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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욥의 부활 신앙 (욥 19: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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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부활 신앙 (욥 19:23-27)

아무 어려움 없이 신앙생활을 잘 하던 어느 집사님 가정에 갑작스레 어려움이 닥쳤다. 외환 위기로 직장을 잃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아내가 큰 병에 걸리게 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당신은 정말 살아계십니까?’ 하나님에 대하여 실망한 그는 결국 교회를 떠났다. 그의 가정에 닥친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고 신앙을 포기해 버린 것이다. 이런 안타까운 소식들을 종종 듣는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욥이란 사람.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파상적으로 몰아닥친 재난으로 말미암아 순식간에 그는 자녀들과 재산을 다 잃고 말았다. 그는 그에게 닥친 재앙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했는가? 그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믿음의 길에 떠났는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놀랍게도 이렇게 고백했다.

욥 1:21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기 기자는 그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했다.

욥 1: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진정한 믿음의 사람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에게 임한 재앙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젠 그의 몸까지 치시므로 온 몸에 헌데가 나서 질그릇 조각으로 가려운데 긁고 앉아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욥의 아내, 하나님을 향하여 분노가 끓어 올랐다. 그리고 남편의 모습을 지켜볼 때 더욱 화가 났다. 그녀는 남편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욥 2:9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아내의 말을 들은 욥의 마음은 더욱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를 대항하여 싸우지 않았다. 그는 아내를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욥 2:10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참으로 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이 소식을 욥의 친구들이 듣고 찾아왔다. 욥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기가 막혀 말문을 열지 못하고 한 주 동안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위로하기 위해 온 친구들이 욥의 처지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욥 4:7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세 친구들의 결론은 욥이 이런 재앙을 당한 것은 범죄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 동안 의인인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도와준 것은 다 위선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 친구는 계속해서 몰아부쳤다. 네가 살 길은 빨리 회개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했다. 욥은 그것이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친구들의 공격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욥은 친구들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욥 19:20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몸 뿐이로구나 21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때때로 진실이 왜곡되었을 때,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사실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상대방이 나의 말을 오해하고 비난할 때 고통스러워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내 속을 열어서 보여줄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다!’라고 말한다. 욥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 것은 그의 친구들의 비난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호소한다. 

욥 19:23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욥은, 고난의 원인이 자기의 어떤 죄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해온 자기의 변호가 영구히 후세에 전달되기를 원한다. 그것은 교만이 아니고 진리와 사실을 굽히지 않으려는 신앙 양심의 고백이다. 

우리는 여기서 욥에 대하여 신중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재물, 자녀를 잃고 친구들의 비난과 공격을 받으면서도 그는 굿굿히 자신의 순전함을 고집했다. 무엇이 그로하여금 조금도 요동치 않는 믿음을 갖게 한 것일까? 그의 믿음은 무엇인가? 오늘 본문 25-27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1.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심을 믿는 믿음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욥이 알고 있는 것, 확신하고 있는 것. 첫 번째 사실은,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신다는 것’이다. ‘대속자’란 용어가 구약에서 처음 등장한다. 구약성경에서 성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속자가 되신다는 표현은 자주 나온다. 그러나 대속자란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비슷하지만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실 자, 대속자, 그는 누구신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참으로 놀라운 고백이 아닐 수 없다. 욥의 신앙은 단지 하나님을 향하여 정절을 지키는 믿음의 수준이 아니라 장래에 인류의 대속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 대한 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나의 죄를 속하여 주실 대속자’, 그 분의 살아계심을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시대로부터 2000년 후에 이뤄질 대속을 바라보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친구들의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나의 대속자는 살아계신다. 이것이 욥의 신앙이었다.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살아계신다. 


2. 대속자가 부활하실 것을 믿는 믿음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계속 이어지는 25절 본문의 내용이 욥의 고백을 더욱 분명하게 해준다.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선다는 것은 넘어짐 후에 일어나는 동작을 전제하고 있는 표현이다. 이것은 대속자의 죽음, 그리고 다시 살아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욥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하실 것을 알고 있었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아무런 유익이 없다. 믿음은 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욥은 본 것을 믿은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으로 받고 확신하였다. 그런 믿음은 인간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시련 가운데서도 주저 앉지 않게 한다. 


3. 하나님께 대한 변함 없는 정절

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이 말은 설령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죽은 후에도 하나님께로 향한 나의 믿음은 변함 없을 것을 뜻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성경에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열거하며 소개했다. 그는 결론적으로 그들의 믿음을 이렇게 정의했다. 

히 11: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사도 요한의 제자 폴리갑이 로마 황제숭배에 대한 거부로 화형을 당하기 전 로마의 집행관이 폴리갑에게 황제를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목숨을 구하라고 권고했다. 그때 폴리갑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86년동안 그분을 섬겨 왔는데, 그동안 그 분은 한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소.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가 있겠소” 라고 그의 권고를 묵살했다고 한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결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고백, 확신 있는 고백은 환란과 핍박도 능히 감당하는 능력이 있다. 

욥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리 내다보고 그것이 말씀대로 이뤄질 것을 믿었다. 과것의 사건이 아니라 아직 이뤄지지 않은 미래의 사건을 믿는 믿음도 인간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그렇다면 2000년 전에 이미 이뤄진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로서 더욱 더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편지를 썼다. 

고전 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다.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살아나셨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도 살아계시다. 이것이 성경의 증거다. 

영국의 음악가 래클경 이야기이다. 그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항상 헨델의 메시야 곡을 연주했다. 어느 날 메시야 리허설 중에 할렐루야 합창이 웅장하게 나오고 이어서 소프라노 가수가 아리아를 솔로로 부를 때였다.
"내 주는 살아 계시고..."
소프라노 가수는 박자도 음정도 목소리도 훌륭했고 모든 합창대원들이 이 아리아에 귀를 기울이며 감탄하고 있었다. 그 때 돌연 래클경이 지휘를 딱 멈추더니 소프라노 가수에게 물었다. 

"당신은 정말로 내 주는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고 있소?"
소프라노 가수는 노래를 부르다 말고 그의 물음에 깜짝 놀랐다. 그는 노래를 멈추고 잠시 생각하다가 "예, 주님께서 살아 계심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부르세요. 소프라노 가수는 새롭게 신앙을 고백한 다음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그 찬양을 듣는 모두는 무한한 감동과 함께 눈물로 그 아리아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주님은 살아 계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욥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희미한 증거를 가지고도 자신에게 닥친 재앙을 이기고 온갖 비난과 조롱도 극복했다면 우리는 더욱 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된다. 그러나 부활은 모든 것의 시작이 된다. 근심에 빠진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셨을 때 그들은 크게 기뻐했다. 부활은 모든 성도들에게도 기쁨이 되며, 소망과 능력이 된다. 
욥보다 더한 고난에 처한 사람은 없다. 승리의 비결은 부활의 주님을 붙잡는 것이다. 그는 살아계신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신다. 그분은 살아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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