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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자기의 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 (눅 23:3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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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 (눅 23:33-38)

옛날이야기입니다. 경상남도 김해에 농사를 지으면서 교회생활을 잘하는 집사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동생으로부터 소포가 하나 왔습니다. 풀어보니 작은 약봉지 같은 것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한 봉지를 찍어 조금 혀에 대어보니 맛이 몹시 썼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먹는 보약이구나 생각한 그 집사님은 아침, 저녁 식사 후 끓여 한 대접씩 가족과 아이들에게도 마시게 했습니다. 

아이들이 쓰다고 먹지 않으면 꾸짖었습니다. “삼촌이 생각해서 보낸 귀한 미국 보약을 마시지 않겠다니 될 말이냐? 어서 마셔! 입에는 쓰지만 몸에는 다 이로운거야.” 초등학교 4학년인 둘째 아들이 다음 날 아침에 “아버지, 이걸 마시니 밤에 잠이 오지 않아요.” 합니다. “그래, 정신이 맑지? 그게 보약의 효력이야. 잠이 안 오면 공부하면 되지” 이웃사람들이 오면 자랑을 하면서 보약을 한 사발씩 안겼습니다. 

이렇게 그 보약이 거의 다 떨어져 갈 때 동생으로부터 편지가 한통 왔습니다. 소포와 함께 부친다는 것이 깜빡 잊어 이제야 부친다고 하면서 “소포로 보낸 것은 <커피>라는 것이며 설탕을 타서 식후에 한 컵씩 마시는 것이고, 아이들에게는 되도록 주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라고 적혀있었습니다. 무지하여 커피를 보약으로 알고 아이들에게 하루 세끼 꼬박 먹였다는 재미나는 이야기입니다. 

무식에 대한 이야기 하나 더 하겠습니다. 주요머리기사를 전해주는 텔레비전 헤드라인뉴스를 보던 동생이 “누나 헤드가 뭐야?” 하고 묻습니다. 누나가 대답합니다. “이 멍청아 머리 아니야 머리!!” 동생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라인은 뭐야?”, “이런 바보야 선 아니야 선” 동생이 또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헤드라인이 뭐야?” 누나가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 “응... 그건 가르마야” 했답니다. 때로는 알지 못해서 우스운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알지 못해서 인생을 잘못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더욱이 진리에 대해 무지하고 무식하여 일평생을 헛되이 보내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오늘 고난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맘때면 꼭 생각나는 사람 중에 [가야바]라고 하는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공의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아, 한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편할 수 있다면 죽어야지, 죽여야지, 그가 선한가, 악한가, 의로운가, 불의한가를 물어볼 필요도 없다. 온 민족이 편할 수 있다면 시끄러운 사람은 없애버려야 한다.” 면서 자기가 가장 똑똑한 것처럼 떠들어 댔습니다. 자기는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떠했습니까? 그가 정말 다 아는 현명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가야바는 가장 어리석고 가장 미련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만 무지한 사람이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불쌍한 사람 중에 하나는 모르는 사람입니다.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 무지한 사람입니다. 더 불쌍한 사람은 자기가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지식에 목숨을 거는 사람입니다. 바로 가야바 같은 사람이 구제받을 수 없는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백성들은 서서 구경하고 관원들은 밑에서 큰소리로 조소를 합니다. “남들은 구원한다고 큰 소리 쳤는데 어디 한번 너 자신을 구원해 봐라.”  키득거리며 소리 소리를 지릅니다. 이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일곱 마디 말씀을 하십니다. 

그 일곱 마디 말씀 가운데 맨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 눅23:34의 말씀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생각 같아서는 “아버지여, 저희를 심판하여 주옵소서. 저희 위에 깨달을 수 있는 벌을 내려 주옵소서.” 라고 기도할 수도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는 용서의 기도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자하는 저들을 사하시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저들이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들이 지금 하는 짓이 어떤 짓인지를 모르고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그럴까요?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데 왜 몰랐습니까? 못 박혀서는 안 되는 사람이 못 박히고 있다는 사실을 빌라도도 알지 않았습니까? 예수 대신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소리치던 백성들도 한 때는 그분을 “다윗의 자손이여, 구원자 예수여” 라고 부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희롱하고 있는 병정들도 이 사람이 옆에 있는 강도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몰랐다는 것입니까? 천하에 똑똑한 사람들이요, 눈으로 본 바요, 귀로 들은 바를 모른다니요 말이 됩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저들이 모른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바로 <영적무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똑똑하고 학식이 있고 잘난 척해도 진리를 모르게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무지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진리를 아는 눈이 숨겨지면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보되 깨달음이 없습니다. 

구약성경 호 4:6절에 보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는 책망의 말씀이 나옵니다. 지식을 버렸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 이미 가지고 있는 양심, 이미 가지고 있는 정직을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 소중한 믿음을 버렸기 때문에 알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망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실 무지는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여러 형태로 나타납니다. 죽음에 이르는 종말적인 심판으로 나타나고, 물질적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경제적인 심판으로 나타나고, 때로는 육체적으로 병들고, 세상이 망가지고, 정치적으로 심판하시지만, 이 모든 심판 이전에 영적으로 심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무지입니다. 무지하여 총명이 흐려집니다. 무지하여 이성이 제 구실을 못합니다. 무지하여 진리를 모르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모든 것을 모르게 되면서 교만해집니다. 교만하니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지으니 어려움을 당합니다. 어렵다보니 병이 듭니다. 병이 드니 죽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인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무지는 자랑이 아닙니다. 무지가 바로 심판의 시작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이 우리를 무지에 빠트리느냐 하는 문제를 알아야 합니다. 유명한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말하기를 사람들이 어리석어지는 것은 우상에 빠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 우상의 첫째가 향락주의의 우상이라고 했습니다. 향락에 빠지는 사람은 정신을 못 차립니다. 잘못된 향락에 빠지면 어리석어집니다. 

향락은 사람을 무지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시장성이라는 우상이라고 했습니다. 즉, 항상 손익관계를 계산하는 것입니다. 대인관계에서든지 모든 관계에서 계산을 하며 삽니다. 이 사람을 알아두면 무슨 유익이 생길까, 이 일을 하고 나면 나에게 무엇이 생길까... 매사에 손익을 따지다 보니 진리에는 무지해 집니다. 결국 망가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를 뭐라고 했느냐하면 동굴의 우상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깊은 동굴에 빠져 있으면 전혀 밖을 못 보듯이 자기 경험, 자기 철학, 자기 고집, 자기집착에만 빠져서 정말 답답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베이컨은 종족의 우상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쉬운 말로 인간성에 메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인간이기 때문에” 라는 말을 합니다. 즉 자기 변명에 빠져서 사는 사람입니다. 이 속에 무슨 진실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 변명 가운데 어떻게 바른 지식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모든 것들이 우상이요, 이것들이 우리를 무지에 빠지게 만듭니다. 

뭐니 뭐니 해도 무지의 결정체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무슨 일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것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전혀 모르는 영적무지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고서야 깨달음이 있고, 믿고서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란 정당한 기초 위에 있어야 합니다. 정당하지 못한 것을 믿음으로 여기면 그것 또한 무지한 것입니다. 때로 내 결정, 내 판단 자체가 병들었다는 것을 모릅니다. 이성이 병들었어도 알지 못합니다. 늘 예수님을 책잡아 고발하기를 즐기던 바리새인들이 그렇고, 제 배를 불리기 위해서 예수님을 은30냥에 팔아먹은 가룟 유다가 그랬습니다. 가야바가 망언을 하는 것도 그렇고, 빌라도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영적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백성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구경거리로 삼을 수밖에 없었고, 관원들이 비웃을 수밖에 없었으며, 군병들이 희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무지하여져서 판단의 능력과 지혜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똑똑하다고 자랑합니다. 무엇을 많이 안다고 떠들어댑니다. 그러나 정말 알아야할 것을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의 알 것을 다 알고, 어떻게 하면 손해를 입고 어떻게 하면 이익을 얻는다는 따위에 능통한 정말 똑똑한 사람일지라도 신앙 안에 들어오면 제발 다 버려야합니다. 나의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면,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지금도 기도하고 계신다면 가야바나 빌라도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전히 예수님을 고발하고 조롱하고, 서서 구경하며 십자가에 못 박으며, 마침내 죽이고 말 것입니까? 

더 이상 나의 똑똑함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나의 잘난 행동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영적 무지를 안타까워하며 기도하게 하는 일은 없어야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영적무지로부터 깨어나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제는 무지로 인하여 예수님을 파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또 다시 무지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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