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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막 14:3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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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막 14:32-42)
 
우리는 모두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처음 믿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나의 친구이시고 나의 주님이시라는 말씀이 제 가슴을 벅차게 울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나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뿐인 아들, 예수님을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참혹한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놓으셨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벅찬 감격으로 몰려왔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신앙의 기쁨과 즐거움, 감격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습관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열정이 조금씩 시들어져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말씀을 읽다가 어떤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시들어있는 제 신앙에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사랑한다”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나는 너의 사랑을 원한다, 너의 기도를 원하고 너의 예배를 원한다”고 간청하고 계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의 사랑고백을 듣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나의 기도를 받기 원하시고, 나와 대화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무것에도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도 사랑받고 싶어 하신다는 것이 제게는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응답없는 우리 인간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부르고 계신다는 것이 제게는 그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제가 가진 사랑과 하나님이 제게 베풀어주신 사랑, 그것을 감히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사람임에도, 하나님은 나를 기다리시고 내게서 사랑한다는 소리를 듣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결혼하신지 몇 년이 되셨습니까? 10년이 지났습니까? 30년이 지났습니까? 아니 50년이 훌쩍 지나갔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이에 서로에게 “고맙소, 사랑하오, 감사하오.”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하셨습니까? 만약 이 말들을 자주 하지 않으셨다면, 상대방은 매우 섭섭해 할 것이 분명합니다. 부부란 사랑의 고백 위에서 서로의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부부만 그럴까요? 아닙니다.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얘야, 내가 널 참으로 사랑한단다.”라는 말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것은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도 자녀로부터 “아버지, 어머니 참 고맙습니다. 사랑해요.”라는 말을 듣고 싶어합니다. 사랑의 고백을 듣고 싶은 것이 서로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늘 외로우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짝사랑과도 같은 예수님의 사랑에서 외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길은 참으로 힘든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길 위에서 끝없는 고뇌와 외로움에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할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 때 예수님의 모습은 처량하고 안타깝기까지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셨던 장소는 겟세마네입니다. 겟세마네의 뜻은 ‘올리브기름을 짜는 기계 또는 틀’입니다. 마치 기름을 짜는 것처럼, 예수님은 이 곳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기의 몸을 쥐어 틀으며 하나님 앞에 피땀 흘리는 기도를 올려드리고 계십니다.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 그 모든 권세를 다 포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4절은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누가복음 22:44)

예수님은 홀로 있을 때도,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도 늘 위기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외로이 하나님이 보여주신 길로 가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길 앞, 영적 투쟁의 자리에 홀로 서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온 힘을 쏟고 계셨던 것입니다. 외로이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예수님의 고통이 그대로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도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공생애의 마지막도 기도로 장식하셨습니다. 그 마지막 기도는 물음이었습니다. “아버지, 이 길을 가야합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것을 알고 계셨기에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그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위기 앞에서 무릎을 꿇으셨다면 우리도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때로 너무 힘들어 기도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절망과 낙심이 너무 커서 기도 소리가 안 나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는 것이, 무릎 꿇고 고개 숙이는 것이 결국 다시 살아나는 길입니다. 다시 새로운 소망을 얻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함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다음과 같은 저주를 퍼붓는다면 여러분은 견딜 수 있으시겠습니까? “너는 서른세 살에 죽을 거다. 가장 비참한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에 달려서 손과 발에 못이 박히어 아주 참혹하게 죽을 거다. 그것도 네 잘못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악을 대신 뒤집어쓰고 죽게 될 거다!” 우리가 이런 말을 듣는다면 도저히 참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참으셨고 감당하셨습니다. 고통의 길인 줄 아시면서 그 길을 가셨습니다. 아프고 슬프고 외로웠지만, 하나님이 주신 그 길을 마다하지 않고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 이것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마음상태를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마가복음 14:33)

슬픔으로 고통스러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세 명의 제자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낯선 모습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죽음에 이를 만큼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불안과 고뇌가 몸과 정신과 영혼을 뒤덮고, 억누르고, 짓누르는 상황 속에 예수님이 서 계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기도였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마지막 기도의 순간에 예수님이 기도하는 친구를 필요로 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동지가 필요했습니다. 위로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제자들이 도와주기를 요청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인간이셨습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울 때에 그를 이해해 주는 신실한 친구, 동지가 필요하셨던 것입니다. 혹시 병원에 입원해 본 적 있으십니까? 혹은 큰 수술을 받아본 적 있으십니까? 아프고 위급할 때 대부분 제일 먼저 하는 것이 가족과 친구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일입니다. 이렇듯 어려운 상황을 만날 때, 상처받고 낙심될 때, ‘누군가 옆에서 위로해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죽음 앞에 섰을 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러 가지 소원이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으면 하는 것일 겁니다. 위기를 맞았던 예수님의 심정도 똑같으셨습니다. 그 아픔을 이해해 줄 사람이 옆에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고뇌의 마지막 순간에 홀로 있는 것이 예수님께는 마치 큰 형벌처럼 느껴지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마가복음 14:32)

제자들은 예수님을 홀로 두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제자들이 옆에 있어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신 것은 대단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가복음 14:34)

잠자지 말고 내가 기도할 동안에 깨어서 여기에 머물러만 있어달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냥 앉아만 있으라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홀로 고독을 대면해야 하는 이 마지막 순간이 너무 외로우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3년 동안 예수님을 뒤따랐던 제자들, 그 중에서도 예수님이 특별히 사랑하셨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고독함에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도하는 동안 깨어만 있어달라는 요청도 들어주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 기도를 하실 때에도,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에도 그들은 모두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필립 얀시(Philip Yancey)라는 사람이 예수님의 생애를 그리면서 오늘 본문의 장면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남자 제자들이었기 때문에 자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어머니가 그 옆에 있었으면 아들이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는데 잠이 들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며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나 십자가 옆에 서있었던 여인들이 이날 밤 예수님 옆에 있었다면 그들은 깨어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 제자들만이 이날 예수님과 동행했고, 저녁식사와 포도주에 포만감을 느끼며 예수님 홀로 가혹한 시간을 보내도록 놔둔 채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세 제자들은 호기 있게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큰소리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베드로는 “내가 죽을지언정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라며 호언장담했던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마저 깊은 잠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잠자는 그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실망하신 듯 보입니다. 어쩌면 마음에 상처를 입으셨는지도 모릅니다.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내놓겠다고,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나를 위해 잠깐도 깨어 있지를 못하는 것일까?’ 예수님은 그 마음을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마가복음 14:37)

이 마지막 순간에 베드로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를 반석을 의미하는 ‘베드로’가 아닌, 옛 이름 ‘시몬’이라 부르시면서 말입니다. “시몬아, 아직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나를 지켜볼 마음이 없더냐. 내 옆에서 나와 함께 참여할 마음이 없더냐?" 예수님은 답답한 심정을 쏟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제자들을 기다리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잠자는 제자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계속 신뢰하시고 기다리셨습니다. 여기 예수님의 첫 번째 배려가 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가복음 14:38)

“나와 함께 있을 마음이 있을 거다. 기도할 마음이 있을 거다. 나와 함께 이 길을 갈 마음이 있는데 네 육신이 약하구나. 네 마음에는 소원이 있지만 네 육신이 무너지고 있구나. 그러나 다음에 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영적 나태와 영적 위기를 맞은 베드로를 향해 “베드로야, 너는 앞으로 나를 세 번 부인하게 될 거다. 그때 가서야 내 말을 정확하게 알게 될 거다”라는 숨은 의도의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위기를 만났을 때,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잡혀가신 후, 한 여종이 와서 “당신도 예수의 제자지요?”라고 했을 때 베드로는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모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저주하고 배신했습니다. 깨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잠을 잤고, 한편으로는 도망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예수님의 두 번째 배려가 있습니다.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마가복음 14:41~42)

예수님께서 자고 있는 제자들을 보시며, “이제 됐다. 그만하면 됐다. 지금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으니 일어나라. 우리 함께 가자”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연약한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마지막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다시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증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마지막까지 기대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고, 기도의 후원을 받기 원하셨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라는 고백을 듣기 원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하신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는 꾸중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에는 예수님의 큰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지 말아라. 나와 함께 기도하자. 나를 기억해다오. 나는 너의 기도와 너의 사랑을 필요로 한다”는 간절한 요청이고 부탁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짝사랑으로 남겨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사랑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없이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지만, 그런 우리가 사랑을 드리고 찬양을 드릴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제자들에게 그러하셨듯이, “그냥 내 옆에 있기만 해라. 깨어서 나를 지켜보기만 해라. 나와 함께 가자”고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사랑해요. 하나님 좋아해요.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세요”라고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고백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실 것입니다.

다음 주일은 종려주일이자 고난주일의 시작입니다. 이 한 주간, 사랑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드릴 수 있는 나는 하나님께 매우 소중한 사람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 좋아해요, 하나님 사랑해요 날마다 고백하면서 우리의 삶을 다시 펼쳐나가는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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