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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죽음을 이기는 신앙 (고전 15:5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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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이기는 신앙 (고전 15:55-58) 


부활주일을 맞아 주님의 전에 나아와 예배하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보통 성탄절을 기쁜 날로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성탄절은 기쁜 날이 아닙니다. 죄송한 날이지요, 물론 말도 못하게 감사한 날이기도 하구요. 우리들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그것도 마굿간에서 태어나셨는데 그걸 기쁘다고 말할 염치가 저는 좀 없는 것 같습니다. 감사하여 감격은 하지만 말입니다.

저는 오늘 부활주일이 제일 기쁜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도 죄송하고, 더더군다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더 말도 못하게 마음 아프고 죄송하고 속상한데 그냥 거기서 끝나셨다면 얼마나 죄송하고 안타까웠을 터인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그 모든 근심과 걱정과 염려와 죄송스러움까지도 다 말끔히 걷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활주일이 제일 기쁜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말씀이라는 표현 속에는 여러 가지 뜻과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계시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전자 제품과 같은 것을 사면 제일 먼저 보는 것이 사용설명서입니다. 그래야만 그 제품의 기능과 사용방법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을 구입했다고 하여도 그 제품의 기능과 사용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그 물건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저도 스마트 폰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아주 조금 밖에 사용할 줄 모릅니다. 이유는 제가 가지고 있는 스마트 폰의 기능과 사용방법을 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스마트 폰은 비쌉니다. 비싼 이유가 상상도 할 수 없이 많은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 같은 경우는 그 기능을 사실 1%도 사용할 줄 모릅니다. 1%의 용도를 위하여 100%의 비싼 가격을 지불한 셈이니 어리석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귀하고 비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귀해도 우리가 누군지를 모른다면 그 가치를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아는 것만큼 가치 있고 유용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세상에 대하여 아는 것이 많아도 정작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지 못합니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스마트 폰을 알려면 스마트 폰을 만든 사람을 알아야만 합니다. 세상에 스마트 폰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을 그것을 설계하고 만든 사람입니다. 스마트 폰을 세상에서 제일 정확하게 잘 아는 사람이 그것을 소비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하여 만든 것이 카다로그입니다. 그것을 만든 사람은 스마트 폰에 대한 모든 것을 카다로그에 계시해 놓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알려면 우리를 만드신 분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를 결국 알지 못하게 됩니다. 장로교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요한 칼빈이 기독교강요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그 기독교강요라고 하는 유명한 책의 첫 이야기의 제목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가막힌 말인지 모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몰라도 다른 것을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면 자기 자신은 결국 알 수 없습니다.

최희준씨의 하숙생이라는 유명한 노래가 있습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는 가사로 유명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생의 문제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그냥 정처없이 떠 돌아다니는 구름처럼 살다가 흘러가는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면 사람은 방황하지 않습니다. 자기 누구인지를 압니다. 어디서 왔는지를 알기 때문에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압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방황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무엇을 위하여 이 땅에 태어났는지를 알았습니다. 그 정확한 푯대를 향하여 사도바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인생을 방황하지도 않았고 낭비하지도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자는 아니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잘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고 하나님은 무한하신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유한한 우리는 무한하신 존재이신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어떤 유명한 철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해되어지는 신은 이미 신이 아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여기에 우리들의 심각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계시라고 합니다. 계시란 하나님이 자신의 베일을 벗으시고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 주시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참 다행스러운 일은 하나님은 자신을 감추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곳곳에 자기 자신을 드러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 속에 자신을 드러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정직하고 양심적인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알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 폰 하나만 보아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스마트 폰을 만든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누가 스마트 폰을 우연히 생겨나 진화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세상 누구도 그를 온전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미친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다 압니다. 스마트 폰만 보면 다 압니다. 그것을 만든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스마트 폰과 세상은 그리고 우리 인간은 품질이 다릅니다. 우리가 미치거나 바보가 아니라면 우리는 최소한 두 가지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와 세상을 만드신 분이 계시다는 것과 그 분이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상을 통하여 전지전능하신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신이 정작 누구신지 구체적으로 아는 것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신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하게 알려면 보다 더 구체적인 특별한 계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그 특벽한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자기가 누구이신지 어떤 분이신지를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면 어떤 신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보다 더 특별한 계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드러내 보이시고 말씀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이 땅에 인간으로 태어나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입으로도 말씀하셨지만 삶으로 행동으로 사건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계시를 하셨지만 가장 큰 계시를 저는 세 가지로 이해합니다. 십자가와 사람이 되심과 부활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은 ‘내가 너를 이만큼 사랑해’를 말씀하시고, 사람이 되심을 통하여 ‘난 너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원해 내고 말꺼야.’를 계시하시고, 부활을 통하여 ‘이게 너희들의 결국이야’를 말씀하십시다.

부활은 최고의 계시 중에 계시입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이 끝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기 때문에 현실에만 집착하고 함부로 절망하고 그리고 더더욱 중요한 것은 삶이 이생 뿐이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상에서만 잘 되려고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늘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죽음이 우리의 결국과 끝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죽음 이후에 부활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친히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말씀하여 주신 우리의 부활을 믿어야만 합니다.

부활을 믿는다면 부활을 믿지 아니하는 세상 사람들과 크게 두 가지가 달라야만 합니다. 첫재 어떤 일을 당하여도 절망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사망입니다. 특히 죽음이 끝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때문에 죽음의 그림자 같은 고통과 역경이 계속되면 우리는 절망합니다.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타협하고 포기합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우리는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큰 소리 칩니다.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생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지 않습니다. 함부로 살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마지막 말씀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않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아멘

부활은 죽음을 이기는 신앙입니다.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절망과 낙심과 함부로 삶을 살게 하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그것을 이깁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강하게 하고 지혜롭게 하고 깨끗하고 바르게 합니다. 예수님이 오늘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부활을 말씀해 주시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마치 부활이 없는 것처럼, 죽음과 사망이 세상의 끝인 것처럼 사는 어리석은 세상 사람과 같이 살아서는 안 됩니다. 

부활을 바라보고 모든 고난과 역경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이겨내며, 부활의 날에 부끄럽지 않기 위하여 헛된 세상일에 빠지지 아니하고 더욱 주의 일에 힘쓰며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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