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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저주 받은 무화과나무 (막 1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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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 받은 무화과나무 (막 11:12-14) 

  
예수님은 이 땅에서, 수많은 이적을 행하셨다. 각종 병들을 고쳐주고,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냈다. 죽은 자들을 살리고, 풍랑을 잔잔하게 하셨다. 예수님의 이적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실 때 행하셨고, 풍성하게 만드는 이적이다. 40일을 금식했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이적을 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해서, 말라버린 사건은, 마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이적들 가운데, 유일한 파괴하는 이적이다. 파멸시키는 이적을, 예수님이 행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이 사건을 이렇게 말했다. 
(13下)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고 했는데,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반드시,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분이, 아닐 수 있음을 보여 준다.’고 하였다. 때가 아닌데도, 열매를 따먹지 못했다고 저주했으니, 상식에 어긋난다고 하였다. 

버트란트 러셀은 탁월한 철학자나, 성경에 대해서, 식물에 대해서, 대단히 무지했다. 무화과나무는 무화과는 꽃이 없는 열매다. 열매 안에 꽃이 있기 때문이다. 무화과나무의 본격적인 추수기는 6-7월이다. 그때 많은 열매를 내지만, 3-4월에도 열매를 맺는다. 이때 열리는 열매를 파그(ג󰘲, ה󰔻󰘲)라 한다. 

이때를 제외한 무화과를 테에나(ה󰗺󰔞󰚢)라고 한다. 그리고 9-10월에도, 무화과나무 열매를 얼마든지 따먹을 수 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는, 먼저 잎사귀를 낸다. 잎사귀가 나면, 다른 나무들과는 달리, 이미 열매를 가진다. 이것이 특징이기에, 잎이 있는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기대할 수 있다. 

잎사귀가 있었기에, 열매를 기대함은 대단히 상식적이다. 그런데 열매가 없었으니, 정상이 아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창조주의 기대대로, 열매를 맺어 주지 못한 나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나무를 저주하셨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면서, 파괴적인 이적을 예언자적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1. 예수님은 열매를 찾으신다(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이튿날’은 고난주간의 둘째 날에 해당한다. 그 전날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둘러보았다. 
3년 전 공생애 초기에도,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 그 곳에서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을 보셨다. 그 때 의분내면서, 그들을 성전에서 내쫓았다. 그로부터 3년이 흘렀지만, 예루살렘 성전의 상황은, 조금도 달라진 바 없었다. 그렇지만 그 날은, 때가 이미 저물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나와서 베다니로 갔다. 베다니는 벧(ית󰔲) 테에나(ה󰗺󰔞󰚢)의 합성어다. 예루살렘에서 2km 정도 밖에 안 되는 거리였다. 베다니에는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린, 나사로가 살고 있었다. 

그 날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주무시고, 그 이튿날 제자들과 함께 나왔다. 다시 한 번 예루살렘으로 성전을 정화하려고 가실 때, 예수님은 배가 고프셨다.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가깝기는 하지만,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힘든 길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인자(사람의 아들)로 왔기에, 배고픔을 느끼셨다.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님은 멀리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셨다.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다보면, 벳바게라는 동네가 있다. 히브리어로 벳은 집이며, 바게(파게)는 첫 무화과다. 영어fig(무화과)도, 히브리어 פג에서 나온 단어다. 그러니까 벳바게는, 무화과의 집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그 곳에는, 무화과나무가 많았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에게, 파괴적인 이적을 행하심으로, 제자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셨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주인 없이 길 가에 있는, 무화과나무를 택하셨다. 때는 유월절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니까 3월말 내지는 4월 초순이었다. 계절적으로, 무화과나무에 잎사귀가 날 때다. 
예수님이 보신 무화과나무에는, 잎사귀가 있었다. 무화과나무는 잎사귀보다, 오히려 열매가 먼저 나무에 달린다. 그리고 다른 열매들은, 익어야 먹을 수 있지만, 무화과나무 열매는 익지 않아도 먹을 수 있다. 그래서 배가 고프면, 익지 않은 무화과를, 따먹을 수 있다. 

무화과나무에 잎사귀가 있다는 말은, 그 나무에 열매가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 무화과나무는 달랐다. 그 나무에는 잎사귀만 있고, 열매가 전연 달려있지를 않았다. 그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는 까닭을, 13절 끝 부분에 이렇게 말한다.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만일 무화과의 때라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다 따먹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무화과의 때가 아니기에, 사람들이 무화과를 다 따먹어서, 열매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 무화과나무는 열매 맺지 못해서, 땅만 버리는 병든 나무였기에, 심판이 내려졌다. 
예수님은 열매를 찾는 분이다. 우리에게도 신앙의 열매를 찾는다. 우리는 신앙의 열매가 있는가? 없는가? 잎사귀만 무성하고, 진실한 신앙의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가, 우리 모습은 아닌가?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이 없는, 우리의 삶은 아닌가? 

무화과나무는 그 잎사귀만을 뽐낼 수 없다. 무화과나무는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경건의 모양만 드러내려고 하면, 안 된다. 우리의 삶에 실제로,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극적인 심판이 나타난다. 예수님은 심판주가 되신다. 

2.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저주받았다(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나무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나무를 창조하신 창조주가 되신다. 
(마21:19下) “…이제부터 영원토록, 그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자, 그 결과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말라버리고 말았다(막11:21). 이 때 예수님은 유일하게, 파멸을 불러일으키는 이적을 행하셨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나? 예수님의 시장기가 채워지지 않았기에,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에게, 짜증을 내셨는가? 아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사적인 목적으로 이적을 행하지 않았다. 이 때 예수님의 발걸음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고 있었다. 

이제 곧 예수님은, 강도의 소굴이 된 성전을, 깨끗이 청소하면서, 거짓으로 가득 찬 유대교를 심판하신다. 예수님은 이번 이적을 통해, 자신이 하실 일을, 미리 제자들에게 보이고, 이스라엘의 미래를 보이셨다. 성전에는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따라서 겉으로 보면, 하나님께 열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마음이 하나님께 멀었다. 그들은 헛되이 하나님을 경배했을 뿐이다. 그들은 잎사귀만 무성했지, 아무런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정없이, 그들을 성전에서 내쫓았다. 

이로써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들의 제사를 싫어하심을 보여주셨다. 먼저 예수님은 잎사귀만 있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했다. 곧이어 외식으로 가득 찬 성전을 청소했다. 이 2가지 사건의 의미는 하나다. 이 두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임할, 임박한 심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셨다. 
(요1:11)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자기 땅에 오셨다. 그러나 자기 백성들, 곧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 그들은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또 외식과 형식으로만 가득한 성전처럼, 예수님을 배척한 이스라엘도 심판을 받아야 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회개의 열매를 찾지 못했다. 따라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사십 년이 지나, 예수님이 심판대로, 이스라엘은 멸망의 날을 맞았다. 
주후 70년, 로마군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예루살렘 성벽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철저히 무너졌다. 이처럼 열매 없는 나무는, 심판을 받는다. (마3:10)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마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요15: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제거해 버리시고.” 예수님은 3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베풀고, 그들을 위해 많은 이적들을 행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의 열매를 맺기는커녕, 도리어 예수님을 죽여 없애기로 작정했다. (눅13장)의 무화과나무처럼, 그들에게도 3년의, 심판 유예기간이 주어졌지만, 그들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본문의 무화과나무처럼, 결국 그들은 심판을 받고 말았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민족의 국가를, 상징하는 나무다. 따라서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 국가의 외식으로 가득하고, 열매 맺지 못한 모습을 상징한다. 따라서 예수님이 저주하자, 그 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라버렸다(20). 이는 로마에 의해 완전히 멸망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상징한다. 
왜 예수님이 저주하사, 뿌리로부터 말라 버린 사건이,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국가에 임할 저주가 되는가?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의 메시아로 오셨지만, 기쁨으로 영접해야 할 유대인들이 그를 배척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마27:22-26)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고, 놓아주려고 하였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같이 한 입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죽어 마땅한 바라바를 살려주기를 간청한다. 예수님의 무죄한 피를 우리가 팔았다면, 그 대가를 우리와 우리 자손이 감당하겠다고 장담한다. 
그러나 무죄한 예수 그리스도를 팔은, 그들의 오만과 독선은, 저주받은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라 버린 것처럼, 역사 속에서 철저하게 멸망당하므로 성취된다. 우리도 그 동안 무위도식하면서 열매 맺지 않는 나무가 되면, 찍힘을 당한다. 야드 바쉠에 가보면, 그들의 비극을 볼 수 있다. 

3. 열매를 맺어야 한다. 

예수님은 잎사귀 있는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찾았지만, 그 무화과나무에는 열매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저주하셨는데, 이는 제자들에게 영적 교훈을 주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14下)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잎사귀만 있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말씀을 들었다. 그때 그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만일 그 때 그 자리에 우리가 있었다면, 과연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 

“나는 잎사귀만 있는, 나무가 되어서는 안 되겠구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되어야겠구나.” 이런 생각을 분명히 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열매를 맺어야 할 나무들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찾는 것은, 잎사귀가 아니라 열매다. 그러면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인가? 

(갈5:22-24)은,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오직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는, 아홉 가지로 소개되고 있지만, 실제는 하나이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와 절제, 이 9가지 성령의 열매는, 사랑의 주님 안에 다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성령이 우리에게 오면,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고, 예수님을 닮아간다. 성령의 열매 9가지는, 모두 예수님의 모습이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야 한다. 그래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닮기 바란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면, 자연히 예수님의 모습의 아름다운 모습이 우리 안에서 나타나고, 예수님의 향기를 발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로 인하여, 우리 주변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열매가 나의 삶에 나타나고 있는지 돌아보자. 

예수님은 (마24장)에서 감람산 강화를 통해, “주의 임하심에 대한 징조, 세상 끝의 징조”에 대해서 말씀했다. 그 결론 부분에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했다.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라고 하셨다(마24:32). 이스라엘의 독립을 말한다. 이는 재림의 징조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징조를 보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 (롬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야 한다. 

(살후2:3-4)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이×희와 같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난다. 
결론이다. 예수님은 열매를 찾았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저주받았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종말이 가까움을 알고, 깨어있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영적인 잠을 자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도 열매를 맺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열매를 찾는다. 잎사귀만 있는 무화과나무처럼, 직분만 과시하지 말고, 직분에 걸맞게 열심히 봉사하자. 예배를 드릴 때도, 예배의 모양만 갖추지 말고, 진정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자. 열매를 맺지 않으면 심판받는다.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주님이 내 안에 계시기에, 예수님을 닮아가야 한다. 더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더 깊이 배우며, 더 많이 기도하자. 그리고 성령님을 의지하고,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심정으로, 힘써 복음을 전하자. 

(요15: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열매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 칭찬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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