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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전도회 헌신예배] 대접받으려면 대접하라 (마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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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접받으려면 대접하라 (마 7:12)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본문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노인들은 대접받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을, 젊은이들을 대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인간관계를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대접하라"라는 말씀으로 교훈하십니다. 흔히 신학자들은 마 7장 12절 이 말씀을 「기독교의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황금률, 즉 신약성경의 모든 진리, 말씀 가운데 가장 귀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말씀이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좀 이해가 안 갑니다. 신약 성경에 나와 있는 수많은 말씀 가운데 왜 하필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이 말씀이 가장 고귀한 가치와 중요성을 가지는 황금률이라고 했겠습니까? 

신약성경에는 수많은 귀한 말씀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남기신 십자가상의 일곱마디 말씀이 신약의 황금률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는 이 세상 언어로 표현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정의이자 노래인 고린도 전서 13장의 말씀,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라는 이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말씀이 신약의 황금률이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이 말씀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흔히 하는 말인, 내가 싫은 것은 남에게도 하지 않겠다는 말과도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자 그렇다면 과연 도대체 무슨 이유로 마 7:12을 신약의 황금률이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먼저 산상수훈의 구조를 파악할 때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산상수훈은 첫머리인 5장 1절부터 오늘 본문 말씀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인 7장 11절까지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해서 다루었습니다. 다시 말해 5:1-7:11 까지는 주로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태도에 대해서 다루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최대 축복 선언 가운데 한가지인 8복 선언이라든가, 하나님께 기도함에 있어 주의해야 될 점이라든가 또는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이라든가 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해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마 7:7-12은 앞선 내용처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태도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인간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나아가 비 그리스도인들까지, 이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는 것이 올바른 가에 대해 다루고 있는 본문이라는 것입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자칫 경시되기 쉬운 부분인 인간관계 내지 윤리적인 부분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상수훈 전체에서 이 부분을 산산수훈의 가장 절정인 부분으로 즉 황금이라고 이름 붙힌 것이며 결국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관한 대원칙, 대명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황-금-률인 것입니다. 

먼저 "대접"이라는 것은 단지 먹는 것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대접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보통 음식을 만들어서 이웃을 불러다 놓고 대접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실제 그렇게 합니다. 물론 그것은 좋은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따뜻한 이웃의 정은 먹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도 역시 모일 때마다 예배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 교제를 통해 음식을 나누었다고 하는 것을 성경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 속에서는 그렇게 음식을 나누는 것도 가끔이지 매일 매일 일상화 될 수는 없습니다.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에서 가리키고 있는 대접하라는 말씀은 단순히 음식을 만들어 접대한다는 그런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들어 보십시오.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무슨 뜻입니까? 내가 남에게 받고 싶은 것만큼 정확하게, 그것과 똑같이 남에게 해주라는 그런 의미입니까? 이 말씀은 자기가 타인에게 기대한 만큼 타인도 자기에게 기대하고 있음을 각성시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는 이 말씀은, 서로의 권리만을 주장하고 앞세우지 말고 겸손하게 먼저 사랑을 행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내가 먼저 남에게 그렇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내가 그렇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간적인 것이 아니요, 늘 해야 할 문제입니다. 계속 되어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이 상대방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교회에서 함께 생활하는 성도들에게, 또한 여러분의 가정에서 함께 생활하는 가족들에게, 여러분의 일터에서 만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어떤 것을 원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남에게 원하는 것들은 동시에 남에게 먼저 해 주어야 할 것들은 다음과 같은 3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인정받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모든 사람은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도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인정받고 싶어하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정도와 방법이 각자 조금씩 다를 뿐, 누구라도 그 마음속에는 인정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러한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에게 야단을 치면 비록 어린아이라도 기분 나빠하고 불쾌해 합니다. 특별히 자기를 무시하고 모멸감을 주는 말을 듣게 되면 큰 상처가 됩니다. 그러나 작은 일이라도 인정해주고 칭찬해주면 그 아이는 좋아합니다. 이것은 비단 어린아이의 마음만이 아닙니다. 어른들도 똑같이 가지고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남에게 원하는 것, 남에게 인정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내가 먼저 상대방을 인정해 주는 것 바로 그것이 올바른 인간관계를 맺는 첫 번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을 먼저 인정해 주는 것이 남을 대접하는 올바른 방법입니다. 이것이 이웃사랑의 한 방법입니다. 내가 인정을 받으려면 내가 먼저 상대를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내가 실력이 좋아서, 내가 잘나서, 내가 남보다 특별한 것을 가졌기에 인정받으려고 한다면 착각입니다. 인정받으려고 하는 사람보다 인정해 주는 사람이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 용납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 허물과 단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외모에 약점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배경에, 어떤 사람은 성격에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밖에 학력, 물질, 인간관계 등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여러 면에서 여러 가지 약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약점이 없는 사람, 완벽한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에게는 단 한가지의 약점도 없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둘 중에 하나입니다. 즉 교만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거나, 살짝 돈 사람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단점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면에서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까? 또한 여러분은 그러한 약점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십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약점이 다른 사람 앞에서 드러나기를 바라십니까?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의 연약한 부분을 속속들이 알게 되기를 바라는 분 계십니까? 

한 집사님과 개인적인 일로 상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집사님은 다른 분들이 자신의 약점에 대해 소상히 알게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를 은폐하겠다는, 자신의 마음의 문을 닫겠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자신의 약점이 가려지기를 바라고, 또 남들이 가리워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분명 모든 분들이 이와 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나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도 자신의 단점과 실수, 잘못에 대해서 용납 받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용납 받기를 바란다면 다른 사람도 용납해 주어야 합니다. 즉 내가 먼저 용납하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을 올바로 대접하는 지혜로운 방법인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먼저 행하는 용기가 있을 때, 내가 용납을 받고 싶은 것처럼 내가 먼저 남을 용납할 때, 바로 거기서 평화가 이루어지며 화목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에베소서 4:2∼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됨의 힘은 화평입니다. 그런데 이 화평을 이루게 하는 요소에 대해서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서로 용납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특별히 용납하는 것이 있을 때 화평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셨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13절로 15절의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그렇습니다.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용납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화목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목케 하기 위하여 자기를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용납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평의 관계로 회복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서로 용납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용납하는 삶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용납하지 못했기에 상한 것이고, 용납하지 못했기에 구부러지고 비틀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용납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용납해 주신 것처럼, 다른 모든 사람을 용납해 주십시오. 그러면 모든 상하고 구부러지고 비틀어진 관계가 풀어지게 되고 펴지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이기에 더욱 더 용납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주시고 용납해 주신 그것을 가지고 우리 세광공동체 안에 용납하는 모습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렇게 서로 용납할 때 우리가 섬기는, 주의 몸된 교회 공동체 안에 진정한 연합이, 하나됨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를 용납하셨듯이 이제 나도 용납하는 사람이 되십시다. 용납 받기만을 원하지 말고 내가 먼저 용납하십시오.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의 정신입니다. 


셋째로, 대접하는 삶은 곧 섬기는 삶입니다. 

우리는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서 섬김을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있는 자리에서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교회 안에서 맡은 직분 가운데, 직장에서 가지고 있는 직위로서, 모두들 섬김을 받으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섬김을 받으려면 먼저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섬길 때 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것을 행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위에 군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의 선생이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섬기셨습니다. 마가복음 10:45에는 이러한 주님의 섬김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것이 주님께서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먼저 섬기셨습니다. 섬기심으로써 섬김을 받으셨고, 섬기심으로 귀한 열매를 거두셨습니다. 

대접과 섬김은 수단이 아닙니다. 대접을 받기 위한, 인정받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단지 마음이요, 지혜입니다. 우선순위입니다. 마음으로 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습니다. 수단과 방법으로 한다면 언제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남을 인정하고 용납하고 섬기는 모든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해야 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진정한 평안과 하나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라바바와 40인의 도적이라는 이야기를 보면 보물이 가득 담겨 있는 동굴의 문을 여는 비밀이 있습니다. '열려라 참깨'입니다. "열려라 들깨, 열려라 조, 열려라 콩---" 아무리 크게 소리를 질러도 결코 비밀의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비밀의 열쇄는 오직 하나 - '열려라 참깨'입니다. 

저금통장에서 돈을 인출할 때, 잠겨진 문을 열 때, 이 메일을 열람할 때에 꼭 비밀 번호가 필요한데 비밀번호는 오직 하나입니다. 

나의 인생이 가장 행복하고 가장 가치 있는 삶이 되려면 
우리의 가정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곳이 되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훈훈하고 인정 넘치는 곳이 되려면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장 아름다운 교회가 되려면 
그 비결은 오직 하나 법입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많은 법들이 있지만 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나 모두가 최고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귀한 법으로 인정하는 법이 있습니다. 사람들에 의하여 이 귀한 법이 황금률이라고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법 가운데 황금같이 귀하고 아름다운 법으로 불려지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룬 사람입니다. 

남에게 섬김을 받고 싶습니다. 그러면 먼저 남을 섬기라고 하십니다. 
남에게 칭송을 받고 싶습니다. 그러면 먼저 남을 칭송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습니다. 그러면 먼저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먼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고, 봉사할 때에 나도 그러한 사랑과 섬김과 봉사를 받을 수 있는 것이고. 이를 통하여 세상은 아름답고 포근하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우리 생활의 악세사리가 아니라, 삶의 일부가 아니고 전부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취미 생활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교회가 취미가 안 맞아 안 다닌다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은 취미 생활, 여가 생활이 아니라 우리 삶의 본질입니다. 

내가 먼저 상대방을 인정할 때 인격적인 대접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용납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음을 알고 용납해 주어야 화복하게 됩니다. 용납해 주면 화목으로 대접받습니다. 내가 섬김을 받고자 할때 사람을 섬길 때에 섬김을 받습니다. 내가 섬길 때에 섬김을 받습니다. 이것이 대접받으려는 자의 지혜입니다. 

나와 다르다고, 나보다 못하다고, 남을 정죄하지 말고 남을 인정하여 줍시다. 그것이 기독교인의 사랑의 실천이요 타인과의 관계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 바램대로 내가 먼저 그 사람에게 그렇게 행동합시다. 

남이 나를 이해해 주기 원합니까? 그렇다면 먼저 내가 남을 이해합시다! 
남이 나를 인정해 주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내가 남을 인정합시다! 
남이 나를 칭찬해주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내가 남을 칭찬합시다! 
남이 나를 높여주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내가 남을 높여줍시다! 

이것이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요, 황금률을 지키는 삶입니다. 말씀대로 살면 천국을 이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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