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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갚아주시는 하나님 (출 3: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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갚아주시는 하나님 (출 3:15-22)

요즘은 컴퓨터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없으면 불편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저도 아침에 새벽기도회를 마치면, 제일 먼저 인터넷에 들어가서 메일을 검색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합니다. 메일을 검색한 다음에는 가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일종인 ‘페이스북’에 들어가서 소식들을 봅니다. 적극적으로 글을 쓰고 댓글을 달고 싶어도 한번 그렇게 시작하면 시간을 많이 빼앗길까봐 그냥 가끔 눈으로만 보는데 이런 것을 ‘눈팅’이라고 합니다. 
지난 주중에도 한두 번 들어가서 보았는데, 주로 동료 목회자들의 이야기를 봅니다. 어느 목사님은 매일 일기를 쓰듯이 새벽기도회 본문은 무슨 말씀이었고, 설교는 무슨 내용으로 했고, 이런 것을 쓰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자기 가정과 주변의 소소한 이야기도 올리는 분이 있고, 또 어떤 분은 자신이 사진을 찍어서 올리기도 하고...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사용하는 목회자들이 나라와 지역을 초월해서 글을 올리니까 그것을 보면서 참 대단한 세상을 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주중에도 친구 목사들이 글을 올리면서 대화하는데 미국과 독일, 그리고 한국에 있는 목사가 대화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32년 전에 신학대학에서 처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던 당시가 떠올랐습니다. 처음 신학교에 입학해서 친구들과 대화를 하는 중에 기억나는 것은 어떻게 해서 신학교에 오게 되었는지를 이야기 한 것들이었습니다. 결국 그 핵심은 신학교에 올 때, 소명이 있었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소명(calling)’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을 말합니다. 제가 신학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 소명을 받아서 입학했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신학교에 들어가는 것도 이런 것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소명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그 결과를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출애굽기 3~4장은 모세가 소명 받는 장면입니다. 우리가 소명(부르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전도사님, 혹은 선교사님들에게만 소명이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일반 평신도들과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공부해 보면, 소명이란 결코 목사님, 전도사님, 선교사님들에게만 해당되는 편협하고 협소한 개념이 아닙니다. 소명은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다같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시지 않습니다. 지옥 안 가고 천국만 가면 되는 게 아닙니다. 그것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를 사용하시고자 하는 계획이 있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구원받은 자로서 한평생 주를 위하여 어떤 일로 내 인생을 소모할 것인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부르심(소명)’에 대해서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고전7:15~17) “...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 

이 말씀은 배우자가 신앙을 갖지 않았을 경우에 대한 말씀입니다. ‘부르신 그대로’, 즉 믿지 않는 남편이나 믿지 않는 아내를 주셨다면, 한평생 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소명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천하보다도 더 귀한 한 영혼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소명입니다. 그렇다고 믿지 않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일부러 결혼하면 안 되겠지요? 결혼은 구원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은 같이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만 어찌해서 믿지 않는 배우자와 살 경우, 소명감을 가지고 배우자를 사랑하고, 한평생 자신을 통해서 그가 주님을 알게 되도록 섬기면서 구원의 길로 인도할 때, 그것이 바로 소명을 이루는 삶이라고 바울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소명에 대한 말씀을 보는 중에 지난 주에 본 내용입니다. 호렙산 불붙은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고, 이삭의 하나님이시고, 모세의 하나님이시고, 또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 개인의 삶을 경영하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보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그들에게 ‘내려가서’, 그들을 ‘건져내고’,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다운 땅으로 ‘데려가려’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들의 나아갈 길을 경영하십니다. 

그리고 또한 13절에서는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14절에서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I AM WHO I AM\', \'나는 나다’, ‘나는 되고자 하는 대로 될 나일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를 경영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나눈 내용. ‘하나님은 경영자’, “하나님은 인생을 경영하신다”. 

이어지는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15절)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이제 하나님이 모세에게 구체적인 지침을 가르쳐 주십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렇게 말해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말해라’, 그리고는 16~17절에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으고 하나님의 계획을 설명하라고 하십니다. 이 계획은 앞의 7~9절의 내용의 반복입니다. 그리고 18절에 가서 장로들이 모세의 말을 들으면, 그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가서 말하라는 것입니다. 

(18절)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 길을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하라”, 

애굽 왕에게 장로들과 함께 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게 사흘 길 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구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앞으로 이스라엘은 제사를 통해 하나님만을 섬기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사흘 길은 애굽의 영향력과 통제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충분한 거리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은 중요한 2가지를 말씀하십니다. 

(19~20절)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가 가도록 허락하지 아니하다가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하나님이 바로 왕의 반응을 말씀하십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완악하고 고집이 세기에 이스라엘 가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이적(재앙)으로 친 후에야 보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여러 가지 이적으로 친 후에야 애굽 왕이 이스라엘을 보내도록 하셨을까요? 한두 번 재앙을 본 후에 고집을 꺾고 이스라엘을 내 보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애굽 왕은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서 국가 전체를 힘들게 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고집을 부리도록 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1) (9:12,10:27)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셔서 그 말을 듣지 않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계획대로 이루시게 된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것은 한 번에 끝나면 그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힌 것에 대해 갚을 수가 없으니, 끝까지 쓸데없는 고집(완악, 완강)을 부리게 해서 남은 매를 다 맞게 하신 것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셨습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백성을 괴롭힌 애굽에 대해서 하나님의 손으로 치신 것입니다. 

2) (21~22절)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나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여인들은 모두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거류하는 여인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의 자녀를 꾸미라 너희는 애굽 사람들의 물품을 취하리라”, 

이것은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빈손으로 떠나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게 해서 빈손으로 떠나지 않게 하겠다고 하셨습니까? 이것은 보상해주고 싶어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100여년 넘게 노예생활을 해왔기에 품삯을 받지 못했습니다. 강제노역에 시달리면서 그에 합당한 댓가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을 아신 하나님께서 밀린 품삯을 다 받아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챙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여인들은 이집트 여인들에게 은,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꾸미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 ‘애굽 사람들의 물품을 취하리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너희가 애굽 사람들의 물품을 빼앗아가지고 떠나갈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결국 그동안 손해보고 억울한 일 당한 것을 다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확하게 계산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갚아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해 보십시다. “하나님은 갚아주시는 분이시다”, 할렐루야! 

‘갚아주신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은혜나 원한 따위를 그에 상당하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애굽에 여러 가지 재앙을 내리고, 물품을 취하는 계획을 세우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학대받은 세월을 보상해 주시려고 그러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갚아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1. 갚아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면 실망하지 않고 희망을 꿈꾸게 됩니다. 

내가 믿음으로 진실하게 살면 하나님은 내가 당한 억울한 것, 원통한 것, 손해 본 것, 이런 것들을 보상해주시고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갚아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면 실망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집에서 아내와 무슨 대화 중에 아내가 묻더라고요. “당신은 왜 나와 결혼했어요? 얼굴이 이뻐서?”, “아니 얼굴이 이뻐서는 아니야”, 이 대답이 재앙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여자들은 왜 이러는 걸까요? 결혼한 지가 20년이 넘어도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런 이야기가 있죠? 어느 신혼부부가 있었습니다. 둘이서 TV를 보는데, 마침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하는 거에요. 그래서 TV를 보고 있는데, 아내가 다정스럽게 남편의 팔짱을 끼며 물었습니다. “자기야, 자기는 내가 저 7번 아가씨처럼 얼굴이 이쁘고 깜찍해서 결혼한 거야? 아니면 10번처럼 섹시해서 결혼한 거야?”, 그러자 남편이 대답했습니다. “응, 바로 그 유머 감각 때문이야”, 여자가 그 말에 엄청 삐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여자들은 왜 이러는 걸까요? 젊었을 때나 나이가 들었을 때나 예쁘다는 소리를 듣기를 원한다는 이 불편한 진실~ , 우리 집에서 그 일이 토요일에 있었습니다. 다음 날 주일에 많은 교인들이 그랬대요. “사모님은 참 예쁘세요”, 심지어는 어린아이들도 자기한테 예쁘다고 그랬다나 어쨌다나... 하루 종일 10여 명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대요. 그래서 나한테 받은 상처를 하나님이 갚아주셨다나 어쨌다나... 착각은 자유지만 이것이 우리 집의 대화 수준이라는 점~ 항상 내가 맞춰줘야 한다는 점~ 

창세기 29~30장을 읽어 보면, 야곱의 이야기 중에 자기 몫을 챙기는 대목이 나옵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를 얻기 위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14년을 무보수로 일합니다. 야곱의 외삼촌 라반은 훌륭한 일꾼인 야곱에게 무보수로 일을 시키려고 딸들을 가지고 야곱을 속였고, 품삯도 여러 번 변경해 가면서 주지 않았고, 또 야곱이 양과 염소 중에 검은 것, 아롱진 것, 점있는 것들이 생기면 자기 것으로 달라고 하자, 라반은 그날로 자신의 양과 염소 중에 검은 것, 아롱진 것, 점 있는 것들은 가려내어 자기 아들들에게 맡기고 그것들과 야곱이 치는 흰 색의 양과 염소 무리와는 사 흘길을 떼어 놓았습니다. 참 얄팍합니다. 이 얄팍한 라반과 야곱의 거래 대목을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이 다 보상받게 하셨습니다. 야곱의 억울함을 알고 계신 하나님이 다 보상받게 하셨습니다. 

오늘의 현실 속에서 여러분 가운데도 억울한 야곱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답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가면 야곱의 하나님이 억울하게 손해 본 것 다 회복하게 하십니다. 

누군가로부터 당한 일이 너무나 억울하고 끔찍해서 복수하고 싶은 심정이 불같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때 못 참으면 평생 후회 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이뤄놓은 믿음을 순간에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100년 넘게 손해 본 것까지 다 아시고 갚아주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갚아주시는 분이십니다.” 


2. 하나님이 갚아주신다는 믿음이 있으면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갚아주신다는 이 믿음이 있으면 함부로 안 살게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성경 사무엘하서(6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이 블레셋에 빼앗긴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겨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법궤를 제사장이 어깨에 매지 않고 수레에 싣고 오다가 소들이 뛰니까 웃사가 법궤를 붙들었는데,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웃사가 그곳에서 죽습니다. 그래서 그 법궤를 다 두려워하여 가져가지 못해서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모십니다. 그 일로 순종해서 법궤를 모시게 된 오벧에돔, 석 달 후에 하나님이 그 집에 복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 헌신에 보상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갚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이 100여 년 넘게 학대받으며 살아왔으면 복수심리가 얼마나 강했겠습니까? 그러나 그 마음 아신 하나님이 ‘내가 애굽을 칠 것이고, 너희 조상 적부터 밀린 품삯 다 챙겨줄께!’ 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 자신이 다 할 것이니 너희 손에 피 묻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백성이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전면에 나서서 직접 해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려고 하지 말고 갚아주시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저도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손해 본 일도 있고, 억울한 일을 당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목회하면서도 비난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비난 받아도 그것은 아니라고 적극적으로 해명도 못합니다. 정말 억울하고 눈물 날 일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만 아뢰고, 억울해도 참고, 손해를 보아도 당하기만 하고, 비난을 받아도 묵묵히 참고 견디니까 하나님이 위로해 주시고 저에게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중에도 누명 쓰고, 모함을 받고, 억울한 일, 슬픈 일 당하고, 정말 나는 옳게 하는데도 손해보고... 그런 일 당한 분 계십니까? 이 아픔을 더 이상 붙잡지 말고, 하나님께 올려드리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정확히 계산하셔서 갚아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갚아주시는 분이십니다” - 오늘이 종려주일이고, 이번 주간이 고난주간인데, 예수님이야말로 억울하게 고난당하신 분이십니다. 그 억울함을 하나님이 갚아주셨습니다. 

복음송,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먼 날 볼 수 있게 주내게 행하셨네~ , 호산나 호산나 죽임 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 

우리 주님은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기 위해 직접 억울한 고난도 당하셨습니다. 종려주일이요, 고난주간을 맞이하셔서, 갚아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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