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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고난받는 종의 노래 (사 5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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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받는 종의 노래 (사 50:4-9)

오늘은 고난을 당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내일부터 한 주간은 입성하셔서 고난을 당하신 고난 주간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700년에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려고 종으로써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실 것을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이사야 42:1-9 제1종의 노래, 49:1-7 제2종의 노래, 50:4-9 제3종의 노래, 52:13-53:12까지가 제4의 종의 노래입니다. 고난 받는 종의 노래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데 오늘은 제3 종의 노래를 통하여 그 고난을 구체적으로 고난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자신에게는 고통이 따르지만 인간 구원을 위한 거룩한 고난입니다. 

지난 주일에 완전한 대 제사장으로써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불완전한 동물의 피를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자신의 피를 단번에 드림으로 온전한 제사를 드린 하나님께 순종하신 주님을 본 자는 것을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의 고난은 자신의 것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종으로써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을 따른 것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어떤 고통을 당하셨으며 어떻게 그 고통을 이기셨는지 오늘은 그것을 상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1. 모욕을 참으시며 당하신 고통(4-6)

예수님은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거나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으신 일이 없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학자의 혀를 주셔서 많은 사람에게 가르치시고 고난 당하는 자들을 어떻게 도울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병든자를 고쳐주시고 죽은 자를 살려주셨고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또 듣는 귀도 학자같이 잘 알아듣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시는 뜻을 바로 깨달아 각가지 수치와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고 물러서거나 후회함이 없이 다 몸으로 감당하신 것입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수염을 뽑히며 뺨을 때리고 침 뱉음을 당하는 것은 최고의 모욕이었습니다. 

마26: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자가 누구냐라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모욕과 조롱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할 수 없음을 아신 것입니다.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를 제가 지고 가오리니, 우리들에게도 귀가 열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열리고 입이 열려 내게 말씀하시는 뜻을 바로 깨달아야 거역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고 순종하여야 할 것이며 그리고 지혜로운 말을 할 수 있는 입이 열려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라면 어떤 모욕도 이긴다는 것입니다. 


2.부끄러움을 참으시며 당하신 고통(7-8)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무시를 당하고 조롱을 당하면 얼굴색갈이 달라집니다. 빨개지고 독한 사람은 하얗케 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조롱하고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신 사람들 말로 모욕하고 뺨을 때리는 모욕도 그 얼굴이 부싯돌같이 되었다는 말은 굳은 의지를 표현하는 말로 전혀 포기하거나 후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어떤 고난이나 어려움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순종입니다. 

바울은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지금에 고난 보다 앞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보고 참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아픔은 장차 받을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그 부끄러움을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도우셔서 모욕하여도 마음이 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각오하고 어려움을 견디어 냈다고 하시면서 의롬다 하신이가 내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오늘까지 믿음을 지키고 사명을 감당했다면 그것도 자신의 힘이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 곁에 가까이 계셔서 우리를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3.정죄를 참으시며 당하신 고통(9)

이 땅에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정죄할 자가 누구입니까? 죄인이고 피조물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을 죄인이라고 판단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을 잡아 재판을 하고 그의 죄를 사형에 해당하다고 사형에 넘겨준 자들이 있었습니다. 죄인인 우리들이 누구에게 정죄를 당하고 비난을 당하면 고민하고 근심합니다. 인기인들이 자살하는 이유가 안티 팬들의 비난이라고 합니다. 근거없이 욕하고 싫어하고 인기가 떨어지면 비관하고 자살할 생각을 한답니다. 

본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를 정죄할 자가 누구뇨 그들은 다 옷까지 해어지고 좀에게 먹힐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예수님을 정죄하는 가운데에서 낙담하지 않으시고 그가 가시고자 하는 길을 가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임산부가 임신후 초음파 검사를 하니까 딸이라고 했답니다. 초산이라서 여러 가지 고통은 있었지만 부부가 미리 아이 이름을 짓고 날마다 뱃속에 있는 아이와 이름을 부르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정이 들었습니다. 뱃속에 있지만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면 배가 불러오는 고통을 참았습니다. 드디어 출산할 날이 왔습니다. 배를 찢는 출산의 아픔이 왔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그 고통을 참았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위에서 온 몸의 물과 피를 흘리시면서 6시간의 고통을 여러분과 저의 이름을 부르며 고통을 참으신 줄로 믿습니다. 

이 땅에 태어날 우리들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참으셨습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고통이 없으면 우리의 생명은 없습니다. 고난주간은 겨울과 봄 사이에 서 있는 주일이요 십자가는 그 기운을 바꾸는 능력이 됩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고난 주간에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의 길을 오르시는 그 길을 무거운 걸음으로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슬픔과 고통의 사건 뒤에는 새 생명의 환희와 감격이 휩싸이게 될 것입니다. 고난 주간은 하늘의 부요가 이 땅에 이식되는 시간이며 죽음이 생명으로 바뀌는 능력이 나타나는 자리입니다. 이 한 주간을 주님의 고통을 묵상하면서 생명의 은혜가 충만한 한 주간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학생이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절에 가면 부처님은 자비한 얼굴을 하고 사람들을 맞는데 교회에 가면 피흘리는 예수님이 흉측한 모습으로 맞습니까? 

그 대답은 이렇습니다. 불교 교리는 고집멸도입니다. 사성제라고 하는 것인데 인간은 고난에서부터 오는데 그 고난은 어떤 것에 집착으로부터 오고 그 집착을 없애야 하는데 그것은 도를 깨달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 도를 깨달으려면 엄청난 수양이 필요하여 무를 만들어야 하는데 거기에 도달한 분이 석가모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높은 산에 올라서서 앉아서 이렇게 올라오면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공은 이루고 무는 이룰지 몰라도 구원은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노력이나 힘이 아닌 우리가 당할 고난과 저주를 몸소 당하심으로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거룩한 나라로 인도하시려고 온 몸을 찢어 물과 피로 우리를 직접인도하신 길이 되셨습니다. 이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고난 받는 세상에 참된 구원의 길을 전하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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