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아비입니까, 아이입니까?(1) (고전 3:1-4)

첨부 1


아비입니까, 아이입니까?(1) (고전 3:1-4)

: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이 지역과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축복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을 소망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한가족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한가족(一家)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한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정에 부모와 자녀가 있듯이 가족으로써 교회 안에도 여러 사람이 있습니다. 부모처럼 보살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녀처럼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성숙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나가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의 정도가 사뭇 다릅니다.

‘신자의 종류’를 검색하다가 재미있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미꾸라지 신자’는 교회에 무슨 일만 생기면 미꾸라지처럼 빠졌다가 해결되면 나타나는 신자랍니다. ‘박쥐 신자’는 교회 안에서는 신자이나 세상에 나가면 세상 사람인 신자랍니다. ‘당나귀 신자’는 말씀에 대한 귀는 높은데 은혜는 하나도 받지 못하는 신자랍니다. ‘염소 신자’는 남을 들이 받는 일에 열심을 내는 신자입니다. 그리고 ‘양 신자’는 헌신적으로 봉사하는데 죽기까지 충성하는 신자랍니다.

여러분은 어떤 신자입니까?

동물이 아니라 물건에 빗댄 신자의 종류도 있습니다.

찾아 가서 끌어내야만 겨우 교회에 나오는 ‘인력거 신자’ 일명 ‘리어카 신자’입니다. 꼭 누군가 끌어줘야 움직이는 신자입니다. 신앙이 맨 날 그 자리에서 성장 못하는 ‘쳇바퀴 신자’, 설교 들을 땐 충만한데 교회문밖에 나가면 식어 버리는 ‘냄비 신자’, 쓸데없는데 일이 많고 소리만 요란한 ‘오토바이 신자’, 비오는 날 녹을까봐 교회 못 오는 ‘소금가마니 신자’, 교회 직분을 감투로 잘못 알고 있는 ‘감투 신자’, 교회 등록을 하지 않고 이 교회, 저 교회 돌아다니는 ‘유람선 신자’, 왕자병, 공주병이 깊이 들어 자신이 주연이 안 되면 토라지는 ‘주연배우 신자’가 있습니다.

참으로 신자의 종류도 많지요?

그런데 정말로, 신자의 종류가 있는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오직 하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일뿐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신앙의 정도가 있을 뿐입니다. 같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 조금 더 성숙한 사람과 조금 더 자라야 할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같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모두 한가족입니다.  

한가족임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 이것을 신앙 단계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에는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I. 단계  

신앙의 단계를 어떻게 나눌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어떤 단계가 이르렀습니까?

1절 말씀입니다.
: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사도 바울은 말씀을 시작하면서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형제들이라고 부른 것을 분명하게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알고 있는 데로 고린도 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고린도교회에는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향하여 사도는 ‘형제’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잘나고, 멋지고, 훌륭하고, 덕스럽기만 하였기에 형제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형제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믿음의 단계가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영에 속한 사람에게 하듯이 말할 수 없고, 육에 속한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 같은 사람에게 말하듯이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있지만 그 믿음이 어린 아이와 같아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어린 아이[nhvpio"/네피오스]’는 ‘말 못하는’이라는 뜻의 말에서 왔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울고불고 떼를 쓰는 아이와 같이 자신의 마음에 영접한 예수님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지만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향하여 사도는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을 책망하고 꾸짖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극한 사랑으로 권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사랑이 필요한 교인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사랑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 사랑 받기를 원합니다. 아니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더욱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젖먹이들에게 부모의 관심과 사랑이 더욱 필요한 것처럼 교회 안에서도 사랑과 관심이 더욱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신자를 세 종류로 구분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믿음신자’(太信者)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영적 아비’라고 부릅니다. 저는 모든 성도들이 믿음신자 - 영적 아비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두 번째로 ‘소망신자’입니다. 믿음신자가 소망으로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직 교회에 나오지 않는, 영적으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 이전에 태신자(胎信者) 또는 예비 신자라고 부르는 사람입니다. 믿음신자는 소망신자를 품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는 ‘사랑신자’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에 등록하였는데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필요한 신자입니다. MD전도에서 마이너리그 신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랑이 필요한 신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게으를 태자를 사용하여 역시 태신자(怠信者)할 수 있으며, 영적 어린 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신자는 교회 밖에 있는 소망신자에 대하여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믿음신자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랑신자를 사랑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랑이 필요한 신자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히브리서 6장 10절 말씀입니다.
(히 6: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십니다. 성도가 다른 성도를 품고 사랑으로 섬긴 것을 기억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다른 성도를 섬겨야 합니다. 섬김은 사랑의 관심에서 시작합니다.


2. 사랑의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존 템플턴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순수한 관심뿐이란 걸 기억하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관심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좀 험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만 무관심은 죄입니다! 정말로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더욱이 그 영혼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의 관심을 가지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우뚝 서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사랑의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그 방법 또한 중요합니다.  

II. 방법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받기를 원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관심을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러니 사랑의 관심에도 방법이 필요합니다. 

2절 말씀입니다.
: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젖을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을 먹이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단단한 음식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젖은 별로 어렵지 않은 그리스도교 진리를 가리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처음 방문하여 복음을 가르칠 때, 그들은 단순한 믿음의 도리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고린도 교인들이 복음의 초보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신앙이 성숙하지 못하여 정체된 상태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형태로 복음을 설명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감당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합니다. 이것은 그들을 양육하여 성장시키려는 것입니다.

1. 양육이 필요한 교인이 있습니다.

아기들은 젖을 먹다가 밥을 먹는 것으로 성장합니다. 부드러운 음식에서 딱딱한 음식으로 발전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쉬운 진리에서 어려운 진리로 양육의 단계가 발전합니다. 사랑의 관심이 성도를 어린 아이 단계에 계속하여 머물게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관심은 그 사람을 양육하여 믿음이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랑이 필요한 신자에게 사랑의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관심은 믿음이 자라도록 양육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으로 양육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디모데후서 4장 2절 말씀입니다.
(딤후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모든 일에 오래 참아야 할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신앙의 양육을 위하여 오래 참아야 합니다. 사람을 기르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2. 사랑의 인내를 가져야 합니다.

진정한 관심은 긴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생각이나 계획이 무산되면 실패라고 단정 짓고 쉽게 그 일을 포기해버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자기의 생각이나 계획이 이루어져야만 성공이라고 여기는 생각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이 완전히 무너진 다음에야 비로소 더 큰 일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오래 참고 기다리면 반드시 그 일은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모든 일을 섭리하시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빗나간 심성 중의 하나가 바로 조급증입니다. 인생의 참된 가치는 기다림과 땀 흘림에 있다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품고 사랑하는 일에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살리고 그 믿음을 양육하여 성장하도록 돕는 일에는 반드시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 종종 워싱턴 D.C의 뉴욕 에비뉴 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그 교회에 조셉이라는 목사님이 있었는데 어떤 기회에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펴놓은 성경을 옆에서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 낡은 성경에 여러 번 손으로 짚어서 특별히 손자국이 많이 나고 눈물자국이 나있는 성경 한 페이지를 눈여겨 볼 수 있었답니다. 그것은 시편 37편 7절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링컨이 그 말씀을 수없이 읽고 명상했다는 흔적을 그의 성경에서 읽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링컨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잠잠하고 참아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자신이 품고 기도하는 소망신자가 예배당에 나올 때까지 사랑의 관심을 가지되 기다려야 합니다. 조급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신자가 헌신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양육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여러분의 기다림 위에 하나님이 속히 응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인내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중요한 것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오늘 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표입니다. 인내하기 위하여 반드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III. 목표 

분명한 목표가 있는 사람은 참고 견디며 인내할 수 있습니다. 천국을 바라보는 사람은 중간에서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에게 어떤 목표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3절 말씀입니다.
: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예가 4절 말씀입니다.
: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그들에게 시기와 싸움이 있었던 것은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나는 바울 편이다”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나는 아볼로 편이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어떤 사람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지도자를 존경하는 것은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라도 어떤 사람을 중심으로 파당을 만들고 그 사람을 위한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신앙은 사람을 바라보는데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으로 전환이 필요했습니다. 

1. 전환이 필요한 교인이 있습니다.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목표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람을 위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생활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삶으로 나가야 합니다.

라인홀드 니버라는 사람이 이러한 기도문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에게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정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내 힘으로 고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 두 가지 차이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우리는 자신이 변화시킬 수 없는 일이라면 있는 그대로 그냥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고칠 수 있는 일임에도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면 게으름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위하여 살던 것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으로 전환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변화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변화되도록 하는 일에 헌신하여야 합니다. 자신이 변화된 삶을 사는 것도 어렵지만 다른 사람의 변화를 위하여 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 성숙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아이에 대한 영적 아비의 자세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분파적으로 파당적입니다. 우리는 보고 듣는 것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웁니다.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을 따르려고 합니다. 그래서 모범적인 신앙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 말씀입니다.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우리는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을 따르고 섬기려는 욕심을 물리쳐야 합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2. 사랑의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봉사를 다른 말로 섬김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섬김은 디아코니아(diakonia)로 ‘시중드는 일, 섬기는 일’을 의미합니다. 이 말이 그리스도교에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 헌신,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생활’이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스위스의 신학자 카를 바르트는 “섬김의 삶은 자기의 목적이나 계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필요와 의도와 지시에 따라서 행동할 때의 의지(Will)와 수고(Working), 행동(Doing)”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자신의 뜻을 접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섬김의 모범을 통하여 믿음이 적은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한때 성공회의 감독이 되기를 꿈꾸었던 사무엘 브랭글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구세군에 지원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 영국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러나 구세군의 부스 장군은 그의 지원을 마지못해 허락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겸손한 마음을 키워 주기 위해 다른 훈련생들의 군화를 닦으라고 지시했습니다. 낙심한 브랭글은 속으로 ‘내가 군화나 닦으려고 내 꿈을 좇아 대서양을 건너왔단 말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어느 날 환상 중에 예수님께서 무식한 어부들의 발을 닦기 위하여 허리를 굽히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 그는 조용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저는 그들의 구두를 닦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진정으로 사랑의 섬김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우리를 통하여 예수님을 볼 수 있도록 섬겨야 합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사는 것이란 바로 이런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섬겨야 합니다. 사랑의 섬김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변화와 다른 사람의 변화를 위하여 섬김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사람이 한결 같은 것은 아닙니다. 같은 예수님을 믿어도 신앙의 정도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젖을 먹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양육이 필요합니다. 양육을 위하여 어머니처럼 참고 인내하여야 합니다. 진정으로 전환을 원한다면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연하의 남편과 사는 연상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나이가 많은 아내가 나이가 적은 남편에게 언제나 존댓말을 사용하였습니다. 그 집에 딸이 태어나서 자랐습니다. 딸은 엄마가 연상이라는 것을 알고 엄마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엄마가 아빠보다 나이가 더 많은데 왜 아빠에게 존댓말을 하세요? 참 궁금하네요!”

엄마 딸을 보고 씩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답니다.
“응- 내가 반말하면, 제 삐쳐!”

화합을 위해서, 사랑하고 존경하여 피차 존대하여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믿음이 약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믿음이 약한 사람을 양육하는데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은 그 사랑으로 변화를 바라보며 신앙의 모범을 통하여 섬겨야 합니다. 이런 말씀들은 참으로 옳은 말씀이나 그대로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의지 하여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영적으로 어린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인내하며 섬기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