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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등불이 필요합니다 (막 4: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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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이 필요합니다 (막 4:21-25)


막4:21-25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24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세상의 등불

어느 스승이 제자들에게 엽전 한 닢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동전 하나로 온 방안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물건을 사올 수 있겠느냐?” 제자들은 어떻게 그런 물건이 있을까 하며 서로 수군거리기만 하였습니다. 그 때 한 제자가 “제가 사오겠습니다.” 하고는 엽전 한 닢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곧 돌아온 제자의 손에는 양초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불을 붙여 양초를 피우자 온 방안이 빛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것이 빛의 위력입니다. 어둠을 물리치는 것은 한 자루의 촛불입니다. 사람들이 등불을 가져오는 이유는 말 아래나 평상 아래 두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높은 곳에 두어 온 집안을 환히 비추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등불로 부르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마5:14) 마태복음에서는 이어지는 15절에서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21절의 등불과 관련된 말씀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세상을 비추는 등불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욕심으로 어두워진 세상을 비추기 위해서 밝힌 등불은 다름 아닌 그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주님도 참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갈릴리 어부들을 모아 놓고 너희들이 세상의 빛이요 어두운 방을 밝히는 등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들도 참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구약시대에도 그러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랬습니다. 주님은 중동에서 가장 작은 나라인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중동 땅을 비추는 빛으로 세우셨습니다.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49:6) 이스라엘이 위대해서 빛이 될 수 있는가? 아닙니다. 그들은 변방은 작은 국가에 지나지 않습니다. 포로가 되어서 곳곳에 흩어진 패망한 백성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손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있습니다. 우주와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빛이 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잘나서 빛으로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이라는 하나님 말씀이 대단하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주시며 우리 아버지시고,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빛난 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치 달빛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달이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달빛은 태양 빛을 받아 반사되어 나옵니다. 달이 가장 밝은 빛을 낼 때는 보름달일 때입니다. 보름달은 정면으로 태양을 마주보고 있을 때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바라보고 내 안에 모실 때 우리는 가장 밝은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권위는 한 사람의 능력으로부터 나오기도 하지만 권위는 위임에 의해서 생기기도 합니다. 새파랗게 젊은이가 무슨 능력이 있고 무슨 권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를 사장의 자리에 앉히면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머리를 조아립니다. 그것이 바로 자리가 주는 권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빛으로 부르신 순간 우리는 빛이 되고 빛의 권위를 갖습니다. 내가 빛이냐 아니냐로 고민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빛이 되어라’는 명령도 아니요 ‘빛이 될 것이라’는 미래형이나 가능형도 아니요 ‘너희는 빛이다’는 선언입니다.   

이제부터 우리 물음은 내가 빛인가 아닌가가 아닙니다. 내가 빛인데 그 빛의 역할을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빛이 희미하고 그 등불은 말이나 평상 아래 감추고 있다면 세상은 어두울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세상이 어두울 때 세상을 탓하기보다 자신을 먼저 탓합니다. 내가 빛 된 삶을 살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 것은 악인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의인 열 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 망했던 이유는 공의를 행하는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렘5:11)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가정을 비추는 빛입니다. 사회를 비추는 빛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빛이 될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5장 16절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가 착한 행실을 할 때 세상이 밝아집니다. 미국의 조지 바나 리서치 센터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되어야 사회적 영향력을 끼칠 수 있나 하는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리서치 센터의 결론은 세상 사람들의 수준보다 40% 정도 앞서갈 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세상 평균치가 100명중 20명이 착하다면 교회는 60명이 착해야 그것을 선한 공동체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면 신앙인들이 일반 세상 사람들보다 약간 더 착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정도 가지고는 안 됩니다. 경건을 추구하는 종교인이기 때문에 우리를 바라보는 세상의 기대수준이 높습니다. 빛이 어두움보다는 밝기는 하지만 희미하다면 당연히 욕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빛된 삶은 단지 찾아서 좋은 일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항상 긍정적이며 기쁜 얼굴로 살아가는 것도 빛과 등불된 삶입니다. 요즘 모두가 경기가 어렵다 살기 힘들다하는데 오히려 늘 감사하고 만족하며 기쁜 얼굴로 살아가면 그것이 세상을 밝게 만듭니다. 이런 사람 한사람만 있어도 모임의 분위기가 바뀝니다. 사람들은 남을 비판하고 왕따 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때 그 사람의 긍정적인 면을 말합니다. 허물을 드러내기보다는 ‘그 사람이 어쩔 수 없어 그랬어’ 하며 감싸줍니다. 오히려 연약한 자의 편을 들어줍니다. 

이것이 빛과 세상의 등불 된 자의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 이익을 좇아서 얼마나 바쁘게 살아갑니까. 이런 때에 자기가 먼저 희생하고 양보하고 남을 배려하고 공동체를 먼저 생각합니다. 서로 싸우고 갈등하는 곳에서 먼저 용서하고 평화의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관행이라 하며 불의를 저지르는 곳에서 정직과 원칙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 가게 주인이 예수쟁이냐? 그러면 믿을 만 하겠구만.” 하는 말이 나올 때 비로소 한국 교회가 빛과 등불의 역할을 제대로 하며 살고 있다 할 것입니다.

물론 지금 한국교회나 신앙인들의 모습은 여기에 많이 못 미칩니다. 여러 가지 부정적인 모습이 많이 있는데 이번 19대 총선에서도 그 부끄러운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기독당’이라는 이름의 단체가 나왔습니다. 보수적 성향의 일부 크리스천들이 조직한 정당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장이나 홍보 팜플렛은 전혀 기독교적인 점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선거 팜플렛에는 ‘나라가 위기다’ ‘종북좌파 척결’로 도배되어 있었습니다. 20개 정당 중 가장 극우적인 성향을 보였습니다. 차라리 ‘종북좌파 척결당’이라고 바꾸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결과를 보니 1.2%의 지지율을 얻었습니다. 놀랍게도 자유선진당에 이어 5번째로 많은 정당 득표를 얻었습니다. 아마 일부 기독교인들이 같은 종교이기 때문에 지지해 준 것 같습니다. 이들의 주장들을 그냥 가볍게 취급할 수 없는 이유는 정치적으로 이와 유사한 생각을 하는 신앙인들이 실상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회 정치적으로 신앙인들이 빛과 등불을 역할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기 위해 이런 주장들의 배경과 잘잘못을 따져보기를 원합니다.  

이들이 주장의 배경을 요약하면 다음 세 가지라 할 것입니다. 이념적으로 종북 세력과의 싸움, 나라를 구하자는 애국심에 호소, 기독교 이기주의. 그런데 이런 주장들은 모두 구약의 정신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종북세력과의 싸움은 옛 이스라엘이 주변 가나안 부족들과의 싸움이나 우상 척결 운동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애국심이나 기독교 이기주의는 모두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이나 이방 민족에 대한 배타적 태도에서 근거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구약의 폭력적이고 민족주의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신약의 시대입니다. 구약의 말씀들은 신약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비추어 새롭게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기독교인들이 만약 정당을 만들거나 특정 정치 집단을 공개적으로 지지한다면 신약의 십자가의 윤리에 따라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의, 진리, 거룩, 사랑, 희생, 섬김, 나눔, 평화, 화해, 통일, 인권, 하나 됨 등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윤리들입니다. 신앙인들이 이런 삶을 살고 이런 정신으로 정치를 행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여기에서 참된 빛을 볼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념적이고 애국적인 것에 호소한다면 그것은 세상 정치인들이나 할 일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빨리 반공 기독교에서 벗어나 십자가의 희생과 평화의 기독교로 전환해야 합니다. 저는 그래서 ‘구국 기도’라는 말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일제 시대에는 애국이니 구국이니 하는 것이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민족에 대한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강대국의 애국심은 곧 제국주의이고 그것은 약소국에 대한 횡포로 가기 쉽습니다. 기독교에는 민족주의가 없습니다. 단지 가난한 사람들이나 민족에 대한 사랑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빛으로, 등불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세상에 드러났다고 하여 다 빛은 아닙니다. 세상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빛이야 말로 주님이 원하시는 세상의 빛입니다.

감추지 못한다

빛은 감출 수 없습니다. 22절 말씀입니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말씀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숨겨 둔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예수님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이 자신의 정체를 알아보는 것에 대해서 함구 명령을 내립니다. 기적도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행하고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 것을 명령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아 본 후에도 즉시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막8:30)하셨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메시야 비밀론이니 하는 거창한 타이틀을 여기에 붙입니다. 그러나 그 빛은 감출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소문이 더 퍼져 많은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막1:45) 결국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온 천하에 그 존재가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빛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감추려 하여도 새어나오고 결국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진리나 진실 또한 그렇습니다. 아무리 억눌러도 드러납니다. 그래서 진리가 위대하고 모든 것의 최후의 승자는 진리와 진실입니다.

천동설과 지동설의 논쟁이 대표적입니다. 지금은 모두가 지구가 태양 주위를 회전한다고 인정하지만 중세 때만 해도 지구 중심으로 태양이 돈다고 믿었습니다. 지동설을 주장하면 이단으로 낙인찍히고 심지어 화형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지동설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과학적 발견물을 세상에 내어놓기를 두려워했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단자로 몰려 죽지 않으려고 30년 동안 그 사실을 비밀로 지켰습니다. 그러다 1543년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서야 비로소 두려워하는 인쇄업자를 설득하여 지동설을 담고 있는 『천체의 회전』이라는 책을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받아들였고 지지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1616년에 로마 종교재판소에 소환되었고 다음과 같은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태양이 중심이며, 태양이 지구의 주위를 회전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어리석은 것이며, 부조리한 신학상의 오류이며, 이단이며, 성서에 모순된다.” 갈릴레오는 이 판결을 받아들여야 했고 그 후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습니다. 

새 인물이 교황의 자리에 오르자 갈릴레오는 전임 교황보다 학문에 대해 관용적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그의 이론을 공개 석상에서 표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는 죽음을 면하기 위해 다시 다음과 같이 서명해야 했습니다. “나 갈릴레오는 70세의 죄수로서 무릎을 꿇고, 추기경 앞에서 성서를 두고 맹세하는 바, 나는 지동설을 오류와 이단으로 규정하고 저주하며 혐오한다." 

갈릴레오는 죽음을 면할 수는 있었지만 석방되지는 않았습니다. 죽어서도 가족의 묘지에 묻히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중세의 교회는 진리를 신앙의 편견으로 정죄하고 감추어 두기에 급급했습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자 루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지동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건방진 점쟁이(코페르니쿠스)에게 귀를 기울인다. 그는 회전하는 것이 하늘과 창공과 태양과 달이 아니고 지구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어리석은 자는 천문학의 모든 체계를 엎어놓으려 하였다. 그러나 성스러운 성서는 여호수아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을 향해서 ‘멈추라’는 정지명령을 내렸다고 증거한다.”

그들의 믿음이나 편견이 어떠했든지 간에 이제는 지동설이 진리이고 모두가 인정합니다. 인간은 무지나 편견 때문에 의도적으로 진리와 진실을 감추려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진리와 진실만이 최후의 승자이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감추어져 있고 은폐되어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실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다 드러날 것입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그 모든 것들은 낱낱이 다 드러날 것입니다.

스스로 삼가라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삼가야 합니다. 24절입니다.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다시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너희에게 되어서 주실 것이요, 덤으로 더 주실 것이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척도가 있습니다. 이 척도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기도 하고 자신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재고 판단할 때 사용하는 도구로 너희도 또한 판단을 받을 것이요 그것보다 더 심하게 받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만일 다른 사람을 정의나 거룩의 관점에서 판단하면 주님 또한 우리를 똑 같은 기준을 가지고 판단할 것이요 더 가혹하게 판단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를 판단하는 잣대는 부드럽지만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는 매우 엄격합니다. 세상이 주로 하는 방식입니다. 자기편에게는 부드러운 잣대를 들이대고 상대편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댑니다. 이번 선거과정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자기편에 불리한 것은 감추고 상대방에게 불리한 것은 드러내고 가혹하게 심판합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그 반대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엄격한 잣대를 댔어. 그렇다면 너에게는 더 엄격한 잣대로 심판하겠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다른 사람이 잘못을 범했을 때도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혹시 자신도 동일한 잘못을 범했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간음한 여인이 현장에서 잡혀왔을 때도 주님은 이에 대해서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그 여인을 죄인이라 판단하고 죽여야 한다고 하며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리려 하였지만 주님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8:11) 주님은 사랑이라는 잣대로 이 여자를 판단했고 그래서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처럼 사랑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면 마지막 날 심판 대 앞에서 주님은 우리를 동일한 사랑의 잣대로 판단하실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 후하게 판단해 주실 것입니다. 

저는 우리 시대에 본받을만한 위인으로 김홍섭 판사를 들고 싶습니다. 김홍섭 판사는 ‘사도 법관’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법조계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판사 중 하나입니다. 그는 50, 60년대에 판사 생활을 했고 대법관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는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검소한 생활을 했습니다. 고무신을 신고 다녔으며 바지는 군복 물을 들인 옷을 입었으며 도시락을 옆에 끼고 법원에 출근했다고 합니다.

그는 재판을 하면서도 인간이 어떻게 같은 인간을 단죄할 수 있는지 늘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판결 후 피고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부덕한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런 판결을 내린 것을 무척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제가 여러분들에게 판결을 내리는 것이 합당한지 모르겠습니다. 판결에 불만이 있으시다면 무척 죄송하게 생각하고 용서를 빌겠습니다.” 또 사형을 판결하게 되는 경우에는 그 사형수를 찾아가 이렇게 용서를 구했다고 합니다. 

“미안합니다. 내가 당신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없으나, 법률이 정한 원칙에 따라 불가피하게 사형을 언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의지할 데 없는 사형수들의 묘지도 세워 주었는데 그가 죽을 때 그 또한 그 곁에 함께 묻혔다고 합니다. 사도 법관 김홍섭이 죽자 가장 안타까워했던 사람들은 감옥의 죄수들과 사형수들이었다고 합니다. 한 사형수는 “우리는 판사님을 아버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판사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더 사셔야 할 분인데 이 더럽고 추한 세상에서 살지 말라고 일찍 데려가신 것만 같습니다.”라고 편지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25절의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사랑이 있는 자는 더 받을 것이요 사랑이 없는 자는 그 나마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입니다. 겸손하고 자기를 돌아보는 자는 주님으로부터 풍성한 긍휼의 은혜를 받을 것이지만 교만하고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는 사람은 그나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삼가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고 깨닫는 만큼 우리는 더 풍성한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무지와 욕심을 따라 산다면 그 있는 것마저도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잘 깨닫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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