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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은 축복과 저주를 좌우합니다 (갈 4: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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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축복과 저주를 좌우합니다 (갈 4:12-15)
  

< 김용민 막말 사건 >   

금년 초, 많은 언론은 여당이 국회의원 선거에서 100석도 얻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야당이 200석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엄청난 여소야대가 예견된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민간인 불법 사찰 얘기로 인해 여당은 더 사면초가에 몰렸습니다. 그 모든 불리한 전세를 한 방에 날린 사건이 선거 며칠 전에 터졌습니다. 바로 여자와 노인과 교회를 상대로 막말을 했던 <김용민 막말 사건>입니다. 그 막말로 야당은 대략 20-40석을 잃었다고 추정합니다. 그렇다면 상대방은 20-40석을 얻게 됩니다. 결국 막말 하나가 40-80석의 의석 차이를 만든 것입니다.  

왜 그런 엄청난 영향을 미쳤을까요? “정권을 심판하자! 불법사찰을 없애자!”는 구호는 필요성은 인정해도 자기와는 거리가 먼 얘기입니다. 그러나 “여자를 성폭행해도 된다! 노인은 빨리 죽는 게 낫다! 교회를 무너뜨리자!”란 구호는 당사자에게는 큰 상처를 남깁니다. 그 상처는 어떤 정치적인 구호로도 지우기 힘듭니다. 특히 힘과 기력이 빠지며 점점 후천적인 장애를 가지게 되는 노인들에게 상처를 입히면 그 상처는 한이 됩니다. 이번에 노인이 많은 시골에서 야당이 참패한 것도 그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하게 만듭니다.  

만약 다인종 사회인 미국에서 한 정치가가 “여자는 성폭행해도 좋다! 흑인을 없애버리자!”고 한다면 그를 미국 사회에서 용납할까요? 사람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편견과 차별이 존재합니다. 그런 차별의식을 깨려고 미국에서는 사회 시스템을 만들고 또한 공적인 인종차별 행위나 발언을 엄격히 금지합니다.  

어느 날, 미국의 한 한인 교회가 뉴저지 근처의 집을 매입해서 교회 예배당으로 개조해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동네 주민들이 주차문제, 소음문제 등의 이유를 내세워 막무가내로 교회 입주를 막고 시 의원들도 압도적으로 교회 입주를 부결했습니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목사님이 결심했습니다. “하나님! 이번만은 십자가를 지고 참기보다는 막무가내로 나오는 저들 방식대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상대하겠습니다.” 그리고 관련 자료를 모아 교회입주를 반대하는 주동자들을 인종차별 행위로 고발했습니다. 그때부터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어 결국 무혈입성을 하듯이 교회가 입주할 수 있었습니다.  

언론이 발달된 사회나 성숙한 시민의식이 통용되는 사회에서는 인종차별 문제를 어떤 문제보다 심각한 문제로 여깁니다.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적인 언행이 명백하면 사회적으로 매장되고 심지어는 고발까지 당합니다. 사실 막말을 한 김용민은 야당이 껴안을 상황이 아니라 그런 사람을 공천한 것에 대해서 백배 사죄를 하고 거리를 두어야 할 상황입니다. 그런 사람을 껴안았으니 선거에서 참패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 축복과 저주를 좌우하는 말 > 

말은 인격의 표출입니다. 말이 나쁜 사람이 좋은 사람일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사투리가 얼마나 정겹고 맛깔나게 들립니까? 그래도 인격적인 사람은 고향을 떠나면 사투리조차 주의합니다. 인격적인 사람은 속어도 가급적 피합니다. 그처럼 말은 골라서도 해야 하지만 골라서도 들어야 합니다.

한국교회를 미숙과 기복주의로 몰아낸 것은 부흥사들의 저질스런 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설교가 재미있으면 흡수력이 빠릅니다. 그래서 유머도 필요하지만 사실상 유머도 격이 있어야 합니다. 음담패설과 욕이 섞인 유머는 겉으로는 웃음과 통쾌함을 유발해도 그것 때문에 인격도 저하되고 영성도 저하되고 신앙의 절도 저하됩니다.  

음담패설과 욕과 비속어가 섞인 유머로 도배된 설교를 듣고 많이 웃으면 설교에 은혜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처럼 “많은 웃었다!”는 것을 “많이 은혜 받았다!”는 것과 동일시하면 설교자들은 음담패설과 욕과 비속어를 더욱 많이 사용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결국 그런 미숙한 모습 때문에 한때 저질 부흥사들이 난립했고 그들로 인해서 저질 기복주의가 난립해서 한국 교회가 많이 신망을 잃은 것입니다.   

어떤 부흥사가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모르는 게 교인입니까? 개OO지!” 그런 류의 욕과 비속어가 섞인 설교를 들으면 깔깔 대고 웃지만 말고 “내가 이런 말에 왜 웃지?”라고 자기 단속을 해야 합니다. 자유의 가치는 소중한 것이지만 저질의 말을 자유로운 표현으로 포장하는 것은 거짓 자유입니다. 그런 거짓 자유는 과감히 거절하고 잘못된 욕과 비속어가 많은 설교와 정의로운 말을 들으면서 통쾌함을 느끼지 마십시오. 역사를 살펴보면 정의를 내세운 저질스런 말들이 큰 비극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저는 대학교 4학년 때까지 말을 잘 못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선천적인 말더듬증과 내성적인 성격 때문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생각해보니까 후천적인 요인도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저희 아버님은 말 교육을 철저히 시켰습니다. 부모님께 존댓말은 필수였고 입에서 비속어나 욕이 나오면 무섭게 야단맞았습니다. 그처럼 항상 말을 주의하다 보니까 심리적으로 상당히 위축된 상태에서 말을 걸러서 해야 했기에 더욱 말을 못하게 된 것입니다.  

저질스런 말로 웃기는 것을 누가 못합니까? 다 할 수 있지만 사람이기에 참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저질스런 말로 충분히 남들을 웃길 수 있지만 그래도 하지 않고 입에 배이지 않아서 할 수도 없습니다. 기본 인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존중을 받아야지 저질스런 유머로 웃기는 사람을 ‘부흥사’라고 하면 얼마나 앞뒤가 안 맞는 얘기입니까? 도대체 무엇을 부흥시킨다는 말입니까? 상식인은 저질스런 말로 웃기는 사람을 교만하지 않은 태도를 가지고 경멸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분이 어렸을 때 한 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맨날 맞고 왔습니다. 키도 컸고 덩치도 컸는데 학교에서 매일 맞고 오니까 그가 친구에게 왜 그렇게 매일 맞고 다니느냐고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가 말하길 자기가 누군가를 때리면 목사인 아빠가 욕먹을 것 같아서 어린 마음에 아빠를 위한다고 그렇게 매일 맞고 다닌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격입니다. 그 막말하는 목사 아들과 얼마나 인격 차이가 납니까?   

설교나 정치는 이빨 자랑이 아닙니다. 설교와 정치가 쇼입니까? 약자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전 인생을 걸고 뛰어야 할 정치에서 이빨 자랑을 하며 정치를 희화화시키는 것에 속으면 히틀러에게 속은 독일 국민들처럼 됩니다. 쥐와 같은 동물 부류를 설치류라고 하는데 이빨로만 너무 설치면 인간 설치류가 됩니다. 설치류 인간에게 인격적인 인간이 넘어가면 안 됩니다. 대의명분도 설치류가 주장하면 그 대의명분을 잃습니다.  

예를 들어, 정권심판이란 대의명분이 있어도 여자와 노인의 인격을 짓밟는 저질스런 이빨로 정권심판을 선동하면 상식적인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립니다. 자신의 인간됨됨이가 썩었는데 누구를 심판하겠느냐는 반감이 당연히 생깁니다. 아무리 정치가 썩고 국민수준이 낮아졌어도 그렇게 이빨로 설치는 사람을 어떻게 국회로 보냅니까?  

요새 일부 진보주의자는 기독교인을 심하게 욕합니다. 장로 대통령 정권이 싫다고 기독교까지 싸잡아 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성을 잃은 행동입니다. 장로가 대통령이라고 기독교인이 다 여당편입니까? 주변의 목사님들과 성도들을 보면 장로 대통령을 비판하는 기독교인들도 절반입니다. 그렇다면 그들도 우군인데 왜 기독교 전체를 저질스런 말로 비하합니까? 결국 극단주의는 우군도 잃게 만듭니다.

대통령 한 사람이 장로라고 기독교 전체가 보수 꼴통 종교입니까? 지금 진보사상을 추구하는 기독교인들도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나라 기독교 분포도를 보면 영남지역의 복음화 율은 약 10%가 조금 넘고 호남지역의 복음화 율은 무려 35%가 넘습니다. 순복음교회나 명성교회처럼 호남 출신 성도가 압도적으로 많은 교회에서도 호남 출신 성도들이 영남 출신 담임목사를 얼마나 잘 섬깁니까? 미국에서 제가 섬겼던 한 한인교회는 교회 리더십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영남 출신인데 호남 출신 담임목사를 얼마나 충성스럽게 섬겼는지 모릅니다.   

그런 면들이 기독교는 지역감정에 휘둘리고 무조건 기득권만 대변하는 보수 꼴통 종교가 아님을 증명합니다. 결국 진보진영의 소리 없는 우군들이 기독교인 중에 절반입니다. 그들을 막말로 싸잡아 적군으로 만든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진보가 건전한 진보로 사회에 공헌하려면 막말로 진보진영의 액스맨 역할을 하는 이빨 진보인들과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그것을 못했기에 이번에 야당이 다 차려진 밥상을 차버린 것입니다.   

사실 김용민의 막말은 좋게 말해서 ‘막말’입니다. 그런 말은 제대로 된 인간의 입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말입니다. “한 여자를 강간해서 죽이자!”는 말이 우스갯말입니까? 딸을 가진 부모에게는 용서하기가 힘든 말입니다. 한 골수 민주당원은 그의 얼굴을 보면서 수원 토막살인 사건의 범인의 얼굴이 오버랩 되고 그가 입은 노란색 옷을 보면서 40년을 지지한 야당에 환멸을 느꼈다고 합니다.  

거짓말을 속어로 ‘구라’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대놓고 구라를 치겠다고 이름도 ‘구라’라고 바꾸고 저질스런 말을 해댑니다. 남의 인격을 짓밟는 그런 정신적인 살인 행위들을 보면 인성이 의심스럽습니다. 또한 그런 저질스런 말들이 공중파 방송을 통해 여과 없이 나오면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누구는 그런 말을 통해 욕망과 통쾌함을 자극할 줄 몰라서 못합니까? 짐승이 아닌 사람이 되고 싶기에 안 하는 것입니다.  

입에서 인간의 말이 나오면 ‘입’이지만 짐승의 말이 나오면 ‘주둥이’고 마귀의 말이 나오면 ‘아가리’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둥이와 아가리로 흥하면 반드시 주둥이와 아가리로 망한다는 사실입니다. 잘못된 주둥이와 아가리는 다 된밥에 재를 뿌리고 인생의 행복을 앗아가고 시대정신을 무섭게 후퇴시킵니다.  

며칠 전에 한 대중문화 평론가란 사람이 ‘구라 방송인’을 ‘시대의 입’이라고 칭찬하는 글을 썼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런 말이 나오는 이유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저질스런 말로 순간적 웃음효과를 노리는 사람의 말을 듣고 너무 웃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막말로 남을 짓밟는 사람은 언젠가 큰 사고를 칩니다. 그래서 이번에 큰 사고를 친 것입니다. 특히 노인을 싸잡아 헐뜯는 것은 결국 자기 부모를 헐뜯는 패륜입니다. 그런 패륜아를 어떻게 국회로 보내겠습니까?  

이제 방송에서 저질스런 말로 이빨을 과시할 때 그 프로를 보지 마십시오. 공당도 그런 사람을 멀리해야 합니다. ‘멀리해야 할 사람’을 멀리하지 않으면 ‘가까이 있어줄 사람’까지 멀어집니다. 세상에서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세치 혀입니다. 하고 싶은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가릴 줄 알아야 앞길이 열립니다. 결국 말은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고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고 축복과 저주를 좌우하는 제일 원천입니다.
  

< 사랑에 대한 3가지 정의 >  

본문은 말의 효용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썼습니까? 잘못된 복음을 수용하는 일부 갈라디아 교인들을 바로 잡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을 바로 잡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완전히 바꾸는 혁명은 오히려 쉽지만 바로 잡는 개혁은 훨씬 어렵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잘못된 신앙을 바로 잡으려는 사도 바울의 간절한 모습을 보면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무엇일까요?  

1. 논리 이상의 것  

설득에는 논리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바른 것’도 중요하지만 그 바른 논리를 ‘사랑으로 잘 표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갈라디아서는 ‘다른 복음’을 강하게 책망하는 서신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 6-9절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긴다! 다른 복음은 없다!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는다!”라고 강력하게 잘못된 복음을 경고합니다.   

그런 어투의 말씀이 본문 바로 앞 구절까지 계속되다가 본문부터는 그 어투가 바뀌어 논리적인 설득보다는 애정에 호소합니다. 그처럼 때로는 논리적 변론보다 애정을 앞세운 호소가 더욱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말과 관련해서 다음 3가지는 꼭 조심하십시오. 첫째, 논리적으로 말만 잘하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말만 잘하면 안 되고 말의 실천도 잘해야 합니다. 이 교훈은 지극히 당연한 교훈이기에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둘째, 저질스런 말을 조심하십시오. 저질스런 말을 한다는 것은 인격도 저질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일단 말이 거칠고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을 멀리하십시오. 부흥사라도 말을 함부로 하면 외면하십시오. 말을 저질이면 일단 그의 인격이 의심되고 그로부터 진실함을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말은 인격과 사람됨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저질스런 말을 하지도 말고 저질스런 말을 하는 사람을 가까이도 하지 마십시오.

셋째, 훼방하는 말을 조심하십시오. 어떤 말은 진리를 내세우는 말 같은데 사실상 더 큰 진리를 훼방하고 어떤 말은 의로운 말 같은데 사실상 더욱 큰 의를 훼방합니다. 그러므로 바른 말을 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바른 말을 바르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바른 말을 하면서 누군가의 마음을 나누게 하면 바른 말이 바람직한 말은 되지 못합니다. 바른 말은 바람직한 말도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부부간이나 부자간의 말을 보면 서로의 입장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바른 말이지만 그 바른 말 때문에 오히려 마음이 나눠지고 선한 의지가 꺾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녀들도 바른 말만 듣고 자라면 마음이 부모로부터 더 멀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똑똑한 어머니가 자식을 버린다는 말도 생긴 것입니다. 바른 논리의 수준을 넘어서서 바른 말도 적절한 때에 사려 깊게 표현하는 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2. 이해하는 것  

본문 12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사랑의 가장 위대한 표시는 상대방처럼 되는 성육신입니다. 남이 입장이 되어 보면 충분히 이해됩니다. 이런 인디언 속담이 있습니다. “친구의 신을 신고 십리를 가보지 않은 사람은 충고할 자격이 없다.” 남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으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을 사랑하면 언어까지 자녀들처럼 변합니다. 제 아이들이 어렸을 때 젓가락에 이상한 장식을 하고 마술봉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마술봉을 흔들며 아빠에게 소리쳤습니다. “죽어라! 얍!” 그러면 여지없이 죽는 척하고 쓰러져야 합니다. 아이들을 너무 사랑했기에 아이들 수준으로 같이 놀아준 것입니다. 그처럼 상대방과 같아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처럼 같아지면 비로소 상대방이 이해됩니다. 

남편은 아내가 백화점 좋아하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남자들은 그것이 잘 이해되지 않지만 여자에게 살림의 추구가 상당히 중요한 이슈라고 생각하면 비로소 이해됩니다. 반면에 아내는 남편의 자존심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안에 따라 남편의 잘못을 확실히 지적해도 남편의 자존심만은 지혜롭게 살려주어야 합니다. 명예와 자존심을 짓밟고는 좋은 열매가 나올 수 없습니다. 남편의 자존심과 명예를 높여줄 때 남편의 조종도 수월해집니다.   

사역자와 성도 관계에서도 이해가 필요합니다. 사역자는 자기가 평신도였을 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성도도 사역자의 심정을 최대한 이해해주어야 합니다. 사역자 경험은 없어도 이제까지 살면서 리더의 위치에 있었던 때를 한번만 되돌아보아도 리더의 고충이 이해됩니다. 그처럼 내편이 아닌 상대편의 입장에서 보는 이해의 깊이가 바로 사랑의 척도입니다.


3. 약점을 덮어주는 것  

본문 13-14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에게는 일설에 간질이 있었다고 하고, 또한 안질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를 업신여기거나 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천사나 예수님처럼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할 수 있었으면 그들의 눈이라도 빼어주려고 했습니다(15절). 그처럼 누군가의 약점과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특히 상대방이 부끄럽게 감추려는 것은 몇 겹으로라도 감싸주십시오.  

누군가의 약점을 그를 내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이용거리로 삼으면 그의 가슴에 한을 심게 됩니다. 그러므로 약점을 덮어주고, 약점을 모른 체하십시오. 배우자 때문에 일이 잘못되었을 때 슬쩍 모른 척 지나가주십시오. 그 상황에서 당신 때문이라고 따지며 그의 기를 꺾어 놓으면 그를 조종하기 쉽게 되기는커녕 오히려 상처만 남깁니다. 그 상처가 깊어지면 한이 됩니다. 결국 배우자의 불행은 가정의 불행이 되고 자신의 불행이 됩니다.  

배우자를 어떻게 감동시킵니까? 꽃을 사주고 맛있는 음식을 사주고 분위기를 맞춰주면 순간적인 감동만 줍니다. 그러나 그의 잘못으로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 허물을 덮어주면 그 덮어주는 마음에 오래 감동합니다.  

어떤 인격적인 남편은 밥을 먹으면서 돌을 씹으면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아내가 모르게 조용히 처리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돌아오는데 아내가 이웃에게 수다를 떨며 자랑했습니다. “민수 엄마! 저는 이제까지 한 번도 밥에 돌을 넣어본 적이 없어요.” 그 말을 듣고 남편이 흐뭇해합니다. 얼마나 좋은 인격입니까?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임장을 이해해주고 배려하고 덮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 삶을 복되게 만드는 헌신 >   

그처럼 남을 배려하고 덮어주는 사랑의 교감이 있어야 그 인생은 가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에는 그런 깊은 사랑의 교감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다른 복음은 절대 안 된다고 애정을 앞세워 호소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 마치 눈물 흘리며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는 어머니의 모습과 같습니다.   

자녀를 바르게 인도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매를 드는 아버지의 모습’과 ‘눈물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부터 4장 11절까지 사도 바울은 매를 드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본문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때로는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이 자녀의 변화에 더욱 큰 역할을 합니다. 그처럼 인간관계에서는 논리적 충고보다 애정의 호소가 더욱 중요합니다. 결국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십자가의 사랑과 헌신에 있습니다. 

이번 주에 저희 선교연맹 총회가 33년 총회 역사상 처음으로 제주도에서 개최됩니다. 이번에 총회를 준비하면서 멀리서 많은 비용을 들여서 오시는 분들의 부담을 줄여드리고 또한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목회자와 선교사님들에게 기쁨과 안식을 드리려고 체재비는 한국에서 다 대기로 했습니다. 오시는 분들이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그 일이 우리에게는 많은 희생이 따릅니다. 재정도 부족해서 걱정과 부담도 있습니다. 그래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기쁨과 보람이 넘칩니다. 그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다 기억해주실 줄 믿습니다.   

사랑은 희생이고 헌신입니다. 그 헌신적인 사랑은 결코 자신에게 손해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헌신이 의미 없이 사라질 것 같지만 하나님이 있으신 것처럼 우리의 헌신도 틀림없이 의미도 있고 결과도 있을 것입니다. 그처럼 헌신적인 사랑은 삶을 아름답게 만들고, 헌신하면서 행복하게 만들고, 헌신 이후에는 축복이 뒤따르게 만듭니다. 그런 헌신적인 사랑을 실천하면서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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