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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변화된 부활체 (고전 15:3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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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된 부활체 (고전 15:35-52)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부활이 분명하게 있음을 밝힌다.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였을 것이며(고전15:13)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며 또 믿음도 헛것이며(고전15:14)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라(고전15:15)고 하였다. 

바울은 부활을 목격한 자였다. 고전15:5~8을 보면 맨 처음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 그 후에 오백 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고 그 후에 야고보에게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바울 자신에게도 보이셨다고 하였다.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난 부활을 바울은 당당하게 외쳤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있기에 바울은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부활 신앙을 전했다.

부활 신앙, 이것을 바울에게서 빼앗아간다면 바울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 고전15:17에서 언급했다. 부활 신앙 때문에 사울은 바울이 되었다.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이 사도가 되었다. 감히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치 못할 사울인데 사도가 되었다. 

그래서 고전15:10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하였다. 부활 신앙의 은혜를 받은 바울은 완전히 인생 방향이 바뀌었다. 오늘 우리도 존재의 변화가 필요하다. 죽은 자가 다시 사는 부활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부활을 믿을 때 부활을 믿는 자가 가질 수 있는 궁금증이 또 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이다. 고전15:35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는 질문이다. 즉 부활하였을 때 부활체는 어떤 것일까 하는 점이다.  

1. 부활체는 형체가 다른 씨앗과도 같다. (고전15:36~38)

고전15:36~38을 보면 부활체를 설명하는데 ‘뿌리는 씨’로 설명을 한다. 뿌리는 씨는 살아나기 위해 죽어야 한다. 땅에 묻힌 씨가 살아나는 원리는 죽는 것이다.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한다. 결국 부활체가 되기 위해서는 죽음이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주님도 요12:24에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였다. 

죽는 것은 원통할 수 있다. 죽는 것은 괴롭고 아플 수 있다. 죽는 것은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하기에 무서울 수도 있다. 그러나 죽는 과정이 있어야 산다. 죽어야 싹이 솟는다. 죽지 않으면 어떤 씨앗도 살아나지 못한다. 부활체가 되려면 먼저 죽어야 한다. 부활 신앙으로 바라보는 부활체 그 영광스런 몸에 이르려면 죽음을 수용해야 한다. 

부활체는 씨앗과도 같다. 죽기를 거절하고 땅 속에 묻히기를 거절하고 살아있으려 하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땅에 묻히고 심기어져 죽으면 씨앗은 다른 형체로 나타난다. 지금은 다만 밀이나 보리, 쌀 등의 알멩이 뿐이지만 그 씨알은 다른 형체로 나타난다.

고전15: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옥수수 알, 그러나 그 씨알이 죽으면 싹이 돋고 줄기가 나오고 푸르고 넓은 옥수수 잎이 나와 전혀 다른 형체를 낸다. 우리가 늙고 병들어 죽는 몸의 깨어짐! 죽는 것이 끝이 아니다. 죽는 것은 부활체로 가는 삶의 과정이다. 삶이란 오직 다른 형체의 부활체로 변화되어진다. 그러므로 죽는 것은 끝이 아니다. 새로운 형체의 몸을 덧입기 위한 과정이다.  

2. 부활체는 영광이 다른 육체와도 같다. (고전15:39~41)

눈에 보이는 육체는 다 같지 않다. 사람의 육체, 짐승의 육체, 새의 육체, 물고기의 육체가 있다. 가령 짐승의 육체를 이교도의 육체라고, 새의 육체를 순교자의 육체라고, 물고기의 육체를 크리스챤의 육체라고 해보자. 육체는 육체일 뿐이다. 다만 육체는 어디까지나 피와 살을 가진 육체다. 육체는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피조 세계 안에서 자기 모양의 형체를 가진다. 그러나 그 형제를 가진 육체는 육체와 전혀 다른 영광을 지닌다. 

고전15:40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라고 하였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 별의 영광이 다르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다. 육체는 다 형제를 가졌으나 영광이 다르다. 그 영광은 썩어질 육체와 전혀 다른 영광이다. 고대 교부 테툴리안(Tertullian)은 해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을 가리켜 해는 그리스도의 영광, 달은 교회의 영광, 별은 유대인의 영광이라고 했는데 짐승의 육체, 새의 육체, 물고기의 육체, 육체의 보이는 형태와 장래에 입을 영광은 다 다르다. 그러나 연속성이 있다. 소멸과 변화의 연속성을 통해 우리의 몸은 전혀 다른 영광의 부활체로 덧입는 것이다. 

3. 부활체의 주인공은 그리스도인이다. (고전15:42~44)

고전15: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다 씨앗과 같이, 땅의 육체와 같이 전혀 다른 부활체의 주인공이 된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그리스도인들은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살게 된다. 전혀 다른 형체, 전혀 다른 영광으로 나타난다.

첫 사람 아담은 땅에서 났다. 흙에 속한 자다. 그래서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다. 우리는 불순종하고 변명하고 핑계하며 죄를 범한다. 둘째 사람 예수님은 하늘에서 났다. 그는 하늘에 속한 자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그에게 순종하므로 하늘에 속한 이와 같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는다. 부활체의 주인공은 그리스도인이다. 둘째 사람 예수, 예수에게 속한 자들이기에 아담의 형상을 입고 있으면서도 하늘에 속한 이 예수의 형상을 입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체는 어떠했는가? 요20:19에 문이 닫혔는데도 안으로 들어오신 몸이다. 요20:22에 숨을 내쉬며 말씀하셨다. 눅24:38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만져지는 몸이다. 

눅24:43에 구운 생선 토막을 잡수셨다. 주의 부활의 몸은 기이한 몸이다. 변화된 몸이다. 영광스러운 몸이다. 우리도 그렇게 될 것이다. 고전15:51~52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변화의 모델은 마태복음 17장에 나와 있다. 

마17:2에서는 예수님이 베드로와 요한 앞에서 변형되셨는데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 

계1:16에 나타난 부활의 주님의 모습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는 변화된다. 지금 우리는 썩을 것을 심고 욕된 것, 약한 것, 육의 몸으로 심는 인생이지만 마지막 나팔에 홀연히 변화된다. 신령한 몸으로, 썩지 아니하고 영광스럽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 변화된다. 부활체를 가지는 이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속한 그리스도인들이다.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는 것이 마땅한 부활체의 비밀이다. 육의 몸이 신령한 영의 몸이 되는 것이 부활의 완성이다. 

흙 속에서 벌레 한 마리가 바둥거린다. 볼품 없고 형편 없는 몸둥아리로 사느라고 바둥거린다. 그 벌레는 집을 짓고 그 안에 갇힌다. 얼마 후 그 껍질을 뚫고 번데기가 새로운 몸을 입는다. 변화하여 하늘을 나는 한 마리의 나비로 되어버린다. 

그런데 번데기나, 나비나 근원은 하나다. 육체가 지닌 영광도 이와 같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처럼 사람의 몸이 변화되는 날, 죽은 자들이 이렇게 기이하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나타난다. 시공을 초월한 영광스러운 몸으로 나타난다. 

여러분과 내가 부활체로 되어져 죽더라도 무덤 이후 다른 형태, 다른 영광으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썩지 아니하고 변화될 내 몸의, 내 영의, 내 혼의 부활 신앙 그것은 어둠을 박살내고 허무주의와 쾌락을 박살내고 회의주의와 냉소주의, 방종, 방탕, 되는대로의 삶을 박살낸다. 새로운 삶의 에너지원이 되어 절망에 넘어진 이에게 소망을 주고 지금 여기서 우리는 슬픔과 고난 많은 삶을 겪지만 기쁨의 삶을 걷게 한다.   

우리는 달라져야 한다. 고난을 이기는 것만 아니라 교회 생활이 달라져야 한다. 왜 전파하며, 왜 죄를 이겨야 하며, 왜 교회를 열심히 섬겨야 하는지 달라져야 할 이유는 부활 신앙이 그 해답인 것이다. 부활 신앙은 영원을 향한 소망의 기대를 갖게 하지만 바로 지금, 말씀을 듣는 바로 여기에서 내 삶의 태도를 바꾼다. 장래의 영광스러운 몸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부활 신앙을 결단하게 한다. 예배를 바꾸고 봉헌의 태도를 바꾸고 게으름과 나태, 핑계됨을 바꾸고 삶의 자세를 바꾸는 변화의 동력이다. 

예수 부활하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이고 행복한 소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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