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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 이루었다 (요 19: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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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루었다 (요 19:17-42)
 

오늘 고난주일을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 고난에 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유월절 밤에 대제사장들이 보낸 자들에 의해 붙잡혀 가신 예수님은 밤새도록 공회에서 심문을 받으시고 새벽 무렵에 로마 총독 빌라도의 관저로 끌려가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한 결과 죄가 없음을 알고는 유대인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 하겠소.”라고 했습니다, 로마 총독이면 공정하게 법대로 재판을 하고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확인했으면 응당 석방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그들을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유월절이면 내가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당신들은 내가 유대인의 왕을 놓아 주는 것이 어떻겠소.”라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과 바라바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흉악범인 바라바 대신 예수님을 놓아달라고 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죄가 없지만 부당하게 죄인 취급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소리 질러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를 놓아주시오” “바라바를 놓아주시오!”라고 외쳐댔습니다. 예수님 대신에 흉악한 강도인 바라바를 선택하다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이에 빌라도가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마음을 만족시켜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무서운 채찍질을 당하여 피투성이가 되신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동정심을 이끌어내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무리에게 말하기를 “보라, 이 사람이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병들이 소리 지르기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했습니다. 빌라도가 말하기를 “당신들이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입니다.”라고 외치자, 굴복했습니다. 만일 유대인들이 로마 황제에게 탄원서를 보내서 빌라도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 나사렛 예수를 무죄 방면했다고 하면 빌라도의 지위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들의 협박에 굴복하여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하기 위해 재판석에 앉았습니다. 때는 아침 6시경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가리키면서 유대인들에게 이르기를 “보라, 당신들의 왕이라”고 하자, 그들이 소리 지르기를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했습니다. 빌라도가 이르기를 “당신들의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란 말이오?” 하니, 대제사장들이 대답하기를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주었습니다.

이제까지의 과정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부당하고 불법적으로 정죄를 당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교의 지도계층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들의 특권을 지키는데 방해물이 되는 예수님을 죽여 버리기 위해 로마 총독 빌라도의 권력을 빌리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배경의 배후에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역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은 대속의 고난이며,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대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메시아께서 고난 받으실 것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4)고 하였고,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보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범죄하여 영원한 멸망에 처할 인생들을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제, 오늘 봉독한 요한복음 19장 17절로 42절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형을 선고 받으신 이후의 일을 살펴봅시다. 

밤새워 심문을 받으시고, 로마 군병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채찍질 당하신 예수님께서는 사형수가 되셔서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소인 골고다를 향해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다른 두 죄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맨 가운데 예수님이 달리시고, 두 사람은 그 좌우편에 못 박혔습니다. 마가복음 15장 27절에 보면, 이 두 사람을 가리켜 강도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예수님을 강도들 가운데 한 사람처럼 취급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 역시 이미 성경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서 53장 12절에 이르기를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사실인즉, 주님께서 달리신 그 십자가는 범죄한 우리 인생들의 몫인데 주님께서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 위에 패를 붙였는데, 거기에는 히브리어와 로마어와 헬라어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히브리어는 선민 유대인의 말이고, 로마어는 로마정부의 공식 언어이고, 헬라어는 당시 로마 세계의 공용어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 언어로 기록한 것은 세계 만민에게 예수님이 구세주이신 것을 선포한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빌라도가 예수님과 유대인들을 조롱할 의도로 그렇게 써 붙였지만 말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 아래서 로마 군대의 관습에 따라서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의복은 보통 다섯 가지로 되어 있었습니다. 신발과 터번과 허리띠와 속옷과 겉옷이 그것입니다. 네 명의 로마 군병이 제비 뽑아서 하나씩 가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통으로 짠 속옷을 차지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제비를 뽑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는 사람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이 같은 짓을 하다니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시편 22편 18절에 (저희가)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라고 한 예언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25절에 보면, 골고다 형장까지 따라갔던 사람들이 누구인지 말해 줍니다. 모친 마리아와 그녀의 여동생과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제자 요한이 그들입니다. 시몬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은 다 몸을 피한 상태였습니다. 때에 예수님께서 모친 마리아를 보시고 또 그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이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보소서, 아들입니다”라고 하시고, 요한에게 이르시기를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요한에게 모친 마리아를 보살피도록 부탁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절박한 순간에도 모친을 배려하시는 주님의 따뜻한 마음을 대할 수 있습니다. 

아침 9시경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오후 3시경이 되었을 때, 구세주로서의 대속을  다 완수하신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하여 성경을 이루기 위해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시편 69편 21절에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라고 한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목이 마르지도 않은데 단지 예언을 응하게 하시려고 “내가 목마르다”고 하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겪는 고통 가운데는 극심한 갈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흘려서 심한 탈수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사람들이 그곳에 갖다 놓은 신 포도주에 적신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대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신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운명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46절에 보면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둘을 정리하면,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나서 곧 이어 큰 소리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시고 운명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괴악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으나 죽으신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하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운명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 증거로서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고 그 대신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더니 곧 피와 물이 나왔다고 증언합니다. 이를 조금 더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일시는 금요일 오전 9시였고, 운명하신 시간은 오후 3시경이었습니다. 금요일 저녁부터 안식일이 시작되는데 그것도 무교절이 시작되는 큰 안식일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22)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죄수를 십자가에서 내려 장사를 지내야 하므로,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죄수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다리를 꺾는 경우는, 십자가에 달린 죄수가 숨이 붙어 있을 때입니다. 쇠망치로 내려쳐서 다리를 꺾인 죄수는 그 충격으로 죽거나 죽지 않더라도 도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님께 와서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는 다리를 꺾지 않고 군병 중 하나가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쏟아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운명하신 것은 로마 군병이 육안으로 확인했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서 쏟아져 내린 피와 물이 증거합니다. 피와 물이 나왔다는 것은 이미 운명하신 지 한참 시간이 지나서 피가 물과 혈장으로 분리된 상태였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교적 짧은 여섯 시간 만에 운명하신 것은 극심한 정신적인 고뇌로 인해 심장이 파열되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이 온 인류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하나님의 진노를 홀로 다 받으셨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리하여 예수님은 다른 죄수들의 경우보다 훨씬 빨리 운명하신 것입니다.

한편,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다리를 꺾이지 않은 것 역시 성경대로 되었다고 했습니다. 시편 34편 20절에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하신 예언대로 된 것입니다. 요한은 로마 군병이 창으로 예수님을 찌른 것 역시 성경대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곧 스가랴 12장 10절에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라고 한 그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날 해질 무렵에, 예수님의 시신이 십자가에서 내려졌을 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총독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해서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은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었고 부자였습니다, 또한 그는 평소에 예수님을 믿었지만 사람들의 눈을 무서워해서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고 나자 더 이상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예수님의 장사를 맡기로 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 역시 산헤드린 공회원이었고 평소에 예수님을 믿는 것을 숨겨 왔으나 이 날은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와서 예수님을 장사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지낸 무덤은 골고다 처형장에서 가까운 동산에 있었는데,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부자의 무덤에 장사되실 것 역시 성경대로 된 것입니다. 이사야서 53장 9절에 보면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라고 했는데, 그대로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당하신 모든 일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성경대로 된 것입니다. 조셉 P. 프리라는 학자가 쓴 「고고학과 성경역사」라는 책에 보면 “구약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문자적으로 성취된 332개의 구별된 예언이 있는데, 이 모든 예언이 한 사람에게 성취될 확률은 84에다 0을 100개 붙인 것 분의 1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모든 예언이 예수님에 대하여 빠짐없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메시아이심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봅시다. 먼저,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이 여느 사람들의 죽음과 달리 특별한 목적을 가진 죽음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류 대속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 이루었다” 하신 것은 인류 대속을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죽음이 생겨난 것은 아담의 범죄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이르기를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자기 죄에 대한 형벌로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자기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동정녀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탄생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아담의 후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시므로 죄가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당해야 할 하등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무슨 이유로 죽임을 당하신 것일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지은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물론, 제사장들이 백성들을 대신하여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죄를 속하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를 드릴 때는 수송아지나 수양이나 수염소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 때 제물의 피를 번제단 뿔에 일곱 번 뿌리고 나머지는 번제단 아래 부었으며, 고기와 가죽과 그 외 모든 것을 진 밖에 가져다가 태웠습니다. 

그런가하면 일 년에 한 차례 대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온 백성을 위한 속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실상 짐승의 피가 사람의 죄를 영구히 없이할 수는 없었습니다. 말하지만, 구약의 속죄제사는 일시적인 속죄의 효력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매번 죄를 지었을 때마다 속죄 제사를 드려야 했고, 대제사장도 전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속죄 제사를 드리는 일을 매년 대속죄일마다 반복해야 했습니다. 즉, 구약시대에 아론의 후손이 제사장이 되어서 짐승을 제물로 바쳐서 드린 속죄 제사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사람의 죄를 완전히 없앨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려주신 속죄 제사는 단 한 번에 우리를 위한 완전한 속죄를 이루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완전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의 자격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흠 없고 죄 없는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9장에 이르기를 “11)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13)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라고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베드로전서 1장에 보니 “18)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피로써 단 한 번에 완전한 속죄 제사를 드리셨으므로 구약시대처럼 반복해서 속죄 제사를 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주신 사죄의 은총이 번복되지 않고 영구한 효력을 갖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시고 피 흘려 죽으셨으므로 이제 그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운명하셨을 때,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다 사하여졌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에 보니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속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충만 받은 사도들이 예루살렘 거리에 나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을 때 수많은 유대인들이 사도들의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묻기를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도들이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5-16)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아무리 선량한 사람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멸망 받을 죄인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3장 23절에 보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므로 모든 사람이 다 멸망 받을 운명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하신 대로,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는 판정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37절로 38절에 보면,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고 증언합니다. 이 휘장은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쳐진 것으로 그 안에는 일 년에 단 한번 대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가지고서만 들어갈 수 있었고, 그 외에는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지성소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이는 사람들의 손으로 찢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찢으셨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모든 사람에게 열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10장에 이르기를 “19)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살 찢고 피 흘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주를 믿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도들은 언제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그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고난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해 고난 받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시고 주님의 희생으로 인해 우리가 받은 구속의 은총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깊이 깨닫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믿고 따르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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