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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치시는 예수님 (마 14: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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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시는 예수님 (마 14:34-36)

우리가 믿는 성경에는 기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기적을 믿습니다. 신비주의적인 기적이 아니라 말씀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말씀을 믿으면 그 살아계신 말씀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이적은 예수님 당시에만 있었던 과거적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도 믿는 믿음 안에서 일어나는 현재적 사건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이 35가지 있습니다. 그 가운데 23가지는 병고친 이적이고 9가지는 자연에 대한 이적, 즉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신 기적, 바다를 잔잔케 하신 기적, 물위를 걸으신 이적, 보리떡 다섯개·물고기 두마리로 5천명 먹이신 기적 등입니다. 그리고 3가지는 죽은 자를 살리신 기적입니다. 

35가지 기적 중에서 26가지가 사람들에게 베푸신 기적이요 9가지는 자연에 대하여 베푸신 기적입니다. 즉 치유이적과 자연이적이 있는데 모든 기적은 이유와 뜻이 있습니다. 자연이적은 예수님께서 자연의 창조주이심을 계시하는 이적이며 치유이적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생명의 주가 되시고 우리의 구세주가 되심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이적을 통해서 우리의 약하고 건강 때문에 염려하는 것을 원치 않으심을 보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우리를 강건하게 만드셨는데도 죄로 말미암아 약해지고 병들어 죽게 되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암송하시는 요한 3서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약한 부분이 강건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잘못된 부분이 바르게 고쳐지기를 원하십니다. 어두운 부분이 밝아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병든 부분을 고치시고 슬픈 마음을 기쁜 마음으로 고치시며 소극적이고 냉냉한 마음을 적극적이고 따뜻한 마음을 고치십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치유의 기적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참 흥미롭습니다. 23번의 치유 기적 가운데 열번은 예수님이 손을 대십니다. 그리고 열번은 말씀만으로 고치십니다. 그리고 3번은 보지도 않고 고치십니다. 다만 기적의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과 환자나 주변 사람들의 믿음을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이심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한가지 기억하고 넘어갈 것은 치유는 현대 의학으로도 가능하며 신앙의 힘, 즉 신유로도 가능합니다. 둘 다 가능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힘으로 치유되는 것이나 현대의학으로 치유되는 것이나 모두 주님이 고치시는 것이라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다만 치유의 기적은 현대의학의 한계를 넘어설 때 나타나는 것이며 치유의 목적도 믿음을 더하기 위함입니다. 치유의 기적을 통해서 새로운 믿음으로 주님을 제일 가치로 삼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아야지 병이나 고치기 위해서 믿는다면 참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간단하고 짤막한 내용입니다. 게네사렛 동네 사람들이 자기네 동네에 찾아오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간구하여 병고침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몇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35절을 보면 "그곳 사람들이 예수신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라고 했습니다. 그 뜻도 예수님에 대하여 귀로 들어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알았다는 뜻입니다. 즉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알다"라는 히브리어는 [야다]라는 단어이며 헬라어로는 [기노스코]입니다. 헬라어 [기노스코]는 지식, 즉 머리로 아는 것을 뜻하지만 히브리인들의 [야다]는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즉 어머니를 안다는 것은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을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을 별개로 생각지 않습니다. 머리로만 아는 것을 히브리인은 [야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행동없는 지식은 죽은 지식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행함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게네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신뢰함으로 믿게 되었고 주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고침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런 믿음이 없었더라면 모든 병든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 대학 교수 한 분은 헬라어로 된 성경을 번역할 만큼 성경에 대한 지식은 있어도 예수님의 능력과 구주되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합니다. 체험적인 믿음이 아니라 머리로만 지식으로만 예수님을 알기 때문에 그런 분에게는 구원의 은총도 없는 것이며 기적적 고침도 없는 것이며 거듭남의 체험도 없는 것입니다. 

엊그제 예수님을 알았더라도 믿음으로 체험한 예수님이라면 그의 삶을 변화시키시는 주님으로 알게 되며 어둡고 침울한 삶을 희망과 광명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체험적 신앙은 다른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그래서 그가 받은 축복을 다른 사람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요 1:45 빌립이 예수님을 만난 직후 자기 친구 나다나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났다. 너도 와 보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주님을 만난 체험을 가진 사람은 주님을 전합니다.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영과 육이 고침을 받게 합니다. 맺힌 부분이 풀리게 합니다. 주님의 생명을 체험한 신앙은 생명력 있게 살고 생명력 있는 증인으로 삽니다. 


둘째로, 믿음으로 간구했습니다. 

36절을 보면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라고 했습니다. 마 9:20-22에 이미 12년간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뒤로 와서 옷가를 만지고 고침받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소문은 게네사렛 사람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도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고침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게네사렛 사람들의 믿음은 단순한 믿음이면서도 확신을 가진 믿음이었습니다. 손만 대어도 나을 것이라고 믿는 믿음, 이 얼마나 단순한 믿음이며 또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믿음입니까? 

미국의 억만 장자였던 하워드 휴즈라는 분은 신경과민증 환자였다고 합니다. 세균 감염에 대해 노이로제 환자였다고 합니다. 그는 입던 옷을 가끔 불태워 버리기도 하고 다른 사람과 악수하면 금새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신경과민증으로 밤에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합니다. 믿음없이 사는 사람은 억만장자라도 불행하게 밤에 잠을 자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현재 미국 내에는 100세를 넘겨 사는 사람이 약 3,200명이 되는데 어떻게 장수하느냐 하는 조사를 했더니 공통적인 점이 '모든 일을 단순히 믿으며 산다'는 것입니다. 꼬치꼬치 따지거나 과민증으로 살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믿으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옷가에만 손을 대도 낫겠다는, 문제 해결을 얻겠다는, 단순하면서도 확신있는 믿음을 가진다면 어떤 풀 수 없는 문제도 풀릴 수 있고 사람의 힘으로 고치기 어려운 것도 능히 고침받을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약점이 많고 가진 것은 없으며 능력있어 보이나 무능력하고 무기력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믿음이 있으면 믿음으로 간구하면 그 믿음이 기적을 일으키게 됩니다. 

놀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 박사는 늘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쪽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글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품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지키고 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시고 있다. 내가 어느 곳을 가든지 하나님은 거기 계신다"는 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라디오를 켜서 싸이클을 맞추면 방송을 들을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을 갖다 놓고 채널을 맞추면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예배당 안에는 수많은 소리, 수많은 영상이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눈에 안 보이고 우리 귀에 안 들리지만 수많은 소리와 영상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뜻에 합의한 믿음의 채널, 믿음의 다이얼을 맞추면 놀라운 기적과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게네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대게 하기를 간구했던 것처럼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을 만날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째로, 마지막 절에 보면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누구나 다 고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문제의 해결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손을 대는 자만 고침을 받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유대인과 이방인, 여자와 남자, 어른과 아이,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은 구원도 받지 못했고 고침도 받지 못했습니다. 믿은 사람만이 구원받고 고침 받았습니다. 문제는 믿고 손을 대는 것입니다. 손을 댄다는 것은 믿고 맡긴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주님께 내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며 그 결과 나음을 입습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대군을 이끌고 유럽을 휩쓸고 있을 때 장군 한 사람이 정예 부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의 국경 도시인 펠드리히를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포위망을 좁히며 총공세를 펴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펠드리히 시에서는 비상시 의회를 소집하고 항복할 것인가, 더 버틸 것인가를 논의하였는데 대다수 시의원들의 의견은 미리 항복해서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자는 데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교회의 지도자 한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부활주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우리의 힘만을 믿는다면 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맡긴다면 살 길이 열릴 것입니다. 무서워 떨고만 있지 말고 교회의 종을 힘껏 치고 부활절 예배를 드립시다. 그리고 그 뒷일은 하나님께 맡깁시다."고 했습니다. 

드디어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찬송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종소리와 찬송소리가 프랑스군 진영까지 울려 퍼졌습니다. 프랑스 군대는 밤사이에 오스트리아 군대가 도착했기 때문에 울리는 기쁨의 종소리와 노래 소리일 것이라고 판단해서 공격을 취소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말았습니다. 펠드리히시는 싸우지도 않고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절망할 수도 있고 희망을 가질 자유도 있습니다. 믿을 자유도 있고 믿지 않을 자유도 있습니다. 맡길 자유도 있고 내가 움켜쥐고 있을 자유도 있습니다. 영원히 살 자유도, 영원히 멸망할 자유도 있습니다. 어떤 것이든 뜻대로 고를 자유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께 맡겨 다 나음을 입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붙들고 불행과 고통을 계속 하겠습니까?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반드시 나음을 입습니다. 펠드리히 시민들처럼 찬송을 부릅시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 맡긴 채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이 더 현명합니다. 

게네사렛 동네 사람들처럼 예수님께 손을 내밀어 댑시다. 반드시 다 나음을 입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약한 몸, 지친 심령, 어려운 가정의 문제, 고침 받아야 될 일들이 많지 않습니까? 주님께 맡겨 나음을 입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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