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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문밖에 선 사람들 (히 13: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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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밖에 선 사람들 (히 13:10-16)


[우리에게는 한 제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성전에서 섬기는 사람들은 우리의 이 제단에 놓은 제물을 먹을 권리가 없습니다. 유대교의 제사 의식에서 대제사장은 속죄제물로 드리려고 짐승의 피를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가고, 그 몸은 진영 밖에서 태워버립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하므로 우리도 진영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 땅 위에 영원한 도시가 없고, 우리는 장차 올 도시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립시다. 이것은 곧 그의 이름을 고백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선을 행함과 가진 것을 나눠주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먼 길을 걷고 또 걸어 우리는 마침내 예루살렘을 마주보는 올리브 산 중턱에 이르렀습니다. 낯설지 않은 어떤 광경이 떠오릅니다. 예수님은 느릿느릿 걷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십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몰려드는 순례자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고, 제자들의 얼굴은 다른 기대 때문에 들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예루살렘행이 죽음의 길인 줄을 알지 못합니다. 양 손 가득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든 철부지 아이들은 괜히 흥에 겨워 날뛰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흥분된 분위기와는 달리 예수님은 깊은 침묵 속에 계십니다. 그 홀로 미구에 벌어질 일을 예감하셨기 때문일 겁니다. 

교회 전통은 아주 오래 전부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이 주일을 요한복음의 전승을 따라 종려주일이라 명명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아이들이 손에 든 것을 그저 나뭇가지(21:8)라 했고, 마가는 잎 많은 생나무 가지(11:8)라 했고, 누가는 그런 언급을 아예 생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그것을 종려나무 가지라고 특정하고 있습니다. 분명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종려나무palm tree는 오아시스 지대에서도 자라지만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잘 자라는 나무입니다. 소나무나 참나무처럼 목질부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높이가 30미터에 이를 정도로 잘 자랍니다. 잎을 다 베어내도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나와 자랍니다. 그래서 이 나무는 오랫동안 승리와 생명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종려나무의 학명은 피닉스 닥티리퍼라(phoenix dactylifera)인데, 피닉스 곧 불사조라는 단어 속에 이미 이 나무의 끈질긴 생명력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주렁주렁 매달리는 종려나무 열매는 달고 맛있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저장하기도 좋아서 아주 소중한 먹을거리였습니다. 종려나무가 성전의 벽화나 장식품에도 등장하는 것은 그 때문일 겁니다. 시편은 치우침 없이 의연하게 살아가는 의인을 종려나무에 빗대기도 합니다(시92:12). 사사기는 예언자 드보라가 ‘드보라의 종려나무’라 명명된 나무 아래에서 백성들의 송사를 다뤘다고 전합니다(삿4:5). 여기서 종려나무는 ‘정직과 공평’의 상징입니다. 

• 고난의 길

요한복음의 저자는 아이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었다고 특정함으로써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넌지시 드러내고 있습니다. 때로는 많은 말보다 상징행동이나 상징물들이 더 많은 것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이고 의로운 분이고 공평하신 분이라는 것이 요한의 증언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그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요1:11) 빛으로 오신 예수를 어둠인 세상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면 어떨까요?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크게 벌린 어둠의 입 속으로 뛰어듦이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누구보다 명증하게 자각하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길을 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그 어둠을 어둠으로 드러내지 않고는 빛이 세상에 유입될 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수난주간의 예수님을 떠올릴 때마다 아사셀에게 바쳐지는 숫염소가 떠오릅니다.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은 숫염소 한 마리를 끌어다가 그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는 백성이 저지른 온갖 악행과 반역 행위와 죄를 다 자백합니다. 그런 후 이스라엘 자손의 온갖 죄를 짊어진 그 염소는 황무지로 추방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년 그런 의식을 반복하면서 죄의 심각성을 새삼스레 자각하곤 했을 것입니다. 

이 맘 때면 떠오르는 성서의 인물은 이삭입니다. 그는 모리아 땅에 있는 한 산에서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습니다. 우리는 대개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요청 앞에서 아버지 아브라함이 겪어야 했던 심적 갈등과 믿음에 주목하곤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칼날 앞에서 죽음의 공포를 겪어야 했던 이삭의 공포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불과 장작을 지고 오른 산에서 아버지가 자신을 결박할 때 10대의 혈기방장한 소년 이삭은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오랫동안 나라 없이 떠돌던 유대인들은 자기를 방어할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해져서 처분만 기다리는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이삭의 결박’을 뜻하는 ‘아케다akedah’라는 단어를 묵상해왔습니다. 아케다는 그들의 운명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역시 아케다의 상황 속에 계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외치셨을 때 예수님은 차가운 칼날이 목에 닿는 순간 이삭이 느꼈던 그 마음과 조우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모든 인간적인 정념들을 생략한 채,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셨다고 건조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12)

여느 제사장들과 다른 점은 예수는 희생물을 잡아 바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희생물로 바쳤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를 죽여 남을 살리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렇기에 기존의 가치관을 뒤엎는 혁명입니다. 남을 희생시킴으로 자기 욕망을 이루려는 이들이 넘치는 세상에서 십자가는 어리석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가 아니고는 새로운 세상이 열릴 수 없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성문 밖’으로 내쫓기고 계십니다. 그곳은 주류 사회에 의해 내몰린 사람들의 삶의 자리입니다. 그곳은 어쩌면 에스겔이 보았던 해골의 골짜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진영 밖으로 나가자

오늘 우리가 예수를 만날 곳은 ‘성문 밖’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을 고난의 길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진영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13)

‘그러므로’라는 접속부사는 앞의 내용이 뒤의 내용의 이유나 근거가 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진영 밖으로 나가야 하는 까닭은 예수님을 만나 뵐 자리가 바로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 가는 길은 진영 밖, 곧 주류 세계로부터 벗어난 곳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 길은 인기 없는 길이고, 평안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길입니다. 거창 고등학교 강당 뒤편에는 ‘직업선택의 십계’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그중에 8번과 10번 계명은 이렇습니다.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라’.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건학 이념에 따라 거창고등학교는 학생들을 고난의 자리로 부르고 있습니다.

성도들을 고난의 길로 초대한 성서 기자는 한술 더 떠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지자’고 말합니다. 작은 비난에도 상처를 입는 우리들입니다. 누군가가 별 뜻 없이 내뱉은 말 한 마디 때문에 모욕감에 숨을 헐떡이고 밤잠을 설치기도 하는 우리들입니다. 비난받고, 모욕받고, 수치를 당하는 것이 두려워 우리는 어중간한 자리에 서서 바장일 때가 많습니다. 

불의에 대해 침묵하고, 약자들의 편에 서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서 기자는 어쩌자고 우리에게 수치와 모욕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모욕과 비난은 우리의 강고한 자아를 깨뜨리는 망치가 되기도 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참 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될 때 놀랍게도 내적인 자유가 우리 속에 깃들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가 진영 밖으로 나가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지자고 말하는 것은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성도는 장차 올 도시를 찾는 이들입니다. 그의 삶은 종말론적입니다. 이 말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산다는 뜻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하나님 나라의 빛에 비추어 우리 현실을 가늠한다는 말입니다. 그는 세상의 인정과 박수갈채보다는 하나님의 칭찬을 구합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 속에 영원을 끌어들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일하다가 모욕을 받거든 기뻐하십시오. 그것은 우리 영혼이 구원의 길에 서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우리를 돌아봅니다. 우리는 진영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배당이 크고 화려할수록, 예배당 바깥에 있는 그늘진 땅은 잊혀지기 일쑤입니다. 지금도 성문 밖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안에 있는 사람들의 눈에 그들은 불편하고 불온하고 위험한 사람들로 보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눈은 그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 고마운 사랑아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자’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찬미면 찬미지 왜 그 말이 제사와 결합되는 것일까요? 희생이 없는 찬양은 진정한 찬양일 수 없다는 뜻일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여기에 제사라고 번역된 영어 단어 ‘새크리파이스sacrifice’는 성스러운 제의祭儀를 뜻하는 ‘사크라sacra’와 수행하다/실행하다는 뜻의 ‘facere’가 합쳐진 말입니다. 깨지고 찢기는 산하를 위해 몸으로 울고 있는 사람들, 거리로 내몰린 이들과 연대하기 위해 낮은 곳을 향해 길 떠나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늘의 찬양대가 아니겠습니까? 

며칠 전 우리는 허병섭 목사님의 부음에 접했습니다. 그분을 아시는 분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도시 빈민의 대부’, ‘살아 있는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를 ‘길 잃은 목자’라고도 불렀습니다. 서있는 자리에 따라 한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렇게도 다릅니다. 그는 목사가 된 이후에 가난과 절망과 자기 멸시에 빠진 사람들의 벗이 되어 그들을 일으켜 세워주는 것을 자기의 소명으로 알았고, 하월곡동 산동네에 ‘동월교회’를 세워 주민들과 한 몸이 되어 살았습니다.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는 이들을 위해 무료 진료를 알선하고, 아이들을 위해 탁아방도 만들고, 집 없는 이들에게 잠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988년에는 신분이 가지는 권위조차 벗어던지기 위해 목사직을 반납하고 미장이 일을 배워 노동자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그는 땅을 가까이 하는 삶에서 희망을 보고는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무주로 내려가 푸른꿈고등학교를 세우고 산고 끝에 거창에 녹색대학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준 참 목자였습니다. 그는 진영 밖으로 나가 주님의 치욕을 짊어지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고마운 사랑아>라는 노래로 그와 석별의 정을 나눴습니다.

고마운 사랑아 샘솟아 올라라
이 가슴 터지며 넘쳐나 흘러라
새들아 노래 불러라
나는 흘러흘러 적시리
메마른 이내 강산을

뜨거운 사랑아 치솟아 올라라
누더기 인생을 불질러 버려라
바람아 불어 오너라
나는 너울너울 춤추리
이 언땅 녹여 내면서

사랑은 고마워 사랑은 뜨거워
쓰리고 아파라 피멍든 사랑아
살갗이 찢어지면서
뼈마디 부서지면서
이 땅 물들인 사랑아
이 땅 물들인 사랑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것으로 우리 할 일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저 성문 밖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참된 생명의 빛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으로 온 땅을 물들인 예수님은 지금도 고난의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큼성큼 그 길을 따라 걷지 못한다고 부끄러워하거나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아주 조금씩이나마 그 길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보이지 않는 보폭으로 담을 채우는 담쟁이넝쿨처럼,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도 사랑의 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모두 ‘그 길’의 사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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