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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하나님, 독생자, 믿는 자 (II) (요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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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독생자, 믿는 자 (II) (요 3:16)


톨스토이가 쓴 유명한 단편소설들 가운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미가엘이라는 천사가 지금 막 쌍둥이 딸을 낳은 산모의 영혼을 거두어오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세상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그 산모는 며칠 전에 남편까지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까지 죽으면 갓 태어난 두 딸도 죽을 수밖에 없는 정말 불쌍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가엘 천사는 하나님의 지시를 거역하고 말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다시 내려가서 산모의 영혼을 거두어오라고 명령하시면서 "네가 '사람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알게 될 때까지는 하늘나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라는 벌을 내립니다.
그 결과 미가엘 천사는 그 산모의 생명을 취한 후 즉시 날개가 꺾어지면서 땅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처럼 되어 버린 미가엘 천사는 그 후에 어떤 구두수선공 부부의 집에 살게 되면서 그 세 가지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을 하나씩 하나씩 깨닫게 됩니다.
그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우선 '사람의 마음에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사람은 자기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까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땅에 떨어진 지 6년이 지난 어느 날 그 집에 한 여인이 쌍둥이 여자애들을 데리고 왔는데, 미가엘 천사는 그 아이들이 바로 자기가 영혼을 거두어갔던 산모의 딸들이라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엄마가 없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쌍둥이 아이들이 살아남게 된 것은 그런 고아들을 제 자식처럼 사랑해 준 여인이 있었기 때문이며, 자기 또한 처음에 땅에 떨어져서 벌거벗은 몸으로 추위에 떨고 있을 때에 그 구두수선공 부부의 사랑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미가엘 천사는 그제야 깨닫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톨스토이는 그 미가엘 천사의 입을 빌어서 "사람은 자신의 걱정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랑'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곧 하나님 안에 사는 사람이다."라고 소설의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언뜻 매우 감동을 주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 톨스토이의 소설 속에는 아주 의미심장한 '함정'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곧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사람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사랑으로 산다.'라고 대답하지 않고 그 대신에 '사람은 사람끼리 서로 베푸는 사랑으로 살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놓았다.'라고 대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자나 후자나 비슷하게 들리지만 실제로는 아주 결정적인 차이가 있으며 사실상 정반대의 의미가 되고 맙니다.
톨스토이와 같은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바로 그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성경의 말씀을 '사랑이 곧 하나님이다'라고 슬쩍 바꾸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요한복음 3장 16절이 가르치는 기독교 복음의 첫째 원리, 즉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사역'이라는 사실을 함께 상고해 보았습니다.
피조물인 사람은 하나님을 스스로 알 길이 없고 찾으려 하는 마음조차 가지지 않게 되었지만, 오직 모든 면에 있어서 사람보다 월등하신 하나님 편에서 먼저 죄인인 인간을 사랑해 주심으로써 원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파괴되었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 참된 구원의 길이 비로소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떤 방법을 통해서 우리 죄인들을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은 이 질문에 대하여 '사람끼리의 사랑이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을 구원해 주는 것'이라고 대답해 줍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수난주간을 맞이하기 시작하신 '종려주일'입니다.
바로 이 날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마지막으로 입성하셨고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맞이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것과 같은 '정치적 군주'로서의 등장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당신의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최고의 사랑을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요한복음 3장 16절이 증거해 주는 두 번째 진리, 즉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2. '독생성자(獨生聖子)의 화육강세(化肉降世)'는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최대최고 표현입니다.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 편에서 전적으로 무능력한 인간을 향하여 스스로를 계시하실 수 있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 앞에 그저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으로, '전지전능하신' 창조주로, 혹은 '공의롭고 엄하신' 심판주로만 당신을 나타내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더라면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 즉 '두려워하는 존경심'만 가지고서 섬겨야 했을 것이고, 물론 그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경외의 신앙'이 자칫 '공포'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실로 '친근한' 하나님으로 나타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떤 식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잘 알고 사람들끼리 서로 나누고 있는 흔한 사랑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아주 특별하고도 신기하며 놀랍기 짝이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을 두고 본문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처럼"이라는 말은 '이것처럼'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토록 많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내용적으로 볼 때는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사랑하사'라는 뜻의 최상급이나 다름없는 단어인 것입니다.
즉 이 '독생자를 주심'으로써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은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사랑의 최대한도요 최고한계 그 자체인 것입니다.

"사랑하사"라는 단어는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아가페'라는 단어의 동사형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구약의 히브리어에서는 '헤세드'라는 단어를 통해 표현되었는데, 그것은 '인애, 자비, 동정, 관용' 등의 '사랑'에 관계되는 모든 의미들이 총망라된 것입니다. 
즉 이 '헤세드'는 하나님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가 한량없음을 뜻하는 함축적인 단어인 것입니다.
  
반면에, 신약의 헬라어에서는 '사랑'이란 의미를 가진 단어들이 매우 세분화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연정(戀情)은 '에로스'로, 우정은 '필레오'로, 그리고 가족애는 '스톨케' 등으로 구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이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그것이 '사람 사이의 사랑'들과는 확연히 다른, 아주 특별한 사랑이라는 것을 명백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가페 사랑'이란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바로 이 점이 사람이 알고 있던 다른 모든 사랑들과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구분해 주는 가장 큰 특징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이런 아가페 사랑이 선포되기 전까지는 '조건이 없는 사랑'이란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사실상 사람은 비록 서로 사랑한다고는 해도 항상 어떤 조건이 따를 때만 사랑할 뿐이었습니다.
'매력적인 이성'이라는 조건이 있어야 연애라는 사랑이 생기고, '마음에 맞는 친구'라는 조건이 있어야 우정이라는 사랑을 나누며, '핏줄이 가깝다'는 조건이 있기 때문에 가족애라는 사랑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사랑할 조건이 없는 대상에 대해서는 그저 '무관심'할 뿐이었지, 사랑할 만한 아무 이유가 없는데도 그냥 사랑을 베풀어 준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사랑스러운 조건이 없으면 없을수록 그런 대상은 더욱 멀리하고 더 나아가서는 혐오하고 미워하게 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도 그처럼 '사랑할 만한 조건이 있을 때만 사랑해 주는 사랑'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셨다면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당신의 사랑을 주실 만한 대상을 찾으실 수 있으셨겠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그 거룩하신 절대주권자께서 이 추하고 악한 죄인들을 보실 때 도대체 어느 한 구석이라도 사랑스러운 데가 있었겠습니까?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했으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조건이나 자격이나 이유를 갖춘 사람은 '단 한 명'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사랑스러운 면이라고는 어느 구석을 뒤져보아도 도저히 찾아 볼 수 없는 이 죄인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신 이유는, 그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조건 없이 사랑해 주시는' 아니 '악조건뿐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아가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말로도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무한한, 그처럼 사람은 전혀 알지 못했던 신비한 아가페의 사랑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까?
'완전타락'과 '전적무능력'에 빠져서 당신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조금도 깨닫지 못하는 이 죄인들로 하여금 어찌하든지 당신의 사랑을 알도록 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도대체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것이 바로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사건, 즉 성부 하나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이신 성자 예수님을 친히 이 땅에까지 내려 보내신 실로 경천동지할 사상 최대의 사건이었습니다.

이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씀은 우선 '성자'이신 예수님께서 '화육(化肉)'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원래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완전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신성(神性)'만 있으시고 사람은 물론 '인성(人性)'만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직 예수님만 '신인성(神人性)'을 가지고 계시� 유일무이한 존재이신 것입니다.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또한 그처럼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강세(降世)'하셨음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형체만 잠시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저 하늘 보좌 우편을 떠나서 이 땅에서 태어나셨고 사람처럼 이 세상에서 사시기까지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이라는 이 두 존재가 공존한 이래 하나님 편에서 사람이 되어 세상으로 내려오시고 그렇게 사시다가 다시 하나님의 처소로 올라가신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었습니다.
실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는 본문 13절의 말씀 그대로인 것입니다.

끝으로 이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씀은 그렇게 화육강세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제물'까지 되셨음을 가리킵니다.
원래 죄인이 죽었어야 할 그 십자가에 예수님께서 '죄인 대속을 위하여' 대신 달려 죽으셨던 것이고, 그것이 바로 '화육'과 '강세'를 통하여 시작된 예수님의 '비하(卑下)' 즉 '낮아지심'의 극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 같은 죄인들을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문자 그대로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부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처럼 전 우주의 역사상 단 한 번 행하신 이 '독생자의 화육강세' 사건을 통하여 당신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고 계시는 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말이 간단해서 '화육강세(化肉降世)'요 '비하(卑下)'이지, 그것이 실제로는 얼마나 어렵고 괴로운 일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이라는 지고하기 짝이 없으신 존재가 사람이라는 이 낮고 천한 존재로 스스로를 격하시키는 일이 그저 아무렇게나 말처럼 간단하게 될 수 있는 일이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자신을 그 하나님의 입장에 놓고 조금만 상상해 보아도 정말이지 만고의 무한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하실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에 '열대산호초 해수어(海水魚)' 키우는 것을 취미생활로 했었습니다.
그 어항의 '세계'는 구석구석 다 제 손으로 직접 '창조'되었습니다.
태초는 아니었지만 그 어느 날 6백 리터짜리의 어항을 받침대 위에 설치하고서는 그 속에 산호초를 깔고 바닷물과 똑같은 성분의 소금물도 만들어 넣어서 '천지(天地)'를 짓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후에 '해와 달과 별들'도 만들어야 했는데, 저는 할로겐램프와 형광등으로 대신 만들어서 '궁창'에 달았습니다.
또한 해초랑 산호랑 새우 등을 집어넣어서 '각기 종류대로 식물과 땅에 기는 것'들도 그 속에 살게 했습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는 바로 그 어항 속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해야' 할 물고기들을 작은 놈들부터 시작해서 점차 제일 큰 놈까지 이삼 주 간격으로 한 마리씩 넣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엿새' 동안에 창조하지는 못하고 총 '6개월'이나 걸렸지만, 다 만들어 놓고 제가 그 지은 모든 것들을 보니, 이름부터가 '파란 얼굴의 천사(Blue Faced Angel)', '불꽃 천사(Flame Angel)', '황금 테두리의 탱(Gold Rim Tang)' 등 화려하기 짝이 없는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그야말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였습니다.

그 후에도 저는 그 물고기들에게 온갖 정성을 다 쏟아 부으면서 그것들을 잘 키워 보려고 무척 애를 썼습니다.
수질, 수온, 먹이, 주거 환경, 물고기끼리의 이웃 관계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을 다 신경 쓰면서 그것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적어도 '애완(愛玩)동물'이라는 것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주인으로서 그처럼 사랑을 베푸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물고기들은 자기네가 살고 있는 어항이라는 세계를 만들어 준 주인이 누구인지 도무지 알지 못했습니다.
물론 제가 자기네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도 전혀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일용할 양식'을 매일 같이 제공해 주고 물속의 노폐물을 걸러주고 공기 방울을 통해 날마다 산소를 공급해 주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주인에게 감사할 줄 아는 '의로운 물고기는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였습니다.
  
자기 주인이 어항 가까이 다가오면 반갑다고 인사를 하기는 고사하고 '주인을 찾는 놈도, 깨닫는 놈도 하나도 없으며' 그야말로 '다 치우쳐 악을 행하는' 막돼먹은 물고기들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에 불과한 물고기의 시야와 물고기의 지능과 물고기의 양심만 가지고서는 그들 세계의 '창조주'가 되신 석기현이라는 존재를 도저히 알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수로 그 '파괴된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 물고기들에 대한 저의 사랑을 그것들로 하여금 알 수 있게 해 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 현실적으로는 아무 방도가 없지만, 만약 제가 무슨 '변신술' 따위를 행할 수 있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있습니다.
바로 사람인 제가 스스로 물고기로 둔갑을 한 후에 그 어항에 친히 들어가서 물고기끼리 통하는 어떤 의사전달 수단을 통하여 저의 존재와 그들에 대한 저의 사랑을 말해 주면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게 설혹 그런 능력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런 '화어강항(化魚降缸)'을 실제로 하겠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아무리 그것들이 사랑스럽다고는 해도 저 자신이 물고기로 둔갑해서 그 어항에 들어가서 살 마음은 꿈에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만물의 영장'인 제가 왜 자신을 '하등동물'인 물고기로 전락시키겠습니까?

저 자신도 물론이지만 제 아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저의 사랑을 증명해 주기 위해서 저의 외아들 영은이를 물고기로 둔갑시켜서 그 어항 속에 넣는다는 생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아무리 물고기를 사랑한다고 해도 그 '완전한 사람'이요 '저의 사랑하는 독자'를 그 '낮고 천한 물고기'의 형상으로 '비하(卑下)'시켜 어항 세계에 내려 보낸다는 것은, 더구나 거기서 '33년'이나 살게 한다는 것은, 더구나 마지막에 가서는 그 물고기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만든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바로 그처럼 도저히 생각조차 하지 못할 일을 실제로 하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이 그들을 얼마나 지극히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알게 해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그 완전하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자 예수님께서도 바로 그 성부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셔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까지 내려오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낮아지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사람의 기대나 짐작이나 상상을 완전히 초월하는,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시고 실행하실 수 있는 실로 '위대하고도 무한한 사랑', 그야말로 '최고최대의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되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정말이지 어떻게 이보다도 더 큰 사랑, 더 깊은 사랑, 더 높은 사랑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까지 해 주셨는데도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도대체 다른 어떤 더 좋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실 수가 있다는 말이겠습니까?
이 세상의 다른 그 어떤 종교에서도 이와 같은, 아니 이것과 비슷하기라도 한 복음은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가리켜 스스로 증거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14:9)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성자 하나님이신 까닭에, 우리가 그 예수님을 뵙게 되면 바로 하나님을 본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그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시면서 또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 외에 사람이 달리 참 신이신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길이나, 달리 구원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아무 데도 없다는 명백한 선언이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지금도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내가 곧 진리요"라는 예수님의 말씀 대신에 '진리가 곧 하나님이다.'라는 엉뚱한 도치법을 쓰기를 참 좋아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런 신학을 따르는 목사들의 설교를 들어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는 성경을 인용하면서도 그 해석이나 적용에 가서는 '사랑이 하나님이다.'라고 은근슬쩍 바꾸어 버리는 것을 정말 흔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주어'와 '술어'를 뒤바꾸어 버리는 궤변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대신에 '세상이 하나님을'이라고 '주어'와 '목적어'의 순서를 바꾸어 버리는 자들은 여기서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하나님이다.'라는 말은 '사람 사이에서 완전한 사랑이 구현되면 그것이 바로 신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甄�.'라는 뜻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하지 않고 '사람의 사랑'에서 출발하는 것이니 곧 '인본주의 종교'요 '귀납법적인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독생자까지 대속제물로 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사람끼리 서로 이해하고 도와주는 정도의 사랑'으로 끌어내리고 동일시하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신성모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배고픈 사람에게 떡 한 덩이를 주는 구제'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 사회에서 소외된 모든 자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는 박애정신'으로 나타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에서부터 비롯되는 '부차적인 사랑'들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십자가 대속의 사랑'을 빼버린 '나머지 사랑'만을 두고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인 것처럼 가르치고, 더 나아가서는 '사랑'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인 것처럼 실로 교묘하게 오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분명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하)라고 선포하고 있지 그 어디에도 '사랑은 하나님이다.'라고 한 곳이 없습니다.
성경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라고 명백히 증거하고 있을 뿐입니다.
  
즉 진짜 하나님의 사랑은 '지옥 영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화육강세시키시고 십자가에까지 비하시켜 주신' 바로 한 가지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위대하고도 고맙기 짝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감동할 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가 아닌 것입니다.

사람을 살게 해 주는 것은 톨스토이와 같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사람끼리 서로 주고받는 사랑'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통하여 사람에게 일방적, 무조건적으로 주시는 내리사랑'만이 사람을 구원해 줄 수 있습니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강세'야말로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에게 베풀어 주신 최고최대의 사랑 그 자체임을 확실히 깨닫고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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