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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날이 오기전에 (습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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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날이 오기전에 (습 1:7-13)
 
스바냐 선지자는 그 기원이 왕족입니다.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아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습 1:1). 손자가 여러 명 있는데 현손은 몇 대손입니까? 손자가 자녀를 낳으면 증손자이고 증손자가 자녀를 낳으면 고손자이고 고손자가 아들 낳으면 현손자입니다. 즉, 현손은 4대손입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히스기야의 4대손인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선한 왕이었는데 족보가 두 종류로 갈라집니다. 히스기야의 후손 가운데 왕이 된 사람과 왕이 되지 않은 사람으로 구별되는데 왕이 된 사람들의 족보는 악한 왕이었던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 아몬 그리고 선한 왕 요시야입니다. 그리고 왕이 되지 않은 족보는 아마랴, 그다랴, 구시, 스바냐인 것입니다. 

스바냐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숨겨 놓으신 자’입니다. 그는 왕족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지리에 익숙했습니다. 스바냐 1장 10절에 보면 그는 어문, 제이구역, 작은 산 등 정확한 지명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스바냐 1장 8절을 보니까 이방의 의복을 입은 자가 누구인지도 잘 알고 있고 귀족들과 양반들과 관리들의 의복 규정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바냐가 활동한 시대의 왕은 스바냐 1장 1절에 정확하게 나타나있습니다. 유다 왕 요시야는 유다 역사 최후의 종교 개혁가였고 구약시대의 칼빈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8살에 왕이 되어서 31년을 통치하다가 39살에 죽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는 여호와 앞에 정직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20살에 시작하여 6년 동안 우상을 타파했습니다. 그리고 26살에 성전을 수리했습니다. 

요시야 왕이 성전을 수리하다 모세의 율법책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신명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시야 왕은 신명기를 읽다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언약을 어겨서 어려움이 초래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베옷을 입고 온 백성들과 함께 회개하였습니다. 그 이후 요시야 왕은 유다 역사상 가장 크고 성대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은 네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우상타파 둘째, 성전 수리 셋째, 언약갱신 넷째, 유월절 준수입니다. 이 네 가지가 요시야 왕 31년 통치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스바냐 1장의 내용을 보게 되면 유다 백성들은 스바냐가 예언할 당시 세 가지 종류의 우상숭배에 빠져있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 위에 손을 펴서 바알의 남아 있는 것을 그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무릇 지붕에서 하늘의 일월성신에게 경배하는 자와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와” (습 1:4-5). 

첫째, 그들은 바알을 숭배하였는데 바알은 아세라 목상과 함께 음란한 제사를 드림으로 농업의 번성을 추구하던 종교였습니다. 

둘째, 스바냐 1장 5절 전반부에 하늘의 일월성신을 섬겼다고 나와있습니다. 해, 달, 별 등 천체를 숭배한 것입니다. 신명기 4장 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체를 숭배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셨습니다. “또 두렵건대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일월 성신 하늘 위의 군중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길까 하노라” (신 4:19).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천체를 숭배한 것입니다. 

셋째, 스바냐 1장 5절 후반부에 보면 말감이라고도 하고 밀곰이라고도 하는 신을 섬겼습니다. 솔로몬 왕 시대에 암몬에서 들어온 첩들이 말감이라는 신을 갖고 들어와 유다 백성들을 미혹했습니다. 이 우상숭배를 위해 그마림이라고 불리는 돌팔이 제사장들도 있었습니다. 원래 유다의 제사장들은 레위지파 가운데 아론의 후손들만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마림은 그런 합법성이 없는 불법적인 제사장들이었던 것입니다. 

요시야 왕이 20살 되던 해부터 우상타파를 시작했기 때문에 스바냐 선지자는 그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아 증거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증거한 메시지로 인해 요시야 왕은 자극을 받고 종교개혁과 우상타파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증거한 메시지의 핵심단어는 ‘여호와의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우상숭배로 인해 심판하실 날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습 1:14-15).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날입니다. 그날은 사람들에게 환란과 고통의 날이 될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예언한 여호와의 날은 그가 예언한지 불과 40여년 만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 의해 실현되었습니다. B.C. 587년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날은 이같이 역사적인 실현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만약 여호와의 날이 옛날 유다왕국이 바벨론에게 멸망하는 것만 의미한다면 지금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여호와의 날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항상 종말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1차적인 의미는 역사 속에서 실현되지만 2차적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이뤄질 온 인류에 대한 최후 심판의 날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행 17:31). 

공의로 심판할 날을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시고 심판주가 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심판할 때 예수님께서 공의를 기준으로 심판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심판은 가끔 공의롭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권력에 따라 재판의 결과가 바뀌는 경우도 있고 누구의 죄가 크냐는 것보다 누구의 변호사가 더 실력이 좋으냐가 재판의 결과를 결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든 재판이 그렇지는 않지만 이처럼 공의롭지 못한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심판은 완전한 공의를 따라 심판하십니다. 지나간 유다 역사에 실현된 여호와의 날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실현될 여호와의 날은 모든 사람에게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Ⅰ.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공의가 100% 만족되는 날이다 

스바냐 1장은 여호와의 날에 대해 세 가지 중요한 진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첫째,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공의가 100% 만족되는 날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징역 10년에 해당되는 죄를 지었다면 10년 동안 감옥에 있다 나오면 공의가 만족된 것입니다. 이렇게 형량을 채우고 나면 똑같은 죄목으로 다시 감옥에 집어넣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10년 징역 선고를 받아야 할 자가 판사에게 뇌물을 줘서 무죄로 나왔거나 형량이 줄어들었다면 그것은 공의가 100% 만족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아무리 억울해도 개인적으로 복수하지 말라고 합니다. 억울한 일이 있으면 국가가 그 사람을 공의롭게 재판해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기 때문에 결국 개인적인 복수가 성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공이가 100% 만족될 것입니다. 
 
둘째, 여호와의 날은 ‘희생의 날’입니다.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의 의복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습 1:7-8). 

희생이라는 단어가 심판과 관련되어 사용된 유일한 말씀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 희생제사가 시작됩니다.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제사가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종류가 여러 가지인데 모세가 레위기에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죄 다섯 가지로 법제화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희생제사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특징입니다. 옛날 오리겐이라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당한 것이 마귀에게 죗값을 갚으려고 한 것이라는 엉터리 이론을 내놓았습니다. 희생제사는 마귀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만족하셔야 열납된다는 특징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열납하셨습니다. 결국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만족하셔야 그 제사를 드리는 목적이 실현됩니다. 

구약의 모든 희생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가리키는 예표입니다. 희생제사는 모형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희생을 당하고 죽으시는 것이 실체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택하신 자들의 죄를 한 몸에 지시고 십자가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이번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이유는 성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위해 희생제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으시고 만족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된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택하시고, 성자 예수님께서 택한 자들을 위해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성령님께서는 택자를 부르시고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믿게 하시며 거듭나게 하사 죄 사함과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날에 희생은 무슨 의미가 있느냐? 앞으로 다가올 여호와의 날에도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된다는데 그날은 누구를 향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된다는 말이냐? 그것은 불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며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됩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70년 포로생활을 해야 공의가 만족되겠다고 하셨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70년 포로생활을 함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지만 최후 심판의 날 하나님을 거역한 불신자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됩니다. 스바냐 1장 14절에 70년 포로생활에도 용사가 심히 애곡했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장 7절을 보면 땅의 모든 족속이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보고 절망으로 애곡합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계 1:7). 

요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에 ‘개’자를 붙여 욕합니다. 만약 옆집 아저씨에게 ‘개’자를 붙여 욕하면 어떻게 되는지 해보십시오. 아마도 몇 대는 틀림없이 얻어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해 욕하고 대적하면 몇 대 얻어터지는 것으로 만족이 안 되는 것입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막 9:48-49). 

지옥에서는 죽지도 않습니다. 형벌이 10~20년 만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 됩니다. 영원히 타는 불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된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Ⅱ. 하나님을 거역한 죄인들은 ‘여호와의 날’에 임할 심판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한두 번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미가, 요엘 등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여호와의 날이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들은 선지자를 잡아 죽이고 그들의 경고를 거부했습니다. 선지자를 죽인다고 여호와의 날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B.C. 587년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예루살렘를 전멸시켰습니다. 

이처럼 최후 심판의 날에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무릇 찌끼 같이 가라앉아서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벌하리니” (습 1:12). 

‘하나님은 없다’라고 말하는 자들을 다 찾아내신다는 것입니다. 찌끼같이 가라앉아있고 바퀴벌레같이 숨어있어도 소용없습니다. 여호와의 날에는 아무도 숨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습 1:18). 

여호와의 날에는 불신자들이 멸절됩니다. 완전히 멸절시키는 도구가 베드로후서에 불이라고 했습니다. 노아 홍수 때는 물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보여주시며 다시는 물로 망하지 않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물보다 더 무서운 불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불로 심판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나님께서는 질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출 34:14). 

하나님의 질투는 자신의 배우자가 바람을 피울 때 질투하는 것과 같은 분노입니다. 이것은 은과 금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도망간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닙니다. 반드시 피해자가 요구하는 공의가 만족되어야 해결되는 것입니다. 


Ⅲ. 죄인들은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할 일이 있다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스바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죄인들은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명령이 시행되기 전, 광음이 겨 같이 날아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습 2:1-3). 

스바냐 2장 1~3절은 중요한 핵심 메시지입니다. 2절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전’이입니다. 시행되기 전, 지나가기 전, 임하기 전, 이르기 전.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세 가지를 하라는 것입니다. 첫째, 여호와를 찾으라. 하나님 앞에 나와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입니다. 여호와를 찾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둘째, 공의를 찾으라. 히브리어로 ‘쩨다카’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천국에서 받아주실 것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겸손을 찾으라. 교만은 하나님이 없이도 자신의 힘으로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1초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숨을 거둬가시면 바로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이란 한순간도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론 

여호와를 찾고 공의를 찾고 겸손을 찾으면 여호와의 날이 오지 않거나 연기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회개한다고 해서 여호와의 날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습 2:3).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여호와를 찾으면 죄가 아무리 많아도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덮어 심판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죄가 많은 죄인입니다. 성경에 간음한 여인을 앞에 놓고 사람들이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하자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돌을 들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도망가 버렸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0). 

우리는 모두 죄인이지만 왜 영원 형벌을 받지 않느냐? 그것은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예수님의 피로 다 덮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의로운 척하면 안되겠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이 담배를 피다가 부흥회에 참석하여 방언 받고 성령의 불을 받아 담배를 끊게 되었답니다. 그 다음부터 갑자기 담배 피는 사람들과는 신앙생활을 함께 못하겠다고 하면서 담배 피는 사람들을 정죄했다고 합니다. 은혜 받고 의인이 되는 것은 좋은 일지만 그것으로 인해 남을 정죄하거나, 자기는 의롭고 남은 죄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 형벌을 받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희생으로 인해 흘리신 피가 우리 죄를 덮어줬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공의가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제사로 100% 만족되었기 때문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옆에 계신 분과 인사하십시오. “우리는 지옥가기 다 틀렸습니다. 우리는 지옥에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공의가 만족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지옥에 갈 수 없습니다. 죄가 있어도 하나님께서 덮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숨겨주신 사람이 된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자의 이름이 바로 ‘하나님께서 숨겨놓으신 자’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으로 작은 스바냐가 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께서 죄를 다 덮어주시고 우리를 피난처에 숨겨주시며 영원한 형벌이 아니라 영원한 축복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같이 놀라운 복을 받았으므로 우리 가족들 중에 영원한 형벌로 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안타까워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계속해서 전도하고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전도하는 사람이 되시고, 하나님께 숨김 받은 사람이 된 것을 평생 감사하며 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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