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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그가 찔림은 (사 5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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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찔림은 (사 53:1-7)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께서 나귀새끼를 타시고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많은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환영했습니다. 내일부터 부활절 전 토요일까지 한 주간을 ‘고난주간’ 혹은 ‘거룩한 주간’이라고 부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목요일 유월절 만찬을 제자들과 나누신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하속들에게 체포되십니다.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그리고 빌라도에게 넘겨져서 사형언도를 받습니다. 그리고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금요일에 숨을 거두십니다. 우리는 이 고난주간을 경건하게 보내야 하겠습니다. 기도와 전도에 힘쓰는 주간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53장은 ‘고난 받는 종의 노래’로 불리워집니다. 이사야는 주전 764-740년경 부름받은 예언자로서 이 땅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에 대해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700년 전에 예언되었지만 예수님의 양편에 두 강도가 함께 달릴 것과 부자의 묘실에 장사될 것이 정확히 예언되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심도 예언 되어 있습니다. 

9절“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7절“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고난주간이 되면 저는 어릴때 주일학교 선생님께 들었던 ‘철이 이야기’가 늘 생생하게 기억되곤 합니다. 철이의 어머니는 시장에서 좌판을 열어 장사를 하시는데 얼굴에는 심한 화상의 흔적이 남아있어서 늘 한쪽을 수건으로 감고 생활하셨습니다. 철이는 그런 엄마가 못 마땅했습니다. 친구들이 알까봐 하교 길에 시장 골목길을 지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은 어쩔 수 없이 시장 골목길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조마조마 했는데 그만 엄마의 눈과 철이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철이는 애써 외면하고 고개를 돌려버렸습니다. 물론 어머니도 무언가 입을 여시다가 그만 다무셨습니다. 그리고 못 본체 고개를 돌리셨습니다. 일을 마치시고 들어오신 어머니는 조용히 철이를 부르셨습니다. “철이야! 흉한 화상의 흔적이 있는 엄마가 창피하지?”하고 물으셨지만 철이는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초지종을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한살 때 젖을 먹여 재우고 난 밭에 일하러 갔단다. 그런데 ‘불이야!’ 하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그만 우리 집이 불타고 있는 거야. 나는 미친 듯이 뛰어갔지. 이미 불은 지붕까지 타 올라갔고 누구도 들어갈 수 없었어. 그러나 난 그냥 있을 수 없었어. 왜냐하면 너를 뉘여놓고 나왔으니까. 머리에 썻던 수건을 물에 담갔다가 다시 쓰고 불속으로 뛰어 들어 갔단다. 다행히 너를 찾아서 품속에 품고 다시 뛰어나왔지. 그러나 그 와중에 엄마의 얼굴이 심한 화상을 입게 되었어”

엄마는 헌 가방에서 빛바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진은 엄마가 결혼하기전 처녀때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엄마는 너무나 미인이셨습니다. 철이는 엄마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무릅을 꿇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엄마, 정말 잘못했습니다. 저를 불속에서 구하시고 화상을 입으셨는데 전 그것도 모르고 엄마를 얼마나 많이 원망했는지 몰라요.” 엄마는 철이를 꼭 안아주셨습니다. 

철이가 엄마를 부끄러워 한 것처럼 우리도 종종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다음은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삶을 살아오셨습니까?

1.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해를 받으셨습니다.

1절에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한 것처럼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왜 오해를 했습니까?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메시야는 영광스런 메시야요 큰 능력으로 임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왕과 은 메시야였습니다. 그러나 2절의 말씀처럼 그분은 고운모양도 풍채도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도 없었습니다. 너무나 평범했습니다. 왕궁이 아니라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왕의 아들로 오신 것이 아니라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고난도 죄가 많아 형벌을 받는다고 오해했습니다.

4절“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분은 우리의 질고(질병)를,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담당하셨는데 그분의 죄 때문에 받는 징계라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변명하거나 억울해하지 않았습니다. 


2.예수 그리스도는 멸시와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3절“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군중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구세주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외치던 군중들은 몇일 못되어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마26:56)

모두가 예수를 버려도 나만은 절대로 그러지 않으리라고 장담하던 베드로도 어린 계집종 앞에서 예수를 모른다고 3번씩이나 맹세하며 부인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친 형제들조차 예수님을 이해해주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누군가에게 멸시나 버림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가진 것이 없어서, 많이 배우지 못해서 멸시받아 보셨죠?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예수님도 멸시를 당하셨어요. 누군가에게 버림당한 경험이 있으십니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도 가장 믿었던 사람들에게 버림당하셧습니다. 주님은 왜 멸시받고 왜 버림당하셨나요?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배신과 버림을 당하셔도 그분은 입을 열지 않고 침묵하셨습니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 깎는자 앞에선 잠잠한 양같이 ...


3.예수 그리스도는 대속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5-6절“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분이 찔림은 그분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 허물은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입니다. 그의 몸이 창에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대속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대리적 형벌이라고도 합니다. 요한복음1:29절에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 하다가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을 하게 됩니다. 백성을 내어주지 않는 바로의 고집을 꺽기위해 10가지 재앙을 주시는데 마지막 10번째 재앙이 장자의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집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는 것입니다. 죽음의 사자는 피를 바른 집은 뛰어넘어 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는 보호받았지만 애굽의 장자는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 장자가 보호받은 것은 바로 어린양이 대신 희생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유월절의 희생양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양과 같이 목자의 음성을 외면하고 딴 길로 갔지만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영혼의 상처가 치료받고 육신의 질병이 치료받았습니다.

벧전2: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어네스트 고든’이 쓴 “콰이강의 다리”라는 글에 아주 귀한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2차대전 일본군에 포로된 영국군 포로들은 미얀마 지역의 전쟁 물자 수송을 위한 철교건설에 동원되었습니다. 작업에서 돌아오면 늘 연장을 점검합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100개중 삽1개가 부족했습니다. 일본군 장교는 총을 빼어들고 범인이 나올 때까지 한명씩 총살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때 한 포로가 걸어 나왔고 그는 즉석에서 사살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다음날 다시 세어본 삽은 100개가 되었습니다. 잘못된 계수였습니다. 포로들은 의로운 죽음으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수용소안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서로의 양식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병든 사람을 간호하기 시작합니다. 그곳은 비록 극한 상황에 처해있는 수용소이지만 서서히 천국으로 변해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무죄한 죽음, 대속적인 죽음이 우리의 죄를 씻고 우리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것이요”


4.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철저히 희생하셨습니다.

10절“..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12절“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예수께서는 자신을 버리심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내어 버리셨습니다. 십자가는 위대한 맞교환의 장소입니다. 예전에는 물물교환을 했습니다. 농부는 농사를 지어 쌀을 가지고 나가면 어부는 고기를 잡아 생선을 가지고 나와 서로 동일한 가치로 맞교환을 했습니다. 이것이 물물 교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생명과 우리의 불의와 죄악 저주와 불행을 맞교환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고 우리는 살아났습니다. 

빌립보서2:8절에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예수님의 희생을 설명합니다. 이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이타적인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고난주간에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이 사랑하셨던 영혼들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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