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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의 옷을 입고 (렘 31:31-34, 요 12:20-33, 히 5: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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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옷을 입고 (렘 31:31-34, 요 12:20-33, 히 5:5-10)


<용서의 옷을 입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자>

오늘은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실 날이 가까워져 옵니다. 오늘 우리는 용서에 대해서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옷이 중요합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듯이 아름다운 옷은 우리를 아름답게 만듭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옷은 우리의 직업과 신분을 말해줍니다. 병원에서 흰 가운을 입은 분들을 볼 때 우리는 의사 선생님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군인은 군복을 착용하고 경찰관은 경찰관복을 착용합니다. 옷은 우리가 어느 곳에 가는지 목적지를 알려주기도 합니다. 수영장에 갈 때에는 수영복을 입어야 하겠지요. 헤엄을 치지 않는 곳에서 수영복을 입으면 이상합니다. 조깅을 하거나 운동을 할 때에는 가볍고 편한 운동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다 교회에 나왔는데 어떤 의복을 입어야할까요? 당연히 여러분들은 교회에 오시는 분들답게 의복을 갖추어 입으셨습니다. 하지만 이런 외적 의상 말고 우리는 마음의 옷을 차려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차림새를 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마음의 의복이 필요하겠지만 저는 오늘 특히 용서의 옷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오늘 주어진 성서정과 중에서 요한복음의 말씀을 보면 헬라 사람 몇 명이 예수님을 접견하러 왔습니다. 빌립과 안드레가 이들의 접견 청원을 예수님께 전합니다. 예수께서 이들에게 주신 말씀은 이제 십자가를 지실 때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실 때 가장 중요한 말씀이 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은 당신을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알로 비유하십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무수한 열매를 맺듯이 예수님 역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열매를 맺게 되신다는 것이지요. 

이 말씀을 하신 뒤 예수님은 26절에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님을 섬기려면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서 예수님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리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일까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한 알의 밀알처럼 썩어져 희생하는 삶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지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용서하는 일입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한 점 죄가 없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의 옷을 입을 때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질 수 있고, 용서의 옷을 입을 때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기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이런 맥락에서 우리 다함께 렘 3: 34절의 맨 마지막 말씀을 봅시다.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새언약을 맺으실 때 지난 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었던 죄악을 다 용서하시되, 다시는 기억조차 하시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비슷한 말씀이 미 7: 19절에도 나타납니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기본적으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가장 큰 이유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함입니다.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들려준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페인의 한 아버지가 자기와 대판 싸우고 집을 뛰쳐나가 마드리드로 간 아들과 화해하기를 원했습니다. 지역 신문의 광고란에 “파코, 화요일 정오 12시에 몬태나 호텔에서 만나자꾸나. 너를 무조건 용서하마. 너를 사랑하는 아빠가.” 

파코라는 이름은 우리나라의 철수처럼 가장 흔한 이름입니다. 드디어 화요일 정오에 아버지가 호텔로 나갔을 때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습니다. 파코라는 이름을 가진 젊은이가 800명 이상이나 아버지와 화해하기 위해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헤밍웨이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이 세상에는 그만큼 용서하고 용서받을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과거에 지은 죄악의 무게에 짓눌려 삽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복수심에 불타고 분노로 인해 밤잠을 설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지은 모든 죄를 하나님이 다 용서하시고 기억조차 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에 한 줄기 소망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해주신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의 이웃에게 용서를 빌고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의 옷을 입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용서의 옷을 입으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합니까?

<용서의 옷을 입게 되면> 

첫째로, 용서할 때 과거의 고통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컴퓨터에 입력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지우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씀한 그대로이지요.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우리가 예전에 지은 죄를 다 용서하시고 깨끗이 잊으신다면, 왜 우리가 그 죄를 기억해야 합니까? 

미국에 사는 멜리사는 사춘기 소녀 시절에 아버지와 오빠로부터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하루하루가 생지옥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리무진을 타고 도망치자고 꾀었습니다. 그 남자는 마약을 하면 과거를 잊을 수 있다고 유혹했습니다. 과연 마약은 잠시 동안 과거의 상처와 수치를 잊게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잠깐 뿐이었고 자기도 모르게 계속해서 마약에 손을 대다보니까 이내 마약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완전히 끝 갈 데까지 간 멜리사는 뉴욕의 마약 중독자를 돌보는 기독교 선교 단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곳 원장은 멜리사에게 지금까지 자기가 겪은 일, 자기가 증오하는 사람들, 자기가 받은 상처를 낱낱이 컴퓨터 화면에다가 기록하라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맨 마지막으로 오늘 읽은 렘 31: 34절의 말씀, 즉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쓰라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원장은 멜리사에게 자판기의 “지움(delete)” 키를 두 번 치라고 했습니다. 멜리사의 눈앞에서 과거의 모든 상처와 수치심이 순식간에 지워졌습니다. 원장이 멜리사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죄를 다 용서하시고 기억하지 않으신다면 이제 당신 역시 과거를 기억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할 때 우리는 과거의 사슬에서 풀려나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 때문에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과거의 상처와 수치와 죄책감으로 뒤범벅된 길로 가야할 것인지, 아니면 은혜와 용서의 길로 가야 할 것인지 기로에 서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 우리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있을 때까지 용서를 미룬다면 용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우리의 죄를 너그럽게 용서해주신 것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있는 사람만이 이웃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 감격하여,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 전혀 용서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즉시 용서하는 것입니다. 

미국 루이지애나 주의 뉴 오를레앙즈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학교에서 유색인종에 대한 인종차별을 폐지한 뒤 처음으로 루비 브릿지라는 흑인 소녀가 윌리엄 프랑스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노예 매매가 가장 빈번하게 일어났고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가장 심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 학교에 다니는 흑인은 루비 하나뿐이었습니다. 

루비가 등하교를 할 때마다 수많은 백인들이 욕설을 퍼붓고 온갖 비하와 조롱을 다했습니다. 이런 끔찍한 환경 속에서 등하교를 하던 루비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진 하버드 대학의 로버트 콜스라는 심리학 교수가 학교에 등교하는 루비의 모습을 조심스레 관찰했습니다. 

그 날도 입에 담을 수 없는 백인들의 야유와 욕설을 들으며 학교에 들어가던 루비의 입술은 무엇인가를 중얼거리며 계속해서 움직였습니다. 콜스 교수가 루비에게 물었습니다. “너도 똑같이 그들에게 욕을 했니?” “아니요!” “그러면 무슨 말을 했니?” “저는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아니, 기도라니. 사람들이 너를 그렇게 못살게 구는데도 기도가 나올 수 있니?” “저는 학교에 가기 전에 집에서 꼭 기도를 했는데 오늘 아침에는 깜빡 잊고 기도를 못 했기 때문에 기도를 드렸던 거예요.” “그래, 그렇다면 무슨 기도를 했니?” “하나님, 저들을 용서해주세요.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했던 기도이지요.” 

콜스 박사는 루비의 이 한 마디가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그 은덕과 감사 때문에 이웃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용서하면 과거의 상처를 저절로 잊을 수 있습니다. 

망각은 용서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참으로 용서하다 보면 과거의 상처는 저절로 기억의 창고 속에서 지워집니다. 반대로 용서하지 못하면 우리 자신이 괴롭습니다. 자유와 평화가 없습니다. 늘 죄의 짐에 짓눌려 괴롭습니다. 용서할 때 아무리 괴로운 기억이라고 할지라도 저절로 잊히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마리타라는 여성은 엘살바도르에서 코스타리카로 망명한 난민입니다. 마리타는 한 때 고향에서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행복한 생활을 했습니다. 마리타의 남편은 노동자를 다루는 매우 위험한 일을 맡아서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무장한 군인들이 마리타의 집에 들이 닥쳤습니다. 남편을 어디론가 끌고 갔고, 자기와 사춘기 딸은 군인들에게 무자비한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그런 뒤 그 몹쓸 군인들은 두 모녀를 앞마당에 있는 기둥에 묶어놓고서는 두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아들을 무참히 죽였습니다. 기둥에 묶여있던 딸은 이튿날 아침 죽었습니다. 

해가 밝자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서 마리타는 간신히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무섭고 죽고 싶은 마음 밖에 들지 않는 가운데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새벽녘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가보니 아무도 없고 작은 상자 하나가 문지방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상자 안에는 살해된 남편의 시신 일부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거의 2-3 주 동안 매일 이런 끔찍한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매일 새벽마다 남편의 시신 일부가 들어가 있는 상자가 배달되었던 것이지요. 결국 거의 모든 시신이 수습되었을 때 이웃 사람들과 성당의 신부님과 함께 남편의 장사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마리타에게 그 참혹한 세월을 어떻게 견딜 수가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남편의 시신이 배달되던 날을 어떻게 견디어냈냐고 물었습니다. “물론 극도의 공포심으로 치가 떨렸지요. 처음 시신이 배달되던 날 아침에 저는 침대 옆에서 구토를 했습니다. 매일 밤마다 두려움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지요.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어요. 이제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있기 전에 미리 깨어나 침대 옆에 서서 조용히 기다렸지요. 

그리고 노크 소리가 났을 때 슬며시 문 쪽으로 다가갔지요. 바로 그 때 저는 제 머리를 창자욱이 선명한 예수님의 옆구리에 묻은 채 예수님이 두 팔로 저를 따뜻하게 안아주시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렇게 매일 아침마다 침대에서 문 앞까지 가는 동안 예수님과 동행함으로써 두려움을 이겨낼 수가 있었답니다. 저와 함께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도와주신 예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면서 말이지요.” 

우리에게는 누구에게나 과거의 상처와 수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원수들을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용서할 때 그 모든 상처와 수치는 저절로 사라집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을 당하실 시간이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습니다. 이 뜻 깊은 계절에 우리는 용서하고 용서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용서의 옷을 입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명상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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