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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해와 동정과 사랑과 용서 (엡 4: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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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동정과 사랑과 용서 (엡 4:31-32)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에베소서 4장 31∼32절

우리는 어느 곳에 가나 사람들이 우리를 이해해 주고, 이해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아는 사람입니다. 현재 상태만을 보고 우리를 평론할 수는 없습니다. 과거도 알고 현재도 알아야 서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해가 바탕이 돼야 우리가 짐을 서로 나누어 걸머질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이해와 동정과 사랑과 용서가 없는 경쟁 상태로 이웃과 같이 살면 밤낮으로 정죄와 몰이해와 미움과 정죄만이 넘쳐납니다. 서로 이해하지 않고 자신의 편에 서서 이웃을 판단하면 잘못하는 것만 보이기 때문에 평론하고 비평하고 정죄하고 심판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는 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고, 그 사람의 눈과 귀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1. 우리가 항상 겪는 이웃 관계

성경에는 비판하지 말라 그러면 비판 받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만나서 이야기 해보면 우리 대화의 거의 80% 이상은 비판하는 말을 합니다. 어느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그 교회에 대해서 비판하는 말부터 합니다. 어느 사람에 대해서 말해도 비판하는 말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비판하기 때문에 상대방도 당연히 우리에게 비판을 하고 갈등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1절로 5절에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감히 비평을 할 수 없는 절대적인 선인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37절로 38절에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정죄를 받지 않으려면 남을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결점이 없는 사람이 없고 허물이 없는 사람이 없으니 그것을 지적하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할퀴고 찢고 물고 싸우는 도리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메아리쳐야 되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이 말씀처럼 우리가 정말로 정죄하지 아니하면 정죄받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받기 위해서 용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부터 미워하고 심판하고 원한을 갖고 있는 사람을 먼저 놓아 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31절로 32절에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그 많은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처럼 우리도 이웃을 용서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하고 살기 위해서는 비평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비평과 정죄는 화평을 무너뜨리고 분열과 다툼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44절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원수의 손에서 박해를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면서도 저들을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비평과 정죄는 화평을 무너뜨리고 분열과 다툼을 가져옵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을 뿐 아니라 사랑의 향기로 자신을 치는 상대방에게 사랑의 향기를 더해 주는 것입니다. 허다한 허물을 덮어주고 사랑을 베풀면 그 행동에 향기가 따라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향기를 맡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오는 것입니다.

2. 죄인들의 모임인 교회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갖고 있기 때문에 교회를 비평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회는 의인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런데 왜 교회에 죄인들이 저렇게 많으냐. 잘못된 교회다”라고 비평합니다. 교회는 의인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이해인 것입니다. 교회는 죄인들이 모인 집단입니다. 누가복음 5장 32절에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거룩한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잘못된 판단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실제 보면 교회에는 불의, 추악, 탐욕, 악이 가득한 사람이 많고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한 자들이 모이고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교회 교인들 두세 사람이 모이면 수군수군하고, ‘아무개 목사가 이렇더라. 아무개 장로가 그렇더라. 아무개 권사, 집사도 그렇더라’ 이처럼 모이면 수군수군하고 비방을 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니 “무슨 교회가 그렇습니까?”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교회는 그런 곳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허물 많고 더러운 사람들 가운데 오셔서 허물을 벗겨주고 더러운 것을 씻어 주고 변화시키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변화 받지 못한 사람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빨래 다해서 깨끗한 옷을 입은 사람 가운데 빨래꾼이 가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빨래꾼입니다. 교회는 더러운 옷을 입고 추하고 냄새나는 것 다 빨아주고 씻어주고 깨끗하게 해주는 곳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가는 곳이지 이미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있지는 않습니다. 교회에 나오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을 하도록 강하게 권면을 받고 변화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원래부터 교회는 사랑이 넘쳐나고 사랑의 불꽃 한 가운데라고 생각하는 것은 교회를 아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영적으로 병든 자들이 와 있는 곳입니다. 영적으로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생활적으로 병든 자들이 와 있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병든 자를 고치는 예수님께서 교회 와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자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율법으로는 도저히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고 하나님 은혜가 있어야 살 수 있는 사람들이 교회 모여오는 것입니다. 스스로 성장하지 못하고 스스로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주님 도움을 받아서 성장하고 행복하려고 오는 곳이 교회고 자기 힘으로 희망이 없는 절망이고 소망이 없는 자가 교회에 나와서 희망을 얻으려고 찾아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2장 17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고 기록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는 것도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은 곳에 성령이 운행한다고 했습니다. 꽉 들어차고 질서 정연하고 모든 것이 알찬 곳에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곳에 운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면 성령이 오셔서 기꺼이 창세기적 역사를 베풀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도 부족한 사람 가운데 와 계신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곳에 복음을 전하려고 오시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시고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주게 하려고 오시고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려고 오시고 율법에 노예 된 자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오신다고 말했었습니다. 

예수님은 문제 가운데 오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오십니다. 문제가 있어 죄와 저주, 절망과 죽음에 포로된 자에게 와 계시고 앞 못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오십니다. 짓눌려서 스트레스에 걸려서 좌절과 절망에 걸린 사람에게 예수님은 오십니다. 율법의 노예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오십니다. 예수님은 어느 곳에나 자유를 주기 위해서 해방을 주기 위해서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9절로 10절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처소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문으로 인도해 주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문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그 이름을 부르면 우리는 생명의 처소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하고 담대하게 주님께 생명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3. 십자가와 나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이번 주간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고난 주간입니다. 이제 십자가와 우리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로 항상 더러워지고 항상 어두움에 종이 되고 삽니다. 이 세상에 전부 죄없고 의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에 교회 들어와서 예배 드릴 때는 참 거룩하고 깨끗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다가 교회 밖으로 나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세상에서 다시 죄를 짓게 되고 욕을 하게 되고 거짓말하게 되고 세상에 물들게 되는 것입니다. 죄로 항상 더러워지고 항상 어둠의 종이 되는데 예수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는 항상 예수 믿는 자는 씻음을 받고 변화를 받는 근원을 모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은 죄를 씻겨주시는 십자가, 늘 안고 의지하고 있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죄악 가운데 빠져서 허덕이며 헤어나올 도리가 없습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죄악 속에서 헤어나올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십자가를 끌어안고 있기 때문에 또 회개하고 또 변화를 받고 또 회개하고 또 변화받고 십자가를 의지하고 나날이 변화를 받고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항상 내가 가슴에 품고 살아야 될 하나님의 은총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매일같이 조금씩 새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자고 나니까 완전히 새것이 되었다.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짊어지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성령이 운행하시기 때문에 사람들 눈에 안보이는 것 같지만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가면 우리는 조금씩 변화받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이외에 그러므로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의 행위를 자랑할 수 없고 율법을 자랑할 수 없고 지식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로 8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기까지 복종해서 우리를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우리 옛사람을 청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은 끝까지 십자가에서 참으신 것입니다. 마귀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못참고 내려오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고통을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에게 해방을 주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기록하였으며,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 밖에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십자가에 나의 옛사람을 못박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나의 연약함을 담당하신 주님만이 나의 힘이 되십니다. 주님의 십자가만이 진실로 나를 이해하고 동정하고 용서하고 사랑해주는 처소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벗어나면 율법에 서서는 이해도 동정도 용서도 사랑도 없는 준엄한 심판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십자가를 끌어안으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죄지은 그대로 못난 그대로 병든 그대로 주님이 끌어안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사람들을 향해 “죄있는 그대로 병든 그대로 허물진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손 든 그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교회로 오라! 다 내게로 오라! 십자가에서 내가 너를 위해서 다 이루어 놓았다! 너희의 마음문을 열면 내가 너희 안에 들어가서 합법적으로 너를 변화시켜 주마!”라고 외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합법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과를 대신 갚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보혈과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사야 49장 15절처럼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십자가에 몸찢기고 피흘려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젖먹는 자식을 어머니가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어머니가 젖먹는 자식을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얼마나 강렬한 은혜의 말씀입니까?

시편 27편 10절에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야훼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은혜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기록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선물을 받아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1절로 2절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우리가 살 수 없습니다. 죄를 지어도 하나님 은혜가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약할 때도 하나님 은혜가 우리를 붙들어 세워 주시고 의롭게 살 때 축복을 받게 하는 것도 하나님 은혜가 해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은혜가 넘쳐나고 그리스도밖에는 은혜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밖에는 이해와 동정과 용서와 사랑이 없습니다. 갈보리 십자가에서만이 이해와 동정과 용서와 사랑이 넘쳐나고 그 은혜 속에 우리가 한평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변화되는 곳은 바로 그 갈보리 십자가 밑입니다. 우리의 힘과 능으로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날마다 변화되겠다고 결심을 하지만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 밑에 나가서 십자가를 끌어안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용서와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9절로 30절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기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 하나님의 최후의 목적인 것입니다. 은혜를 베풀어서 우리로 하여금 매일매일 변화를 받아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또 다른 멍에입니다. 아무리 좋은 종교라도 십자가 없는 종교는 또 다른 멍에입니다. 사랑이 아무리 좋아도 십자가 없는 사랑은 또 다른 멍에입니다. 아무리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도 십자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 밑에 나와 새 생명, 새 희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십자가 이외에는 자랑할 것이 결코 없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원수까지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오늘 되새겨 봅니다. 결국 우리는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실천은 오직 십자가 밑에 우리를 내려놓아야 이룰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에게 그 십자가의 능력을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조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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