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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물 위로 오라 (마 14: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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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로 오라 (마 14:22-33)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들을 죄에서 구원해 줄 구세주로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와 같은 분이 왕이 되시면 먹고 사는 것은 문제도 없겠다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들을 피하여 숨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신 후 습관처럼 하신 말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아무에게도 가서 이것을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겸손하셔서 그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병이나 고쳐주시는 분으로 오해할 것을 염려하셔서 그러셨던 것입니다. 

저는 오병이어의 기적도 성경대로 믿고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신유의 역사를 말씀 그대로 믿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형통해 지고 강건해져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데도 실패하고 가난해지고 어려워지는 것은 세상이 죄로 말미암아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부함과 형통함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입니다. 

왜곡된 세상에서 바르게 살려고 하다가 가난해 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들은 참으로 훌륭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왜곡된 세상에서 바르게 살아 부해진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이 구원과 같은 수준은 아니지만 그것도 틀림없는 하나님의 축복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르게 살려고 하다가 가난해 진 사람은 인정하지만 바르게 살아 부하게 된 사람들은 도무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부함과 건강함을 긍정하지만 그것이 우리 기독교의 핵심이 아닌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것을 내세우고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형통함과 신유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강건함을 영혼이 잘되는 구원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것을 내세워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은 건강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 때문에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을 피하여 숨으셨는데 교회와 목회자 중에는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을 내세워 교회를 부흥시키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본문으로 갑니다. 예수님은 저들을 피하여 숨으시면서 제자들도 그곳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가라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이 제자들에게 가장 위험한 자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비난하고 매장하려고 하고 돌을 던지는 자리가 위험한 자리인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보다 더 위험한 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높이고 왕으로 섬기려고 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왕이 되실 분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자신들도 한 자리 하게 될 것이라는 인간적인 기대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것 때문에 제자들끼리 다툰 적도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마음과 기대를 가지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려고 하는 그 자리는 매우 위험한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버나움으로 멀리 배를 타고 떠나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하였던 벳세다 광야의 자리는 머물고 싶었던 자리이지 떠나고 싶은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저는 이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이 부분에 큰 은혜를 받습니다. 제자라고 다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저들도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려고 하였던 사람들과 똑같은 면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는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평생 두 번 다시 못 올 것과 같은 절호의 기회인데 그것을 포기하고 단번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믿음의 교훈을 주는 말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그와 같은 믿음 주시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풍랑이 일었습니다. 바람이 불었습니다. 바람이 벳세다에서 가버나움으로 분 것이 아니라 가버나움에서 벳세다로 불었습니다. 어부 출신 제자들이 많아 노를 젓는 일이 프로였지만 최선을 다하여 노를 저었음에도 불구하고 배는 가버나움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열심히 풍랑과 싸우며 가버나움을 향하여 노를 저었습니다.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었는데, 포기하고 뱃머리를 돌리기만 했다면 노를 젓지 않아도 배는 자동적으로 벳세다로 갔었을 터인데, 제자들의 마음 속 에는 가버나움보다 벳세다가 있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저들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가버나움으로 가기 위해 파도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이 성경 속에서 발견되어지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봅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꼭 이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면 풍랑이 입니다. 바람은 언제나 하나님 쪽으로 불지 아니하고 세상 쪽으로 붑니다. 때문에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리만큼 힘듭니다. 그러나 세상식대로 사는 것은 노 젓지 않아도 되리만큼 쉽고 편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가버나움을 향하여 노를 저어야 합니다. 풍랑과 싸워야 합니다. 풍랑과 파도를 두려워하지 말고 싸워야 합니다. 정면으로 돌파하여야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풍랑 이는 바다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그때 진정한 예수님과 제자 사이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저들은 기뻐서 예수님을 저들의 배로 영접하였습니다. 만일 저들이 뱃머리를 돌려 벳세다로 향하고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오시지도 않으셨겠지만 만일 오셨다고 해도 예수님 만난 것이 기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만났다고 해도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삶의 문제는 하나님을 만남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세상의 모든 문제는 다 해결이 됩니다. 제자들은 기뻐서 예수님을 배로 영접하였습니다. 예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을 배로 모셔드리자마자 풍랑은 잠잠해졌습니다. 배는 저들이 가려던 가버나움에 무사히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세상의 풍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우리의 삶 속에 예수님은 진정으로 영접해 드리면 모든 삶의 문제와 풍랑은 해결되고 잔잔해 질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때 처음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과 늘 함께 먹고 자고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진정한 만남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풍랑 이는 바다와 싸울 때였습니다. 그 이전에 저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만남이 없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생을 예수 믿는다고 하고 교회에서 살다시피 함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예수님과의 만남이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들은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직분을 받아 열심히 봉사를 하기 때문에 저들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인 줄로 생각하지만 착각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세상과 싸우고 풍랑과 싸우고 파도와 싸우는 삶의 현장에서만 이루어집니다. 풍랑을 두려워하여 도망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풍랑을 핑계 삼아 벳세다로 뱃머리를 돌린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풍랑이 일고 바람이 거슬려 불어도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발버둥질 치고 싸울 때 우리는 드디어 그곳에서 우리를 찾아와 ‘내니 두려워 말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만나면 드디어 우리는 모든 세상의 풍랑을 잠재우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풍랑과 싸웠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승리한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풍랑을 싸워 이길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요구한 것은 풍랑을 싸워 이길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풍랑과 싸우려고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생사를 걸고서라도 세상 식으로는 살지 않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믿음과 마음이 예수님을 만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모든 문제는 해결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세상과 싸워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골리앗을 이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능력이 되어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하나님의 능력을 이길 능력은 없습니다. 어떠한 세상의 풍랑도 하나님 앞에서는 다 잠잠해 질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는 자에게는 세상의 어떤 문제도 더 이상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 안에 있는 자에게는 어떤 환난도 곤고함도 박해도 위험도 칼도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5-39)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자신도 물위를 걷게 해달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이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풍랑 이는 바다에 내려섰을 때 베드로도 예수님처럼 바다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의심하고 풍랑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베드로는 바다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정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면 능히 베드로처럼, 예수님처럼 풍랑 이는 바다를 걸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그와 같은 믿음 주시기를 원합니다. 

저는 하나님께 능력 있음을 믿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힘들고 어려워도 주 안에 있으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하나님께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저는 요즘 나름대로 좀 힘든 삶을 살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좀 힘든 것이 아니라 많이 힘듭니다. 

힘들어서 힘든 것도 있지만 힘들어서 좋은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힘들지 않을 때 보다 하나님과 더 가까워진다는 것입니다. 성경과 찬송이 더 은혜스럽습니다. 찬송과 말씀이 3인칭으로 느껴지지 않고 1인칭과 2인칭으로 느껴집니다. 말씀과 찬송이 나의 말씀과 찬송으로 느껴집니다. 요즘 제가 열심히 마음으로 부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그것은 405장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라는 찬송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그 하나님의 팔에 안기면 모든 풍랑은 잠잠해지고 모든 삶의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 위하여 우리는 제자들과 같이 풍랑 이는 바다를 거스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싸워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오늘 말씀이 참 좋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저는 믿습니다. 세상을 이길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지 말고 싸워라. 핑계하지 말고, 도망하지 말고 싸워라.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라. 그리고 그 하나님의 품에 안겨라. 그리고 승리하라. 저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위로 오라’하신 말씀이 좋습니다. 우리는 모든 물에 빠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들이지만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산다면 그 물위를 걸을 수 있는, 모든 세상의 풍랑을 이길 수 있는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부족하지만, 저는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여러분들도 다 그렇게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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