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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도신경⑧ - 장사한지 사흘 만에 다시 사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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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⑧ - 장사한지 사흘 만에 다시 사신 예수님을 믿습니다.(마 28:1-10)

기독교 신앙은 땅의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현세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내세를 보는 것입니다. 다음 주는 부활주일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이 아니라 부활 후에 들어갈 세상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연설가 하르난은 때때로 어릴 때의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키가 아주 크고 뚱뚱한 쟈크와 매우 날씬하고 왜소한 필립과 자기가 레일 위를 누가 더 멀리 걸어가는지 내기를 했답니다. 그는 ‘몸집이 큰 쟈크는 얼마 못 가 떨어질 테니 나의 적수는 저 날렵한 필립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자기와 필립은 몇 발자국도 못 가 떨어지고 그 뚱뚱한 쟈크만 계속해서 레일 위를 걸었답니다. 그것도 그냥 걷는 것이 아니라 달리듯이 빨리 걷는 쟈크를 보고 놀라서 물었답니다. “쟈크, 너는 어찌 그리 잘 걸을 수 있어?”, “너희들은 아래를 보고 걸었지만 나는 먼 곳을 보고 걸었기 때문이야. 아래 보지 않고 멀리 보며 가니 이렇게 걸을 수 있는 거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만 보지 말고 미래를 봅시다. 그리고 현세만 보지 말고 내세를 봅시다. 그것이 신앙생활을 성공적으로 하는 비결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가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건물을 세워놓고 기둥을 치워버리면 건물이 무너집니다. 기둥이 건물을 지탱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신앙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없애버리면 기독교신앙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제거하면 그것은 기독교신앙이 아니라 윤리와 도덕에 불과한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교리가 기독교 신앙을 지탱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믿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와 축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의 핵심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 고전 15:1-4을 통해서 자기가 고린도교인들에게 전한 복음을 말하면서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말하므로 복음의 핵심이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가르쳐줍니다. 

또 성경 롬 1:2-4을 보면 복음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한 것이라고 하면서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역시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건강한 기독교 신앙은 주님의 부활을 믿으며 또한 자신의 몸이 부활할 것을 믿는 신앙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부활신앙은 너무나 중요한 교리입니다.
   
만약 기독교의 교리 중에 부활이 빠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바울 사도는 성경 고전 15:17,18에서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믿음이 헛되고, 믿는 자들이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없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부활에 대한 확신이 충만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부활의 주님을 전하기 위해서 자기의 목숨까지 내놓았다던 것입니다.
   
성경 행 17:18을 보면 사도바울이 철학자들과 변론을 하는데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했다고 말합니다. 또 성경 행 23:6에 보면 바울이 유대인들 앞에서 변론을 하면서 자신이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고 말합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셔서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 죽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도 죽음을 이기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성경 고전 15:22,23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은 무덤을 깨드리시고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 고전 15:51,52을 보면 주님이 재림하실 때 마지막 나팔 소리가 들리게 됩니다. 이 때 믿는 자들은 순식간에 갑자기 변화됩니다. 이 때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살아 있는 자들도 변화 될 것입니다.
   
주님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또한 우리를 죽음 가운데서 살리실 것입니다. 성경 롬 8:11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주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 중에는 주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음이 확실해야 부활도 확실해지는데, 죽음을 부인하여 부활을 부정하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몇 가지 이론을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먼저 기절설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아니라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성경은 기절설을 부인합니다. 병사들이 주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는데 물과 피가 쏟아졌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서는 피만 나오지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미 죽으셨기 때문에 물과 피가 쏟다져 나온 것입니다.
   
다음은 시체도난설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다 숨겨 놓고 부활했다고 거짓말 했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주님이 잡히시자 다 도망을 쳤던 제자들입니다. 심지어 수제자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었는데 그런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경비들이 지키고 있는 무덤에 가서 주님의 시체를 훔칠 수 있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또 하나는 무덤오인설이 있습니다. 여인들이 주님의 무덤을 찾아간 시간이 새벽이라 어두워서 잘못 찾아갔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럴리도 없지만 혹시 그랬다 하더라도 금세 밝혀졌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환상설이 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너무 사모한 나머지 환상을 본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것도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500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이기도 하셨는데 500여 형제라면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합친다면 족히 2,000명은 될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환상을 봤다는 것은 억지 주장입니다.
   
오늘 설교는 부활하신 주님이 만나 사람들을 통해서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누구를 만나셨느냐는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이 이 세상에 단 40일만 계셨는데 그 때 누군가를 만나셨다면 그 만남이 굉장히 중요한 만남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장사한지 사흘 만에 다시 사신 예수님을 믿습니다.”입니다. 이렇게 제목을 잡은 것은 지금 주일마다 계속해서 사도신경을 나누기 때문에 사도신경의 고백을 따라 제목을 잡은 것입니다. 설교의 제목을 오늘 설교 주제에 맞게 잡는다면 “부활하신 주님은 왜 사람들을 만나셨는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누구를 만나셨으며 왜 만나셨는지를 통해서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1, 주님을 사모하라는 교훈입니다. 
  
본문에 보면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들려서 고통을 당하다가 주님을 만나 치료되었습니다. 그녀는 치료된 이후에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을 따라 다니면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골고다 언덕까지 따라갔던 제자는 사도 요한이 유일했습니다. 사도 요한 외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여자들이었습니다. 그 여인들 중에 막달라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그녀는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함께 있기를 사모했던 사람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이 죽으신 후 가장 먼저 무덤에 갔던 사람입니다. 주님이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그 다음 날은 안식일입니다. 아마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이 죽으신 다음 날이 안식일이 아니었다면 이틀째 되는 날 주님의 무덤에 갔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무덤에 갈 수 없었던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무덤에 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녀의 이런 행동을 통해서 그녀가 주님을 만나기를 얼마나 사모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만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을 만나기를 사모하십시오. 왜 사모해야 합니까? 주님은 사모하는 사람을 만족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시 107:9입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제가 아내와 연애할 때는 아내 만나기를 많이 사모했습니다. 제 사모함 때문에 저희는 자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방이동에서 전도사 생활을 했고 제 아내는 풍납동에 살았습니다. 아내의 직장은 한강 건너 구의동이었습니다. 저는 날마다 아내를 만나기 위해서 아내 직장 앞에서 근무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저는 예배가 없는 날이면 언제나 회사 앞으로 찾아갔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단 한 번도 아내가 저를 회사 앞에서 기다린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항상 제가 먼저 가서 기다렸습니다. 

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함없이 아내를 기다렸습니다. 그만큼 제가 아내 만나기를 사모했습니다. 회사 앞에서 만나면 둘이 버스를 타던지 아니면 걸어서 한강을 건넜습니다. 우리의 데이트 코스는 주로 한강고수부지나 성내역과 아산병원 사이 뚝방이었습니다. 뚝방길을 몇 번씩 왕복하고 밤이 늦으면 집에 바래다주었습니다. 집 앞에서 해어지기가 아쉬워서 아내 집 앞에 있는 영파여고를 돌았습니다. 한 바퀴만 돌고 해어지자고 말했지만 돌고나면 아쉬워서 돌고, 돌고 또 돌았습니다. 시간이 너무 늦어 할 수 없이 아내를 집에 보내주고 교회로 돌아가려고 하면 이미 버스는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거의 항상 걸어서 교회로 돌아갔습니다. 제가 교회에 들어갈 시간이 되면 아내가 전화를 합니다. 그러면 또 몇 시간 씩 통화를 했습니다. 너무 늦게 까지 통화를 해서 새벽기도 시간에 일어나지 못한 때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만큼 서로 함께 있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제가 아내를 만나기를 사모했던 것 같은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만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간절하기 때문에 주님을 찾고 찾다가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제가 첫 은혜를 받았을 때는 정말 간절히 주님만나기를 원했습니다. 제가 첫 은혜를 받았을 때 저는 교회 성가대 의자에서 잠을 잤습니다. 성가대 의자에서 잠을 잤던 것은 우리 집에 잠자리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주님을 만나고 싶어서였습니다. 

저는 새벽에 주님을 만나고 싶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1시간 정도 읽고 학교에 갔습니다. 학교에 가면서 길에서는 기도하고 버스를 타면 사람이 많을 때는 기도를 하고 사람이 없으면 성경을 읽었습니다. 학교에 가면 기도하고 수업을 들었고 수업시간에도 성경이 읽고 싶어서 책상 속에 성경을 펼쳐놓고 틈나는 대로 읽었습니다. 쉬는 시간에도 성경을 읽을 때가 많아서 친구들이 ‘마목사’라고 불렀습니다. 방과 후에는 교회로 가서 기도하고 기도를 마친 후에 집으로 가서 밥을 먹었습니다. 밤을 먹고는 교회로 가서 성경을 읽고 기도했습니다. 제가 공고를 다녔고 자격증을 따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주님 만나는 일에 모든 것을 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드리는 모든 예배를 다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배 후에는 친구들과 기도회를 했습니다. 토요일에는 학생예배를 드리고 친구들과 기도회를 한 후에 삼각산으로 기도하러 가서 밤을 꼬박 새워가면서 기도했습니다. 주일에는 새벽에 잠간 눈을 붙이고 주일학교 어린이들 심방을 하고 주일학교 예배를 드렸습니다. 주일학교 예배 후에는 학생예배, 주일오전예배, 주일학교 오후예배, 교사기도회, 저녁예배 그리고 친구들과 기도회를 했습니다. 꼬박 철야를 하고 잠간 눈을 붙이고 하루 종일 교회에서 사역하다 보니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그런데도 저는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에너지가 그렇게 넘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 저는 은혜가 충만해서 예배시간마다 눈물을 흘렸고, 어떤 때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저와 같은 식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고 감격해서 울고 웃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혜를 받으면 그렇게 열심히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때는 주님을 만나는 체험이 많았습니다.
   
요즘 주님은 짝사랑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만나시기를 원하시지만 요즘 한국교회 교인들의 신앙은 주님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나만 바라보는데 나는 주님을 보지 않고 자꾸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가장 먼저 막달라마리아를 찾아가신 것은 주님께서는 주님 만나기를 사모하는 사람을 만나주신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성경 잠언 8:17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간절히 찾는다는 말은 사모한다는 말입니다. 주님 만나기를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2. 부활의 증인되라는 교훈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난 3년간 주님을 좇으며 훈련을 받았던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들을 찾아가신 이유는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부탁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 20장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두 번이나 평강을 비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있을지어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주님은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야 할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경 행 1:8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제자들이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부활의 믿음을 주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부활의 증인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정오의 빛보다 더 강한 빛으로 바울을 만나주셨습니다. 바울은 강한 빛에 의해서 눈이 멀어서 사흘을 밤낮으로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사흘 후에 아나니아를 통해서 안수를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이 사건이 있고 난 후에 바울이 무엇을 하였는가를 보여줍니다. 행 9:19,20입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바울이 아나니아를 통해서 성령을 받고 치료를 받은 후 했던 일이 무엇입니까? 즉시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수많은 주님의 명령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명령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것을 흔히 지상명령(至上命令)이라고 말합니다. 지상명령이 무슨 말입니까? 지극히 높은 명령으로 우리가 반드시 따라야 하는 명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지상명령이 무엇입니까? 성경 마 28:,19,20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중에 한철하 박사님이라는 분이계십니다. 제가 석사 과정을 공부했던 학교에서 총장도 하셨던 분입니다. 그분은 대단한 효자였습니다. 미국에서 유학하는 동안에도 어머니께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보냈답니다. “어머니, 오늘은 ○○ 공부를 했고 ○○○을 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어머니, 기도 감사합니다…….” 그렇게 효자이시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대학총장까지 하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분의 외아들이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님이 되기 위해 신학대학원에 들어가 공부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교회 청년회에서 수련회로 제주도에 갔는데 거기에 함께 갔다가 물에 빠져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그렇게 되니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박사님이지만 휘청했습니다.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신학박사지만 시험이 찾아오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면 어찌 하나뿐인 내 아들이 물에 빠져 죽도록 그냥 두시나? 어찌 이런 일이 있나? 더구나 목사가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아들인데’ 그런데 장례식을 하러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갑자기 마음에 평안이 오더니 천국에서 희희낙락하는 아들의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그 그림을 보고나니 아들이 제주도 앞바다에 빠져 비참하게 끝난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귀하고 기쁘게 있다는 확신이 왔습니다. ‘오, 주여! 그렇군요. 내 아들이 바다 속에 있지 않고 천국에 있군요. 그래, 내 아들은 천국에 있다. 슬픔을 이기고 장례식을 잘 마치자. 아들 몫까지 내가 더 잘해야 되겠다.’ 그래서 박사님이 더 열심히 일을 하게 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내세를 준비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내세를 준비할 수 있도록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가신 것은 주님의 부활을 확인시켜서 부활의 증이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부활을 확신하는 우리들도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3. 떠나간 자들에게 돌아오라는 교훈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부활을 확신시켜 주셨는데 제자들은 사명을 포기하고 흩어집니다. 베드로가 선동을 했습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 제자들이 따릅니다. “우리도 함께 가겠다” 그들은 갈릴리 바다로 돌아가서 다시 어부 일을 시작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떠났던 것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아서보다는 면목이 없어서였을 것입니다. 주님은 물고기 잡는 어부에 불과한 자기를 부르셔서 제자 삼아주셨고, 제자 중에서도 수제자 삼아주셨는데, 주님이 잡히시자 그는 사람들이 무서워서 멀찍이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여종 앞에서 주님을 3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는 골고다 언덕에도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니 자기는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나 같은 사람은 주님 곁에 있을 자격이 없어. 차라리 갈릴리 바다로 가서 예전처럼 물고기나 잡아야 겠다’라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은 사명을 버리고 주님을 떠난 베드로와 제자들을 다시 찾아가셨습니다. 제자들은 밤새워 수고했지만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으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없나이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제자들은 그분이 주님이신지도 모르고 말씀대로 그물을 던집니다. 그러자 물고기가 너무 많아서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잡힙니다. 이 때 제자들은 그분이 주님이신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은 떠나간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사명을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주님을 사랑하는지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주님의 양을 맡기셨습니다.
   
[9일 동안 천국 만들기]라는 글이 있습니다. 어느 날 어떤 부인이 가정생활이 힘들어 비관하며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너무 힘이 듭니다. 차라리 빨리 천국으로 데려가 주세요”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그러마 그런데 그 전에 네가 죽은 후에 마지막 정리 잘하고 갔다는 말을 듣도록 집안 정리를 잘해라.” 이 부인이 그동안 엉망이던 집안을 3일 동안 정성을 다해서 깨끗하게 정리를 했답니다.
   
3일 후 하나님께서 이 부인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예야 죽자니 아이들이 걸리지 네가 죽은 후에 엄마가 우리를 정말 사랑했다고 느끼게 마지막 3일간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사랑해 보겠니?” 이 부인이 안하던 맛있는 요리도 하고 다시 못 볼 것이라 생각하고 마지막 최선을 다해서 아이들을 사랑했답니다.
   
3일 후 하나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예야 이제 갈 때가 됐구나 마지막으로 네 남편 한번 봐라 남편 때문에 속 많이 썩었지 네가 죽은 후에 남편이 그래도 참 좋은 아내였는데 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니”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3일 동안 정성을 다해서 남편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천국으로 가자! 그런데 그 전에 네 집을 한번 돌아보려무나!” 그래서 집을 돌아보니까 깨끗한 집에서 오랜만에 애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고, 남편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까 떠나고 싶지 않았고, 결혼 후 처음으로 “내 집이 천국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인이 말했습니다. “하나님! 갑자기 이 행복이 어디서 왔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9일 동안 네가 만든 거야!”
   
여러분! 저는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이 그 여인의 마지막 질문과 주님의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갑자기 이 행복이 어디서 왔죠?”, “지난 9일 동안 네가 만든 거야!”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9일 동안 네가 만든 거야!”라는 하나님의 대답에 답이 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만드는 것입니다. 심령천국, 교회천국, 가정천국도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주님을 사랑하지만 사명을 내려놓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떠나간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그들에게 다시금 사명의 길을 가게 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만약 우리 중에 그런 분이 계시다면 오늘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주님이 주시는 사명의 길을 가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은 누구를 만나셨습니까? 왜 그들을 만나셨습니까? 그 만남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첫째, 주님을 사모하라는 교훈입니다. 주님 만나기를 간절히 사모하기를 바랍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처럼 주님을 사모하십시오. 둘째, 부활의 증인되라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전도해야 합니다. 셋째, 떠나간 자들에게 돌아오라는 교훈입니다. 주님을 떠난 분들 돌아오십시오. 사명을 떠난 분들도 돌아오십시오.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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