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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눈물 (요 11: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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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눈물 (요 11:33-35)


성경은 상식적으로 볼 때, 이해하기 힘든 책입니다. 대체로 책을 쓸 때, 주인공은 미화하여 표현합니다. 주인공의 약점은 감추고, 장점은 부각시킵니다. 그리고 때로는 과장하거나 심할 경우, 없는 것까지 만들어서 쓰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영웅처럼 돋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약점을 있는 그대로 기록합니다. 장점이 있어도 그것을 장점이라고 강조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다윗과 같은 위대한 왕도 밧세바를 범한 치명적인 죄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덮고자 꼼수를 쓰는 치졸한 모습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결코 영웅처럼 돋보이지 않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한 기록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생과정이 정말 보잘 것 없습니다. 부모가 정말 내세울 것이 없는 낮고 천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탄생도 마구간 말구유에서 나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기도 장면을 보면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약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실 때도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어찌 보면 부끄러운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게다가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니이까”라고 연약한 모습으로 절규까지 하셨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우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여러 차례 예수님께서 우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유대 멸망을 내다보시면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우셨습니다. 다음으로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나사로의 상가를 찾으셔서 안타까운 마음에 우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실 때 우셨습니다. 히 5:7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기도하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감추고 싶은 모습입니다. 동양문화권에서 사내대장부가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정말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인류를 구원하시러 오신 메시야께서 우셨다는 것은 그런 사실이 있다고 해도 감추려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성경은 왜 예수님께서 우신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을까요? 예수님의 모습 가운데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 많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감추어도 될 예수님의 우시는 모습을 성경은 왜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이 문제의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베다니라는 마을에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 세 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미 예수님과 깊은 친분을 맺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사로가 중병에 걸리게 됐습니다. 누이들이 급히 예수님께 이 사실을 알리고, 오셔서 저를 고쳐주실 것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일부러 늑장을 부리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부활에 관해 말씀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이미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장사된 지 나흘이 지난 뒤였습니다. 

먼저 마중 나온 마르다를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찾으셨습니다. 마리아가 위로하러 온 유대인들과 함께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저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한 마음으로 무덤의 위치를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저들과 함께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35절을 보면,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을 보시자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이미 마르다와 마리아를 만나시면서 슬퍼하시며 마음으로 우시던 주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 이르시자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자 성경은 왜 이 이야기를 이렇게 자세히 기록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이 주님의 눈물을 통해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1. 인간을 향한 주님의 마음

우리는 주님의 눈물을 통해서 우리 인간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불쌍히 여기심입니다.

3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을 보시고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께서 오라비를 잃고 통곡하고 있는 마리아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눈물은 인간의 슬픔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마을 광장에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모여드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어두움이 드리워져 있었다. 한 소녀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지금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는 것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어느 한 곳을 힘없이 응시하고 있던 소녀가 마침내 소녀가 단두대에 올랐다. 소녀의 슬픈 죽음을 참지 못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녀의 짧은 비명을 듣고 그들은 두 눈을 감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조금씩 커져갔다. 그 속에는 어느 누구보다도 비통한 마음으로 소녀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소녀의 아버지였다. 자신의 눈앞에서 억울하게 처형당하는 딸의 모습을 지켜보는 소녀의 아버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에 휩싸였다.

그때 마을 사람들과 함께 광장에 모여 있던 한 화가가 붓을 들었다. 화가는 소녀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의 비통한 표정을 화폭에 담았다. 그의 그림이 어찌나 생생하던지 그림을 본 사람들은 누구라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의 그림 가운데 많은 사람들 중 유독 한 사람의 얼굴만이 옷소매로 가려져 있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마을 사람이 화가에게 물었다. "왜, 이 사람의 얼굴은 옷소매로 가려져 있습니까?" 그러자 화가가 침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들의 슬픔은 하루가 지나면 곧 잊을 수 있는 것이기에 그릴 수 있었죠. 하지만 소녀의 아버지의 얼굴은 아무리 뛰어난 화가라도 감히 그릴 수 없는 깊은 영혼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슬픔이었기에 도저히 그릴 수 없었소..."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 마리아에게는 화가도 담아낼 수 없는 깊은 슬픔이 있었습니다. 마리아 뿐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때로는 이렇게 화가도 담아낼 수 없는 깊은 슬픔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 슬픔 때문에 고통스럽고 인생이 힘이 듭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그 깊은 슬픔을 아십니다. 인간의 그 깊은 슬픔을 뼛속 깊이 느끼시고, 그 슬픔을 함께 나누시기 위해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슬퍼 눈물지을 때, 주님께서도 함께 우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눈물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거기서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안타까워하십니다.

35절을 보면, “눈물을 흘리시더라”는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눈물을 흘리시더라’는 말에 해당하는 원어는 ‘다크루오’(dakruo)입니다. 이 말은 33절에 나오는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운다고 할 때 사용된 ‘클라이오’(klaio)와는 다른 말입니다. 

이 클라이오는 크게 소리 내어 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마리아와 유대인들은 대성통곡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크루오라는 말은 눈물을 흘리며 나지막이 우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눈물을 흘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마음 깊이 안타까움을 느끼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며 나지막이 우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을 바라보셨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함께 하던 나사로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무덤에 장사되어 벌써 나흘이나 지났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나사로를 바라보시며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독일의 실존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원래 정신과의사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인간 실존을 사색하며 철학자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그런 변신의 과정에 그만의 뼈아픈 인생체험이 있었습니다.

독일에 나찌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정부가 야스퍼스에게 아내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내와 헤어질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가 끝내 거절하자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교수직을 박탈했습니다. 그는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됐던 것입니다.

같은 시기에 가까운 친구인 하이데거에게 크게 실망을 하게 됩니다. 하이데거는 나찌 정권의 강압을 견디지 못하고 정권에 적극적으로 협력했습니다. 그러면서 프라이브르크 대학 총장으로까지 출세하게 됩니다. 이를 바라보는 야스퍼스는 하이데거를 변절자라고 욕만 할 수 없는 상황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야스퍼스는 인간에게는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음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한계상황’ (Grenzsituation)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이 한계상황을 ‘누구나 그 앞에 섰을 때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일종의 벽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한계상황의 대표적인 것이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한계상황을 극복하는 것을 그의 철학의 중심 주제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한계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그 앞에 설 때 좌절할 수 밖에 없는 벽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사로에게는 죽음이 그 한계상황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해결할 수 없는 인간관계가,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치유할 수 없는 질병이, 또 어떤 사람에게는 탈출구가 없는 절박한 삶의 형편이 그 한계상황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이런 우리 인간의 한계상황을 잘 아십니다. 그리고 그 한계상황 앞에 서 있는 인간을 보시면서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래서 눈물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물은 단지 동정의 눈물만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친히 나사로를 다시 살리셔서 나사로를 그 한계상황 속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한계상황 앞에서 좌절을 경험할 때 주님은 우리를 보시며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손을 내미십니다. 우리가 그 손을 잡아야 하겠습니다.

2. 우리를 향한 주님의 부탁

이제 우리는 본문의 주님의 눈물 속에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부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웃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소극적으로는 예수님의 은혜를 받고 사는 것을 말하지만, 적극적으로는 예수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눈물 속에 담긴 은혜를 받은 우리는 우리의 눈물로 주님의 눈물에 담긴 은혜를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정호승 시인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시 가운데 이런 시구가 있습니다.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런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로 이런 사람이 되라고 부탁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의 눈물에 담긴 주님의 부탁을 정리해 보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 공감의 부탁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슬픔 가운데 있는 우리의 이웃과 한계상황 앞에서 좌절하고 있는 우리의 이웃과 마음을 나누라고 부탁하십니다. 바로 어려운 이웃과 공감하며 살라는 부탁입니다.
동정과 공감은 다른 것입니다. '동정'은 영어로 'sympathy'라 합니다. 이것은 ‘미안하다’거나 ‘안됐다’거나 한 발짝 뒤에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위해서 느끼는 느낌 즉 ‘feel for’의 감정입니다.

그러나 ‘공감’은 영어로 ‘empathy’라 합니다. 이것은 어려운 이웃의 마음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말로 ‘감정이입’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과 함께 느끼는 느낌 즉 ‘feel whith’의 감정입니다.

주님께서 슬픔에 통곡하고 있는 마리아를 보시고 눈물 흘리셨습니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 무덤에 갇혀있는 나사로를 보시고 눈물 흘리셨습니다. 그들의 아픈 마음을 공감하셨기에 눈물 흘리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눈물은 우리에게 공감하며 살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둘째, 동행의 부탁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이웃을 찾으라고 부탁하십니다. 그들의 슬픔과 좌절의 걸음걸이에 동행하라고 부탁하십니다.

중국의 고사 성어가운데 ‘풍우동주’(風雨同舟)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바람 속에 같은 배를 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려움 속에서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나누고, 슬픔을 나누고, 역경을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 풍우동주 하셨습니다. 슬픔 당한 이 가정을 찾으셨습니다. 눈물을 흘리시면서 그 슬픔과 좌절 속에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그 슬픔을 이겨내고 좌절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어려운 이웃 곁을 찾으라 부탁하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고통을 나누며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우라 부탁하십니다. 바로 동행하라는 부탁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우리의 슬픔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눈물 흘리십니다. 우리의 한계상황을 보시고 안타까워 여기시며 눈물 흘리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눈물을 보며 위로와 용기를 얻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이웃의 슬픔과 좌절을 공감하라는 부탁입니다. 그리고 그 곁을 찾아 함께 하고 그들을 도우라는 동행하라는 부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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