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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어떤 무리들인가? (눅 23: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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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무리들인가? (눅 23:13-25)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넘겨준 것은 총독 빌라도다. 빌라도의 재판은 올바르지 못했다. 그러나 그 빌라도의 재판에서 판결에 영향을 준 것은 다수의 무리들이다. 눅23:18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눅23:21 “그들은 소리 질러”, 눅23:23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여기서 빌라도의 재판의 도를 꺾고 자기의 뜻대로 끌고 간 이들은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하나가 되어 있다. 무리의 힘이란 무서운 것이다. 무리가 폭도가 되면 통제가 어렵고 무리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면 조용하게 만들기 어렵고 무리의 힘이 작용하면 법을 바꾸고 권력을 바꾼다. 그러므로 무리가 선한 무리냐, 악한 무리냐가 중요하다. 

여기 본문에 나오는 무리들은 어떤 무리들인가?  

1. 무죄 선고를 못하도록 하는 폭력의 집단이다. (눅23:23)

눅23:23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예수를 십자가 처형에 내어주지 않고 무죄 선고를 하여 놓아주려는 빌라도 재판의 도를 다수의 목소리가 이겼다는 말이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관리들, 백성들을 다 불러 모으고 저희들이 상고한 사건-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의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다고 말하고 눅23:16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고 선고한다. 

빌라도는 확신을 가졌다. 예수는 죄 없는 분이다. 빌라도는 무려 3차에 걸쳐서 예수를 방면할 주장을 하고 무리들을 설득하게 한다. 빌라도의 노력은 심리학적인 대중 정서를 이용한다. 빌라도는 예수가 무죄하지만 그 죄 없는 예수를 채찍으로 때려서 놓아주겠다고 하면 무리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죄 없는 이를 채찍으로 때리는 것! 쇳조각을 붙여 놓은 채찍에 의해 살점이 찍혀 떨어져 나가는 것은 무서운 체형의 하나다. 

빌라도가 예수를 채찍으로 때린다는 것은 무리들의 심정에 동정심을 발하게 하여 죽음을 면케 하자는 설득이었다. 몸에서 피가 터져 나오고 괴로움과 신음 소리가 나면 성난 대중들의 노가 풀리고 가학적 매커니즘을 즐기게 되므로 총독의 판단에 호응할 줄 알았다. 그러면 예수는 풀려나게 되고 대중의 성난 동요도 잠재우게 된다. 

그러나 그럴수록 다수의 무리는 더욱 더 악랄해져 갔다. 무리들은 예수를 죽이라고, 더욱 더 더욱 더 크게 재촉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결국 무리의 소리가 빌라도를 이겼다. 빌라도의 인간적, 정치적 잔꾀는 무리의 함성 속에 빨려 들어갔다. 소리가 의와 올바름을 압도할 때 망가지고 무너지는 세상이 된다. 다수의 함성이 원리를 압도하면 총독도 로마의 법도 어쩔 수 없다. 재판 조차도 불의로 막을 내리게 만들었다. 무리들은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이다.  

2. 더러움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집단이다. (눅23:18)

무리들은 “바라바를 놓아주소서.”라고 외친다. 무리들의 힘은 의롭게 쓰여지지 않는다. 무리들이 힘을 합하여 정의를 세우고 평화를 세우고 사람을 살리면 좋은데 여기 무리들의 힘은 악한 자의 편이 되고 악한 자를 지지하는데 쓰여졌다. 

바라바는 누구인가? 눅23:19을 보면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였다. 

마27:16에서는 “유명한 죄수”라 하였다. 무리들의 선택과 기준은 더러워져 있었다. 다수가 소리를 발하여 내는 힘을 가지고 행악자에게 바치는 더러운 힘이 되었다. 결코 놓아주어서는 안될 폭도요, 살인자를 풀어놓자고 선동하였다. 이렇게 보면 무리의 판단은 잘못된 선택을 한다. 감정과 미움에 사로잡혀 도덕적 기준과 선에 기울어져야 할 기본적 양심을 버리고 더러운 선택을 한다. 이성을 잃은 무리들은 모든 것을 썩고 냄새나게 만드는 누룩이다. 더러운 힘이다. 무리는 악을 더 선호하는 어리석은 집단이다.  

3. 진리를 깨버리는 파괴의 집단이다. (눅23:24~25)

무리들의 소리가 더 강력해지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할 때 빌라도는 포기한다. 눅23:24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눅23:25 “그들이 요구하는 자” 바라바를 놓아주기로 했다. 결국 예수를 십자가 형에 넘긴 것이다. 다수는 잘못 굴러가면 파괴적이다. 의로운 생명을 못 박는다. 무죄한 사람을 못 박는다. 어둠을 밝히러 온 빛을 깨버린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죽음으로써 생명을 꺼버린다. 

어디서 이런 무리들이 모아졌는가? 이런 떼거리 패가 모아졌는가?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인가? 아니면 예수를 좇던 자들의 변질인가? 여하튼 선동의 외침이든, 여론의 힘이든 무리들이 나타났다. 오직 진리를 죽이고 진리의 등을 깨버리는 힘을 발휘했다. 그러고 보면 민중, 다수의 무리는 하나님의 역할을 해서는 안된다. 여론이 선이고 민중이 선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다수의 무리, 다수라고 해서 옳은 것이 아니다. 다수결, 민주주의라고 해서 가한 것이 아니다. 다수가 거룩을 위해 외치고 죽음을 떠밀어내기 위해 소리를 지른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수의 무리는 왜 어리석은 선택만 하고 있는가? 빌라도를 꺾고 악한 자에 편들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던지는 일을 만들고 있다. 여기서 무리는 다수의 무리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지 못하나 성경이 증언하는 다수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사단의 최대 무기는 죽음이다. 죽음은 인류의 원수다. 죽음은 희망을 빼앗아간다. 살아야 할 이유마저 가져간다. 이 땅에 나를 살리러 오신 주님은 사망의 원수를 해결하기 위해 죽음에 자신을 던졌다. 죽음을 해결해야 진정한 소망, 진정한 믿음, 진정한 사랑이 열린다. 사탄은 죽음으로 모든 것을 끝을 내려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음에서 예수를 생명으로 일으키어 우리의 사망의 대속을 완성시키셨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수는 죽음에 진리이신 예수를 못 박게 하므로 승리한 줄 알았다. 더 이상 예수의 빛이 자신들의 어두움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라 착각하였다. 여기 다수는 그런 의미로 예수를 상하게 하는 마귀의 앞잡이다. 무리의 뒤편에서 역사하는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이다. 무리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를 때가 많다. 그래서 사탄의 도구로 쓰여지고 사탄이 된다. 엡6:12에 나타난 사탄의 편제는 정사와 권세,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악한 영들이다. 사탄은 정사와 권세를 통해 특정한 지역, 특정한 집단에 영향을 주는데 다수의 힘이 어리석을 일에 쓰이고 가치 없는 일에 분노하고 몰입하게 만든다. 다수가 모두 힘을 합해서 죄에서 거룩해지고 진리와 의와 사랑으로 하나님 나라에 쓰이면 얼마나 좋은가? 사탄이 놀고 있지 않기에 다수는 불법, 불신, 불의, 불선으로 간다. 

막5:3을 보면 무덤 사이에 거하는 거라사인이 나온다. 쇠사슬로 매여놓아도 맬 수 없고 힘이 얼마나 센지 묶어둘 방법이 없다. 거라사인은 밤낮 무던 사이에서, 산에서 소리를 지르며 자기 몸을 돌로 상케 하고 있다. 귀신 들린 거라사인의 특징이 소리와 힘이다. 오늘 다수의 무리의 특징이 무엇인가? 소리와 힘이다. 거라사인과 다수의 무리가 비슷하다. 아니 똑같다. 

그런데 예수께서 막5:9에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 묻는다. 그때 거라사인은 자신의 이름을 군대라고 말한다. 즉 로마 군대의 여단 규모의 레기온이라고 말한다. 이 레기온이란 뜻이 무엇인가? 바로 “우리가 많음이니이다.”라는 다수의 뜻이다. 아! 여기 다수란 무리의 정체가 나와 있다. ‘Crowd’란 말이다. 거라사인 속의 귀신은 예수님에게 그 정체가 드러나고 결국 예수님에게 쫓겨나서 산비탈의 큰 돼지 떼에 들어가 바다로 내리달렸다. 그 돼지 떼의 수가 2,000마리였는데 귀신이 그 2,000마리에게로 들어갔다. 그때 군대 귀신이 들렸던 거라사인의 정신이 온전하여졌다. 2,000의 수가 되는 귀신,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오늘 이 다수의 무리를 군대 귀신에 사로잡힌 이들이 예수를 결국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대결의 장소다. 고통과 아픔, 저주와 형벌 뒤편에는 하나님과 사탄이 부딪힌 대결의 자리다. 나의 구주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사탄을 멸하고 부활의 주님으로 승리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음과 대결하신다. 그 우주적 대결의 장소, 햇빛도 빛을 잃고 땅이 진동한 그 해골의 언덕의 십자가!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예수님이 두려움 때문에 죽음을 도피하여 내려오셨다면 우리는 죽음의 무덤에 갇혀 소망 없이 살게 되었을 것이다. 

마27:40~42을 보면 지나가는 자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이 외친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내려오면 믿겠노라.” 

오늘 우리가 믿음, 소망, 사랑을 가지고 사는 것, 죽음의 원수를 넘어 하늘의 영원을 향해 사는 영생의 삶을 사는 것은 주님이 십자가 대결을 했기 때문이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견디고 참고 매어달리심으로 죽게 될 우리가 저를 믿음으로 자유와 의와 생명이 주어졌다. 주님은 십자가에 자신을 죽음의 재물로 내어놓음으로 이기셨다. 원수가 진리를 쫓고 오류를 선택할 때 저주와 조롱을 받음으로 이기셨다. 

놀라우신 주님, 나를 위해 그 모든 사탄의 공격을 받으신 주님! 나를 향한 사랑 때문이다. 나를 구원하고 인류의 원수를 패배시키기 위해 자신을 죽음에 던지셨다. 그리고 사탄은 패하였다. 주님의 부활의 발에 사탄은 완전히 머리를 밟혔다. 

요일3:8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주님 때문에 이제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마귀의 자녀들은 힘을 잘못 사용한다. 폭력이 되게 하고 더러운 악의 선택을 하게 하고 진리를 깨버리는 어둠의 힘이 되게 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 믿는 자의 무리는 바르게 힘을 사용한다. 

요일3:10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우리 믿는 무리들은 다수이지만 사탄의 종이 아니다.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무리로 산다. 그것이 주님의 몸된 교회다.   

사순절 십자가에 흘리신 주님의 보혈로 우리의 가정과 교회를 거룩하게 하자. 우리의 머리는 주님이시다. 우리의 지도자는 주님이시다. 더 이상 사탄의 종노릇 하는 악한 무리들이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가 교회되는 것,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십자가에서 이기신 주님께 붙어 있는 것이다. 거룩한 무리가 되라. 사탄의 왕국에 끌려가지 않는 하늘 백성이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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