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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보라, 어린 나귀를 타신 주님을! (요 12: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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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어린 나귀를 타신 주님을! (요 12:12-19)

미국에 ‘크리스천 체육인협회’(Fellowship of Christian Athletes-FCA)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미국의 전국적인 조직으로 스포츠인들의 친목과 복음전도를 위해서 설립된 단체입니다. 

이 ‘크리스천 체육인협회’에 윌리 제프리스(Willie Jeffries, 1937-)라는 회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우스캐롤나이나 주립대학(South Carolina State University)을 비롯해서 29년 동안 대학축구팀 감독을 맡아 60% 이상의 승률을 일굴어낸 유명한 사람입니다. 박력 있는 웅변가이기도 한 그는 아주 신앙심이 투철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에게는 니일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들 역시 아버지를 닮아 운동도 잘하고 인물도 아주 잘 생겼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아버지처럼 신앙심이 좋은 사람입니다. 단 하나 아버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아버지는 아주 말을 잘하는 사람인데 비해 아들 니일은 심한 말더듬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니일에게 ‘크리스천체육인협회’에서 20분간 연설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심한 말더듬이인 니일이 미국 전역에서 모인 수많은 명사들과 운동선수들 앞에서 연설을 하는데, 연설 도중에 사람들은 니일이 일부러 말더듬이의 흉내를 내는 줄 알고 웃고 난리가 났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7-8분 정도면 충분한 연설을 심한 말더듬이인 니일은 땀을 흘리며 20분에 걸쳐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연설을 마쳤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니일이 자신의 이야기를 다 마친 후에 ‘누구든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바치겠다고 헌신하는 사람이 있으면 앞으로 나오라’고 헌신에 초청을 했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젊은이들이 연단 앞으로 나와 자신을 주님께 드리겠다고 헌신을 다짐했습니다. 다른 어느 모임 때보다도 많은 사람이 헌신을 다짐했던 것입니다. 

말더듬이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그리고 말더듬이의 연설을 들어준다는 것도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가슴 속에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품고 있는 말더듬이 니일의 연설은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에 감동을 주었고, 헌신을 다짐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달변가여야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연설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모임에서 앞에 나가 말을 하라고 하면 쉽게 허락을 하지 못합니다. 말을 잘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말을 잘하느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슴에 무엇으로 채워져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허황되고 가치 없는 정보들로만 가득 차 있다면, 그리고 그 많은 정보들이 그의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다 하더라도 그의 말은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말을 잘하고 똑똑한 사람’이라는 평을 들을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아니 자주 말더듬이와 같이 뭔가가 많이 부족한 사람을 더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그를 통해서 더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가십니다. 그건 비단 사람만이 아닙니다. 보잘 것이 없는 것을 크게 사용하시는 경우도 참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나 물건이나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을 사용하시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그것을 통해서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3년 동안의 공생애를 마치시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길이 어떤 길인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오시면서 3번이나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마태복음 16:21, 17:22-23, 20:18-19) 

그런데 제자들은 그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는 것을 알고서는 큰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뭔가 큰 변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뭔가 큰일을 이루실 것이고, 그러면 지금까지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닌 자기들도 뭔가 큰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시 많은 사람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었습니다. 그 때는 예수님께서 재빨리 자리를 피해버리셨지만, 지금 예수님께서 작정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는 뭔가 큰일을 하시기 위함이 분명합니다. 그건 당연히 예수님을 따르고 지지하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뭔가 큰일을 하기에 안성마춤인 시기였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언급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가 바로 명절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명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크게 지키는 유월절을 말합니다. 유대 역사학자인 요세푸스(Josephus) 의하면 유월절이 되면 이스라엘 전역에서 예루살렘에 찾아오는 사람이 무려 270만 명 가량이나 된다고 합니다. 더구나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아주 큰일을 행하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9절에 보면, 죽은 나사로를 살렸다는 것 때문에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신 예수님도 볼 겸, 또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도 볼 겸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어쩌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왔을 때,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그렇게 몰려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 19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예수님을 죽이려던 사람들조차도 ‘예수님을 죽일 수 없다’고, ‘예수님을 죽일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몰려들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던 예수님께서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와서는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쳤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왕을 모시는 것처럼 환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가 있음을 보시고는 그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이야기가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3개의 복음서 기록과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서의 기록에 약간 다른 점이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벳바게라는 동네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 둘을 한 마을로 보내십니다. 가서 나귀 새끼를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끌고 오자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그 나귀의 등에 깔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놓기도 했고, 종려나무 가지를 길가에 펴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나귀의 등에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런 세 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 나귀를 끌어 오게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조금 다릅니다. 오늘 본문의 문백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실 계획이 없었습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먼저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가서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라고 소리치며 예수님을 왕으로 맞이했습니다. 
  
종려나무(Palm Tree)는 그 지역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종려나무를 번영과 승리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존경을 표시하는 나무로 사용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왔다는 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존경하며 맞이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왕으로 환영하며 맞이하자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가 있는 것을 보시고는 그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세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나귀에 올라타시자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소리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먼저 당신이 왕이심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강했다는 것을 말하고,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는 모습을 보고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맞이했는지를 세 공관복음서에서는 자세하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먼저 예수님을 왕으로 맞이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맞이하자 그 때서야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리고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사람들이 어떻게 했는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해주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먼저 당신이 왕이심을 사람들 앞에 보여주셨고, 그러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서 예수님을 왕으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사람들이 먼저 예수님을 왕으로 맞아들였고, 사람들의 호응에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왜 요한복음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마지못해 나귀를 타신 것처럼 기록해 주고 있은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신 행동에 대해서 제자들이 나중에야 그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고 말씀해 줍니다. 스가랴 9:9절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이스라엘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는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때 예수님께서 왜 어린 나귀를 타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고, 단지 나중에야 그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의미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바라던 그런 왕이 아니셨다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보고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맞이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었고, 무거운 세금으로 인해 너무너무 힘든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 왕좌에 앉아 있는 헤롯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런 힘들고 지친 마음에는 아랑곳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로마 황제의 눈치를 보면서 자기의 권좌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온갖 아부와 술수를 다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헤롯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움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로마의 압제와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기 위해서는 헤롯 왕 말고 다른 사람이 나타나야만 했습니다. 헤롯처럼 로마 황제의 눈치나 보는 사람 말고, 로마에 저항해서라도 나라의 권리를 되찾아오고, 진정으로 백성을 위해주는 사람이 왕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했던 것입니다.
  
그런 간절한 바램이 예수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같은 분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면 그런 한 맺힌 삶에서 이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왕으로 맞이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소리치며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맞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관복음서의 기록에는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때에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소리쳤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기록하고 있고, 누가복음에서만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소리쳤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분명하게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소리치며 맞이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나는 너희들이 바라는 것처럼 그런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다’는 것을 행동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정말 이스라엘의 왕이시라면 어린 나귀를 타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대부분 왕의 대관식에서 새로운 왕은 말을 탑니다. 건장하고 우람한 말을 탑니다. 그것은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무력으로 나라를 정복하고 세계를 정복할 정복자다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늠름한 말을 탔습니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을 점령하는데 성공한 로마의 티투스 장군은 로마에서 황제로 취힘할 때에 4마리의 군마가 이끄는 이룬마차를 타고 성에 들어갔습니다. 그 뒤로는 수많은 신하들과 장군들이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렇게 화려하고 거대한 행렬을 해야만 자신의 위상을 보여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른 왕들이 그런 것처럼 말을 타지 않으셨습니다.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것도 힘이 없는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그들이 기대한 것처럼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줄 그런 힘과 능력을 행사하는 왕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었습니다. 

군마는 무력과 권위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왕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신다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런 왕으로 추대해 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왕이기를 포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런 힘과 권력자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스가랴서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겸손하셔서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군마를 타신 분이 아닙니다. 초라하고 볼품없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것도 어린 나귀를 타고 가셨습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까지 들어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될만큼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무력으로 세상을 정복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계실 때,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가롯 유다가 군사들을 이끌고 그곳에 찾아갔습니다. 가롯 유다가 군사들과 짜고서 예수님께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들이 체포해야 할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가르쳐주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자 군사들이 예수님을 체포했습니다. 

그 때 곁에 있던 베드로가 가슴에 품고 있던 칼을 꺼내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그리고는 이런 말씀을 덧붙여 하십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군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태복음 26:53) 예수님께서 원하시기만 한다면 하늘의 군사 열두 군단을 부르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후 70년 티투스 장군이 강렬하게 저항하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위해서 이끌고 온 군사의 수가 4개 군단이었습니다. 4개 군단의 무차별한 공격에 끝까지 저항하던 이스라엘이 결국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로마가 4개 군단으로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다면, 10개 군단이 얼마나 큰 숫자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군대 10개 군단을 거느리고 왕좌에 오르려고 하셨다면, 헤롯왕을 몰아내고 왕이 된다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와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힘없이 붙잡히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에 힘없고 볼품없는 어린나귀를 타시더니 붙잡히실 때에도 힘 한 번 쓰지 않으시고 붙잡히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힘없는 모습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주님을 본받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린 나귀를 타신 주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고, 그 주님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주님처럼 겸손하게, 힘없는 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힘이 없으셨기 때문에 힘없는 자처럼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힘은 헤롯왕을 몰아내는 정도가 아니라 당대 최강국인 로마까지도 점령할 수 있을 만큼의 큰 힘을 가지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신데, 그 능력에 무슨 한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단 한 번도 그 능력을 권력을 잡으려는데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가지신 힘을 당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의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모습이 있다면 바로 그런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당신이 가지신 힘을 정복하고, 다른 사람을 압제하는 데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가지신 힘을 단 한 번도 자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나 성도들은 힘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런 것에 너무 익숙해져버렸습니다. 여기에서 한국교회가 세상에 주는 영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성도들이 겸손하게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의 모습 속에 세상으로부터 칭찬 받는 모습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교회가 힘을 가지면 그 힘을 선한 곳에 사용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교회의 힘을 자랑하려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들이 그런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권력의 중심지로 들어가려 합니다. 교회가 권력을 가지면 중세교회처럼 타락하고 맙니다. 중세시대에는 교회의 힘이 세속 권력의 힘보다 강했습니다. 교황이 한 나라의 황제를 해임시킬 수도 있도, 왕좌에 오르게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권력이 결국 교회를 썩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교회에 주신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교회가 부흥되었습니다. 큰 교회들도 많아졌습니다. 돈도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렇게 축복 받은 한국 교회가 세상에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오히려 가진 것이 없고 초라했지만, 선교초기 한국교회는 세상에 빛이었고 소금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과거 그 때보다 교회 숫자도 많아졌고, 성도들의 숫자도 많아졌습니다. 목사의 숫자도 많고, 교회 직분자 숫자도 많아졌습니다. 몇 천 명, 몇 만 명 모이는 대형교회들도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그 힘을 어디에 쓰고 있습니까? 
  
누가 높은 자리에 올라갈 것인가 하는 데에 열을 올리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들이 연합하여 한국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하는데, 연합회라는 이름으로 모인 곳마다 서로 회장이라는 권력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이전투구하고 있습니다. 그 연합된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한 것이 무엇입니까? 지난 해 3월 국가조찬기도회에서 그런 것처럼 대통령을 무릎 꿇게 하는데 사용된다면 그게 어찌 겸손히 어린 나귀를 타신 주님의 모습을 닮는 것이겠습니까? 교회가 커지면 그 힘을 총회장이 되는데 사용하려 합니다. 
  
교회가 힘을 가지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이 가지신 힘을 사랑하고 섬기는데 사용하신 것처럼, 오늘의 한국교회도 그래야 합니다.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는 데 가진 힘을 써야 합니다. 

중세를 대표하는 신학자 가운데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라는 분이 있습니다. 당시 교황이던 이노센트 4세(Innocent Ⅳ)가 라테란 성당 문으로 보물이 가득 담긴 자루들이 옮겨지는 것을 보면서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게, 이제는 교회가 ‘은과 금은 없어도’라고 말하던 시대는 지나갔네. 저 보물들을 보게나.” 

사도행전 3장에서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를 고쳐줄 때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잇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말하면서 그 앉은뱅이를 고쳐준 것을 빗대어 한 말입니다. 그러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렇게 대꾸했다고 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교황님, 오늘날의 교회는 은과 금은 있지만, 대신 앉은뱅이를 향해 ‘일어나 걸으라’고 말할 수 있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혹 그런 모습 아닙니까? 교회가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되었습니다. 세상을 환하게 밝혀줄 불이 꺼진 등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 있습니다. 건강도 있고, 은사도 있고, 열심도 있습니다. 재력도 있습니다. 어쩌면 세상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것을 단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축복이라고만 생각하십니까? 그것을 가지고 자랑하고 우쭐거린다면, 그건 어린 나귀를 타신 주님을 섬기는 신앙인의 모습은 결코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욕망이 있습니다. 남들보다 더 잘 살고 싶은 욕망도 있고, 남들보다 더 가지고 싶은 욕망도 있습니다. 남들보다 더 강해지고 싶은 욕망도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우리가 욕망하는 그것을 소유하고 그것을 누리며 사는 것이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아직도 우리 안에 군마를 타고 세상을 호령하는 예수님을 따르고 싶은 욕망이 있지 않습니까? 세상이 주는 욕망 말입니다. 우리 주님이 거부하신 그 욕망을 따라 살지 마십시다. 주님이 주신 복을 많이 가지십시오, 그러나 그것으로 세상에 자랑거리로 삼거나 그것으로 세상을 지배하려 하지는 마십시다. 우리 주님은 군마가 아니라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신 주님을 바라보며 사십시다. 그 주님을 닮는 신앙인이 되십시다. 우리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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