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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최저점을 지날때의 신앙 (합 3: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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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최저점을 지날때의 신앙 (합 3:17-19)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언제라도 인류 역사에 개입하시고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이신론자들은 이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의 법칙을 주셨기 때문에 개입하셔서 기적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에 얼마든지 개입하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며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온몸에 암이 퍼졌어도 기도했더니 암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또 사업이 극도로 곤란해졌는데 기도했더니 돕는 자가 나타났다는 간증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기적이 하나님의 일반적인 통치방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늘 그렇게 행하신다면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르지도 않을 것입니다. 암이 퍼져있는데 치료를 안 하면 죽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통치방식입니다. 실제로 100명이 기도하면 몇 명은 기적으로 나아도 90% 이상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통치에 따라 죽게 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입니다. 사업이 계속 어려운데도 노력하지 않고 개혁하지 않으면 결국 망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통치방식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처리해주셔야 되는 것 아니냐고 기도했지만 악인들은 계속해서 득세했습니다. 므낫세 왕이 죽고 나서 악인이 없어지나 했더니 여호야김이 등장하고 여호야김이 죽고 나서 그 아들 여호야긴도 악하고 삼촌 시드기야까지 계속해서 악인들이 득세한 것입니다. 상황이 좋아진 것이 아니라 더욱 나빠졌습니다. 악인들을 제거해달라고 했더니 악인들이 더 늘어났습니다. 왜 악한 바벨론이 더 의로운 유다 백성을 죽이고 멸망시키느냐고 기도했더니 악한 바벨론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3차에 걸쳐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갔고 결국 유다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박국 1장에서 하박국 선지자가 제기했던 문제들이 하박국 3장에서 계속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악화된 것입니다. 

Ⅰ. 하박국 선지자의 3대 상황 

오늘 이 짧은 세 구절에서 하박국 선지자가 처한 상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계속해서 악화되는 상황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 3:17). 우리말에는 ‘비록’이라는 단어가 한번 나오지만 영어 성경을 보면 세 번 나옵니다. ‘비록’이 세 번 나오고 ‘비록’이 나올 때마다 ‘없으며’가 두 번 나옵니다. ‘비록’이 세 번 나오고 ‘비록’이 나올 때마다 두 가지가 없다고 나오니까 ‘삼미이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보다 포도나무가 더 중요하고 감람나무보다 밭의 식물이 더 중요하고 양보다 외양간의 소가 더 중요합니다. 처음에 없는 것보다 나중에 없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결국 상황이 점점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기도를 안 한 것도 아닌데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 이외에는 즐거워할 다른 요인이 없는 상황입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합 3:18). 참으로 놀라운 신앙의 고백이지만 이 고백의 뒷면을 보아야 합니다. 구원의 하나님 이외에는 즐거워할 다른 조건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사실, 그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행복할 수 있는 다른 조건이 하나도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셋째, 인생의 최저점을 통과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합 3:19). 이것은 위대한 소망과 확신에 차서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의 발을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라는 말의 뒷면을 보면 현재 나의 발은 낮은 골짜기, 인생의 최저점을 통과하고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높은 곳에 세워주실 것이지만 지금은 가장 낮은 골짜기를 통과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인생의 모든 상황이 악화되고 행복을 느낄만한 아무런 조건도 없으며 인생의 최저점을 지나가야 할 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떠나버리시겠습니까? 교회 다녀봐야 아무 소용없다고 그만 나오시겠습니까? 그러면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기도해도 아무 소용없다고 기도를 중지하시겠습니까? 그러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두려워하며 떨고 계시겠습니까? 


Ⅱ. 하박국 선지자가 제시하는 세 가지 원리 
  
하박국 선지자는 이런 상황에서 세 가지 원리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첫째, 아무리 상황이 악화되어도 의인은 의롭게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 2:4). 악한 상황에 눌려 포기하거나 좌절하고 죄에 굴복하여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업이 안 되고 몸이 병들면 자포자기하고 술을 마시다가 빚지고 싸우기도 합니다. 원래 문제보다 술을 먹어서 일어난 문제가 더 커서 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불의와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더 의롭게 산다는 말은 도덕적으로 의로운 삶을 산다는 의미도 있지만 영적으로 믿음으로 산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통치하고 계시고 선한 목적으로 나를 다스리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상황이 어렵게 되어도 의로운 삶의 원리를 붙들고 의롭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둘째, 인간의 행복은 외형적인 조건이 아니라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아는데서 온다는 것입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합 3:18). 행복할 조건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상황도 모르고 기뻐하는 어린아이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장례식에 가보면 아이들은 자기 부모님이 돌아가신 줄도 모르고 즐겁게 뛰어다닙니다. 

이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처럼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상황이 나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기쁨과 즐거움은 외형적인 행복의 조건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권력이 없는 사람이 권력을 장악하면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또 병약하던 사람이 건강해지면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병약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장가 못 가던 사람이 처첩을 천명쯤 거느리면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솔로몬이 쓴 전도서를 보십시오. 돈과 권력을 다 가져봤고 처가 700명이고 첩을 300이나 두었으며 13년 동안 왕궁을 지어 백향목 집에 거해봤지만 다 헛되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결코 행복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솔로몬이 다 경험해보고 가르쳐준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이 어디서 오느냐? 인생의 기쁨과 행복은 내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알고 살아갈 때 오는 것입니다. 1분, 1초를 살아도 내 인생이 의미가 있을 때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행복의 외형적인 조건이 많아도 자기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느끼지 못하면 자살할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노숙자보다 돈 많은 사람, 권력 있는 사람들이 자살을 더 많이 합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모르겠고 살아봐야 의미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행복의 조건들을 모두 상실해도 인생의 분명한 목적과 의미가 있습니다. 사업이 망하고 가정이 깨져서 이혼의 고통을 겪어도 인생의 목적이 있습니다. 건강을 잃어서 이 세상에 남아있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해도 인생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사 43:21). 인간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약해도 하나님께 예배하고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입니다. 현재 상황이 어떻든지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습니다. 상황에 상관없이 우리의 존재 목적은 조금도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것은 행복의 조건을 모두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갈 때 집, 재산 모두 빼앗기고 자식도 죽고 국가도 잃어버리는데 행복할 조건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는데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면서 우상이 헛된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우상을 완전히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남은 백성들을 통해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면서 괴롭고 행복의 조건을 모두 잃어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선한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제가 아침마다 교역자들과 ‘오늘의 양식’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예배드립니다. 그런데 ‘오늘의 양식’ 3월 24일 내용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부부가 어린 아들을 하나 얻었는데 어렸을 때에 교통사고로 그만 죽어버린 것입니다. 아들이 죽고 부인이 너무 괴로워하다가 집을 나가버렸답니다. 아들을 잃고 아내가 집을 나갔으니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행복의 조건을 모두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길을 가다가 한 여자가 어린아이를 끌고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린아이는 발이 느린데 그 여자는 막 끌고 가면서 빨리 따라오라고 욕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손을 놓쳤습니다. 그러자 엄마가 아이를 향해 욕을 퍼부으며 계속 걸어가니까 아이가 자리에 주저앉아 우는 것입니다. 그 장면을 보고 아들과 부인을 잃은 남자가 그 아이 옆에 앉아서 아이를 위로해주고 아이의 엄마에게 그렇게 싫으면 아이를 자신이 데려가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자식을 잃어본 사람은 자식 하나가 얼마나 귀한지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울고 있는 아이를 자신이 데려가도 되느냐고 물어본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잃어버리셨기 때문에 길을 잃고 방황하는 우리를 사랑하고 안아주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통의 하나님이 아니라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신 33:29).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셨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 성도들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영원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지나간 과거가 아무리 좋아도 옛날이 좋았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과거는 성도에게 최상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최상의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삶에는 최상의 축복이 미래에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은 영원을 준비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행동 하나가 영원의 상이 되고 내가 하는 말 한마디가 영원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우리 성도들에게 천국의 영원한 축복을 보장해주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어떤 노숙자가 옷도 지저분하게 입고 다니고 술 마시다 넘어져서 얼굴에 상처가 났는데도 즐거워하며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저 노숙자는 정신까지 이상해졌나 보다 생각했지만 계속해서 노숙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가 그렇게 즐겁냐고 물어보니까 1년 뒤에 조상으로부터 1조의 유산을 받기로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노숙자지만 1년 뒤에 1조의 유산을 받기로 되어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 성도들에게는 구원의 하나님께서 미래에 최상의 축복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셋째,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합 3:19). 비록 지금은 내가 힘이 약하고 능력이 없어서 가장 낮은 골짜기를 지나고 있다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주시기 때문에 나를 다시 높여 주시고 내 발을 사슴과 같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의 능력으로 삼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면 내 인생이 골짜기를 헤맬지라도 결국 승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나라에 가서 주님과 함께 세상을 판단할 것입니다. 천사들도 우리의 판단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높은 정상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대법관만 돼도 어마어마하게 무게 잡고 다니지만 천사를 재판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천사를 재판하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비록 우리 삶에 고통과 어려움이 있고 상황이 악화되어도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Ⅲ. “찌라도”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 

‘비록’으로 시작해서 마지막이 ‘없을찌라도’로 끝나는 신앙은 줄여서 ‘찌라도’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하박국 선지자 외에도 ‘찌라도’의 신앙을 가지고 산 사람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먼저 다니엘 3장을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나옵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두라 평지에 금 신상을 세워놓고 모든 백성에게 절하라고 했습니다. 절하지 않으면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죽이겠다고 하여 다니엘의 세 친구는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느브갓네살 왕이 질문했습니다.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단 3:15). 

너희 하나님이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서 건져낼 능력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자 세 사람이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단 3:17-18).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풀무불에서도 얼마든지 건져낼 능력이 있지만 설사 그런 기적을 베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결단코 우상숭배는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찌라도’의 신앙입니다. 
 
시편 23편에 나오는 다윗의 신앙도 동일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4). 다윗의 인생도 참 험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여러 번 지나갔습니다. 장인이 사위인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또한 다윗은 자녀가 자기의 후궁을 겁탈하고 자신을 죽이려고 해서 기드온 골짜기를 울면서 지나갈 때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두려움과 좌절을 이겨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몸에 괴롭히는 육체가시가 있었습니다.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질병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 번씩이나 그것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럴지라도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의 선한 목적임을 깨닫고 만족했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9). 

내가 약해야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수 있기 때문에 약하게 만드셨다는 응답을 받고 바울은 만족했던 것입니다. 


결론 
  
마귀는 여러 가지 무기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마귀가 가장 즐겨 사용하는 무기는 ‘절망’입니다. 옛날 실존철학자들도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기도의 응답을 원했는데 응답되지 않아서 절망하고 인생길이 평탄하기를 원했는데 환란이 와서 절망하고 기적을 원했는데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서 절망합니다. 성도가 절망하면 누가 기뻐합니까? 마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수가 기뻐할 짓은 하지 말아야 됩니다. 인생이 아무리 내 뜻대로 안 되고 고통과 환란이 와도 첫째, 우리는 의롭게 살아야 됩니다. 둘째,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이 내 인생의 미래에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는 것을 믿고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됩니다. 그리고 셋째, 내 능력은 약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의 능력이시라는 것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과거보다 미래가 더 좋은 것입니다. 미래에 최상의 것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찌라도’의 신앙입니다. ‘찌라도’의 신앙으로 승리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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