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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역전에 필요한 5가지 (막 16: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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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역전에 필요한 5가지 (막 16:9-15)

< 인류의 희망봉 > 

옛날에 한 청년이 예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여인은 사람을 증명해 보라고 청년에게 별을 따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별을 따 주었습니다. 다시 여인은 청년에게 달을 따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달을 따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인이 청년에게 어머니의 심장을 꺼내달라고 있습니다. 

청년은 고민하다가 어머니의 가슴속에서 심장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여인과 행복하게 살 생각을 하며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어머니의 심장을 들고 뛰었습니다. 그러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심장이 저만치 굴러 떨어졌습니다. 그는 급히 심장을 다시 주웠습니다. 바로 그때, 흙투성이가 된 심장이 말했습니다. “얘야. 많이 안 다쳤니?” 

이 어머니의 마음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인간은 참 이기적입니다. 기회만 있으면 “달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장까지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향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에게는 항상 희망이 있습니다. 

부활절은 주님이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인류의 희망봉이 되시고, 우리에게도 다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신 날입니다. 그 희망이 있으면 아무리 힘들고 험난한 골짜기를 만나도 상관없습니다. 어딘가에 희망이 있다는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주님의 부활은 그런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 희망을 가지고 우리는 부활절을 영혼과 가정과 양심이 부활하는 날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요즘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지금 많은 가정이 힘들어하고,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행동도 사나워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의 말에 의하면 전 세계에서 제일 잘 짖고 가장 성질이 더러운 개가 ‘한국 개’라고 합니다. 그렇게 된 데는 한국 사람의 책임이 큽니다. 사람이 성질이 나빠지면 개도 성질이 나빠집니다. 

태국에서는 개 팔자가 상팔자입니다. 개가 거리 곳곳에 편히 누워 계시면 사람들은 개를 놀래지 않게 하려고 그 곁을 공손하게 지나갑니다. 유럽에서도 개들은 큰 대접을 받습니다. 영국 속담에는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아내는 내 원수, 자식은 내 주인, 개는 내 친구!” 그래서 유럽의 개는 도둑을 지키기보다는 인간의 고독을 지킨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유독 우리나라만 개가 사나울까요? 사람이 먼저 사납게 대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개를 아끼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대개 자기 개만 아낍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개는 먹지 못하니까 남의 개와 바꿔 먹습니다. 그리고 내 개가 아니면 돌멩이를 던지며 쫓아버립니다. 그러니까 개도 신경과민이 되고, 혹시 자기를 헤치지 않을지 항상 피해망상을 가지니까 사납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원래 개를 좋게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어에는 ‘son of dog’이란 말이 없는데, 한국에서는 그 말이 가장 흔한 욕이 된 것입니다. 

시골 동네에 가면 개가 졸고 있습니다. 낯선 사람이 와도 반갑게 맞이합니다. 그것은 그 동네가 평화롭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인심이 사나운 동네에 가면 견심(犬心)도 사나와집니다. 어떤 분이 혐오 시설을 유치한다고 매일 데모하는 동네에 갔습니다. 그러자 그곳 개들도 아주 사나웠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많이 사나워졌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복음이 배척당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때에 다시 한 번 성령의 바람이 불어 신앙과 양심과 인간성이 부활해야 합니다. 


< 인생역전에 필요한 5가지 > 

어떻게 우리의 삶과 영혼에 부활의 은혜가 나타나게 될까요? 사람이 부활의 은혜를 체험하고 인생역전의 주인공이 되려면 본문은 5가지가 필요함을 말해줍니다. 

1. 십자가 

부활의 은혜를 체험하려면 먼저 십자가 안에서 죽어야 합니다. 행복이 따로 없습니다. 십자가 안에만 있으면 행복해집니다. 십자가 안에 있으면 섭섭할 것도 없습니다. 자세히 생각하면 나를 섭섭하게 한 사람이 내게 베풀어주었던 것도 많고,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조금이라도 더 성장한 것입니다. 그처럼 내가 죽으면 다 살아납니다. 가정도 살아나고, 자녀도 살아나고, 무엇보다 내 영혼이 살아나게 됩니다. 

십자가 안에만 있으면 가정도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밥을 먹다가 돌이 씹혀도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합니다. 밥이 타면 “오늘은 맛있는 누룽지도 먹네!”라고 받아들이고, 밥이 질면 “오늘은 소화가 잘 되겠네.”라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니까 행복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십자가 안에만 있으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픈 배가 낳게 되고, 이웃 교회에서 교회 건축을 하면 축하해줄 마음이 생깁니다. 

십자가 안에서 이미 죽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감사거리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죽은 사람은 남의 약점을 보면 덮어주고 내가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하고, 남의 장점을 보면 칭찬해주고 나도 그렇게 되려고 합니다. 결국 십자가를 지려는 삶 안에는 모든 행복과 축복이 다 들어있고, 모든 성공과 치유가 다 들어있습니다. 또한 십자가를 지면 시간이 내 편이 되어줍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축복도 커지게 됩니다. 

2. 주일성수 

본문 9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그리나 기독교에서는 안식 후 첫날인 주일을 예배하는 날로 지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주일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일을 힘써 지키면 주님의 부활의 역사가 삶의 곳곳에 나타날 것입니다.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일이고 신앙의 제일 기본입니다. 왜냐하면 주일을 지키는 삶은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산다는 반증이고, 욕심을 내는 삶과 정반대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삶은 영적인 브레이크(brake)와 같습니다. 그 브레이크가 없으면 욕망을 향해 달려가다가 반드시 망하게 됩니다. 사람에게 브레이크 타임(break time)이 필요하듯이 브레이크 데이(break day)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행복하게 살려면 일할 때는 열심히 일하고 쉴 때는 확실히 쉬어야 합니다. 그처럼 삶에 여백이 있어야 영혼이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은혜도 넘치게 됩니다. 그런 여백의 삶을 훈련하는 가장 소중한 기초 훈련 도장이 바로 주일입니다. 그처럼 주일을 지키면서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 삶을 다시 조율하는 것은 인간을 지배하는 거대한 탐욕에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영혼의 댐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주일에 예배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시간을 삶의 제일 우선순위로 두십시오. 그 시간은 가장 소중하고 가장 복된 시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이자가 많이 붙는 은행이 바로 ‘주일성수’라는 은행입니다. 주일을 열심히 지키면 하나님 안에서 삶의 목적도 부활하고, 그 삶의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추진력도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가정과 직장과 사업과 인간관계도 반드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3. 겸손 

계속해서 본문 9절 말씀을 보십시오.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주님의 직계제자라고 뻐겼던 사람들도 다 사라지고, 주님을 메시야라고 쫓아다니던 사람들도 다 사라졌습니다. 대신에 몇 명의 여인들만 끝까지 골고다 십자가까지 따라갔습니다. 또한 인류 역사상 부활하신 주님을 최초로 목격한 사람은 일곱 귀신이 들렸던 전직 창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만나주시는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만나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겸손을 강조합니다. 시편 10편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응답 받는 기도를 드리려면 기도를 아름답게 잘 하거나 기도를 많이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겸손한 마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은혜를 받게 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또한 사람은 은혜를 받을수록 자기의 부족을 깨닫고 겸손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가장 위대한 전도자였지만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겸손은 은혜 받은 징표이고, 앞으로 은혜 받을 약속의 증표입니다. 이슬은 낮은 골짜기에 내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도 낮은 마음에 주어집니다. 

인도에서 사역한 스탠리 존슨이란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는 늘 하나님과 동행하며 천사처럼 살았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그의 모습을 보고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선교사님! 선교사님도 옛날 아브라함이나 바울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나요?” 그때 선교사님이 말했습니다. “저는 일생 동안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날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요.” 그가 영성이 없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 못한 것일까요? 

일전에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저는 평생 신비체험을 한 번도 못했습니다.” 그 고백이 부끄럽게 들리기보다는 오히려 아름답게 들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겸손함의 영성이 최고의 영성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함은 영혼을 아름답게 만드는 꽃입니다. 겸손하면 일단 기본점수를 따고 들어갑니다. 하나님도 그런 사람에게 점수를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겸손함이 존귀의 선도자라고 했습니다(잠 18:12).  

사실상 매일 성경을 읽고 하루의 첫 시간을 기도로 시작하는 사람이 산에 올라가서 신비한 음성을 듣는 사람보다 훨씬 더 복된 사람입니다. 겸손하면 행복도 깨지지 않습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흐르는 강물을 잡을 수 없다면 낮은 바다가 되어서 기다리라.” 모든 강물이 결국 낮은 바다로 다 흘러 들어옵니다. 그처럼 겸손함을 잃지 않으면 때가 되어 반드시 풍성한 축복의 물이 우리 삶으로 흘러 들어올 것입니다. 

4. 성령 충만 

본문 10-11절 말씀을 보십시오.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의 부활하신 소식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전했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본문 12-1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때 제자 중에 두 사람이 시골로 갈 때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그 말을 했지만 역시 그 말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본문 14절 말씀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이 11명의 제자가 있는 곳에 직접 나타나셔서 저희들의 믿음이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이렇게 믿지 못하는 모습이 성령 받기 전의 제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을 보면 그들이 성령 충만을 받은 후에는 자기의 목숨을 내걸고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합니다. 그 사실은 성령 충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알려줍니다. 사람 변하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악마의 가능성이 있고, 천사의 가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 충만을 목마르게 사모해야 합니다. 

일전에 저는 인터넷을 통해 보면 히틀러가 젊었을 때 그린 그림들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림 수준이 상당했습니다. 그 그림 중에는 1913년에 그린 작품이 있었는데 그 제목이 “Mother Mary with the Holy Child Jesus Christ(거룩한 아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성모 마리아)”였습니다. 화가를 꿈꾸고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를 그렸던 사람이 그렇게 악마처럼 변한 것입니다. 

또한 히틀러는 어렸을 때 얼마나 찬송도 잘하고, 성경 요절도 잘 외우고, 신앙도 좋아서 별명이 ‘꼬마 목사’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희대의 살인마가 된 것입니다. 성령님이 없으면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결국 행복의 원천은 환경과 조건/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있습니다. 성령 충만해서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경지가 되면 바로 그때 행복도 찾아오고, 삶에 놀라운 부활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5. 복음 전파 

본문 15절 말씀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첫 번째 명령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이 바로 복음 전파라는 말입니다. 특별히 이 구절에서 ‘온 천하’라는 구절과 ‘만민’이라는 단어에서 무엇을 느낍니까? ‘세계적인 비전(world vision)’과 ‘세계적인 관심(world concern)’을 가져야 함을 느낍니다. 

가끔 보면 어떤 사람들은 세계일주 배낭여행을 합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그런 꿈을 한번 꾸십시오. 나이가 들고 비용이 없어서 못하면 자녀를 통해 그 꿈이 이뤄지길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우리 자녀와 손자가 세계일주 배낭여행 한 번 떠나게 하소서!” 자녀에게 세계 일주여행과 같은 체험이 한번만 있어도 보는 시야가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그래서 시야가 넓어지면 삶의 지경도 따라서 넓혀지고, 또한 그런 자녀들이 결국 세계선교의 최고 일꾼이 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세계적인 관심과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얼마나 지구촌이 신음하고 있습니까? 전 세계 어린이의 3분의 1이 저녁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잠든다고 합니다. 또한 전 세계의 문맹률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태국을 갔습니다. 그리고 한 잡화점에서 10바트짜리 물건을 5개 샀습니다. 얼마냐고 물으니까 주인이 한참 생각하다가 계산기를 내어서 10 곱하기 5를 한 후에 말했습니다. “50바트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답답해서 혼났다고 합니다. 

어느 날, 아프리카의 나미비아에 있는 한 회사에서 직원을 채용했습니다. 그러자 15명이 지원을 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인터뷰를 했는데, 실장이 그와 인터뷰를 하고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자! 이제 마지막 질문을 하겠습니다. 3 곱하기 7은 몇입니까?” 그가 한참 생각하더니 대답했습니다. “네! 22입니다.” 

인터뷰가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 지원자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자기 계산기로 3 곱하기 7을 해보았습니다. 그러자 21이라는 숫자가 나왔습니다. 그는 크게 실망하고 “이제 떨어졌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주 후에 회사에서 합격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다음날 회사에 출근해서 실장에게 물었습니다. “실장님! 3 곱하기 7은 21이라는 문제를 틀리게 대답했는데 어떻게 제가 합격되었습니까? ” 그때 실장이 말했습니다. “자네 대답이 정답에 제일 가까웠네.” 

얼마나 심각한 문맹률입니까?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복음의 문맹률’입니다. 그런 현실을 항상 마음 아프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항상 어떻게 하면 잃어버린 자를 찾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전파를 위해 돈도 벌고, 능력도 키우고, 지식과 지위도 추구해야 합니다. 

요새 제가 네트영어를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사실 ‘복음전파와 선교’에 있습니다. 그래서 네트영어를 통해 영혼을 구원하고, 학생들의 영어 공부시간을 줄여주어서 나라와 민족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더욱 공헌하게 하고, 더 나아가 물질을 주시면 그 물질로 선교와 구제를 하려고 네트영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약 그런 목적이 없다면 목회자가 네트영어를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일입니까? 

며칠 전, 네트영어를 배운 한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이 이번에 전교에서 1등을 했다는 얘기를 그 어머니로부터 들었습니다. 그 학생은 작년 여름과 겨울에 2번의 특강을 모두 들었습니다. 특강을 2번 모두 들은 학생은 그 학생이 유일합니다. 2번째는 너무 잘 따라 해서 내가 말했습니다. “너는 내 제자가 될 수 있겠구나! 큰 꿈을 가져봐라.” 

두 번째 겨울특강 때는 자기 쌍둥이 친구도 데려왔습니다. 외국에 간 적도 없고 학원도 전혀 다니지 않는데 영어를 잘하니까 동네 친구 엄마가 물었습니다. “얘! 너는 학원도 안 다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영어를 잘하니?” 그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네트영어로 공부해서 그래요?” 그래서 겨울특강에는 친구들까지 같이 데려온 것입니다. 

지금도 계속 방대한 네트영어 자료가 축적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네트영어의 탁월성에 저도 놀랍니다. 네트영어로 공부하면 시간도 줄이고, 비용도 줄이면서 영어실력은 훨씬 좋아집니다. 그래서 영어에 목을 매달고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특별히 네트영어가 선교의 좋은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처럼 네트영어로 영혼도 구원하고, 하나님의 일꾼도 키우고, 선교와 구제를 많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생각만 해도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 구원받은 성도의 제일 목적 > 

어떤 일이든지 최종적으로는 복음전파 및 선교와 연결시켜야 합니다. 지금 나라 경제가 상당히 어렵지만 이런 때일수록 더욱 선교해야 합니다. 선교해야 복 받는 나라가 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영국에서는 빅토리아 여왕 때 가장 선교를 많이 했고, 미국에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때 가장 선교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나라가 가장 안정되었고, 도덕과 윤리가 반듯하게 섰고, 경제적으로도 부강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열심히 선교할 때 윤리와 도덕도 회복되고, 정치와 경제도 안정되고, 개인의 삶에도 놀라운 부활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전파를 위해서라면 물질과 시간과 땀을 결코 아끼지 마십시오. 아무리 다른 것에서 성공해도 복음 전파라는 목표에 성공하지 못하면 그것은 진짜 성공이 아닙니다. 

19세기의 미국 서부에 한 등대지기가 있었습니다. 그가 지키는 등대는 몇몇 가구가 살지 않는 바위가 많은 험지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씩 등대의 기름을 공급받았습니다. 그런데 가끔 동네 사람들이 기름을 구하러 그에게 왔습니다. 

어느 날, 한 마을 여인이 난방 기름이 떨어졌다고 기름을 조금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다음 날에는 한 남자가 집의 등불이 꺼졌다고 기름을 조금 달라고 부탁했고, 또 어떤 남자는 수레바퀴가 굴러가지 않는다고 기름을 조금 달라고 했습니다. 사정들이 다 딱해서 그들을 다 기쁘게 해주려고 그 등대지기는 등대에 쓸 기름을 그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새로 기름이 보급되는 날이 되기 하루 전에 그만 기름이 떨어졌습니다. 

기름이 떨어진 그날 저녁, 그는 등대에 불을 밝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 저녁에 비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몇 척의 배가 좌초되고 많은 인명피해가 났습니다. 나중에 정부 감사관이 조사를 나왔을 때 그가 말했습니다. “감사님! 저는 그 기름을 하나도 착복하지 않았습니다. 사정이 너무 딱해서 동네 주민들을 돕는데 썼습니다.” 그때 감사관이 말했습니다. “당신에게 기름을 준 것은 오직 한 가지 목적 때문입니다. 그 목적은 등대의 불빛을 계속 밝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영적인 등대로서 복음의 빛을 비추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없으면 그 삶은 알맹이가 빠진 의미 없는 삶이 됩니다. 결국 복음전파는 성공보다 중요하고, 자선보다 중요하고, 더 나아가 행복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도 부활절을 맞아 삶의 목표를 새롭게 하고, 특별히 인생 최대의 목적인 복음전파에 더욱 관심과 공을 들임으로 부활과 인생역전의 역사를 체험하는 복된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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