리는 성도의 정서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영혼의 기쁨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성령 안에서 다른 사람과의 모든 관계에서 오는 사귐의 기쁨을 말합니다. “희락”, 기쁨은 ‘의’와 ‘평강’의 삶을 살아갈 때 자연히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8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우리 교회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이루어지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된 성도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때에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이며, 그것이 곧 이 땅 위에 천국을 세워가는 일, 하나님의 사업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그저 단순히 바른 교리의 지식을 많이 갖고 있는 형제들이 아니라, 그 지식과 함께 교회의 평화를 원하고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충심으로 바라고 그것을 위해 기쁨으로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즉 자기의 이익보다는 교회의 이익을 우선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시는”(마6:33)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먼저 교회와 성도의 성장과 영광을 성도의 삶의 목표로 삼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신과 교회가 되어질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우리 평강 교회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엡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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