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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의 자녀들 (눅 20:2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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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자녀들 (눅 20:27-40)

“코페루니쿠스적 발상”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종래의 사고 방식을 완전히 뒤엎는 획기적인 생각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16세기 폴란드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루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데서 유래한 말입니다. 그때까지 모든 사람이 천동설을 믿었습니다. 하늘이 돈다고 믿어왔는데 지구가 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다.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다. 이것이 예수 부활 이전의 믿음이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예수님은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끌려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죽은지 사흘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믿는 부활의 자녀들입니다. 


󰊱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인들

사두개인이란 예수님 당시 존재했던 유대주의의 한 종파였습니다. 제사장 족속 산헤드린 회원 같은 귀족들로 구성된 종파였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중시하고 변혁을 싫어하는 보수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27절)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모세는 형이 자식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고 형을 위해서 자식을 낳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첫째가 아내를 얻었으나 자식이 없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둘째도 자식이 없이 죽었습니다. 셋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일곱 형제가 모두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마침내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합니까?” 
일곱 형제가 모두 그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니 말입니다. 

사두개인들의 질문이 불순합니다. 부활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는 자기들의 생각을 입증하기 위한 괴상한 질문입니다. 이것은 자신들의 불신앙에 대한 자기 변명입니다.

사도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입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을 역설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12절)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였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너의 믿음도 헛것이다”(13절)

앞에서, 코페루니쿠스적 발상을 이야기했습니다. 지금까지 하늘이 돈다고 믿어온 사람들에게, 하늘이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지동설을 발표한 것이 16세기 인데 아직도 천동설을 믿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한번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고 믿어온 사람들에게 다시 살아난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부활 것처럼 부활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자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막에서 사는 베두인에게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노인이 칠면조 고기를 먹으면 젊어진다는 말을 듣고 칠면조 새끼를 한 마리 사다 길렀습니다. 어느 날 누군가 칠면조를 훔쳐 갖습니다. 노인은 자녀들에게 칠면조를 꼭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아들들은 그걸 어디 가서 찾느냐면서 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고 지나갔습니다. 몇 주 후에 또 도둑이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낙타를 훔쳐갔습니다. 아버지는 또 다시 칠면조를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몇 주 후에 말을 잊어 버렸습니다. 얼마 후에는 딸이 나갔다가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노인은 자녀들을 모아 놓고 이 모든 것이 다 칠면조 때문이다. 칠면조 도둑을 잡았더라면 낙타도 말도 도둑 맞지 않을 테고 딸도 폭행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며 야단을 쳤습니다. 

사막에서 생존하기 위한 너 죽고 나 살기가 있을 뿐, 사막의 생존 법칙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사막에서는 나를 공격하는 늑대를 제압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 겁니다.

기독교를 개독교로 조롱하고 목사를 “×까”라 조롱합니다. 노대통령을 노통장이라 부를 때 따라서 웃었더니 이대통령을 노가다 십장, 멸치대가리랍니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그대로 방치해 두니 막말과 욕설이 도를 넘어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국가의 존망을 걸고 1981년에 이라크의 핵시설을 파괴했습니다. 2007년에는 시리아의 핵시설을 폭파했습니다. 지난 1월 11일, 이란 핵과학자가 승용차를 타고 출근하는데 두 남자가 한 오토바이를 타고 접근했습니다.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았던 남자가 차량에 자석 폭탄을 붙였습니다. 

오토바이는 사라지고 9초 후에 폭탄이 터져 이란 핵과학자 로샨이 즉사했습니다. 운전자는 병원을 옮겼으나 숨졌습니다. 누가 이란 과학자를 암살했을까? 물어보는 게 바보입니다. 당연히 이스라엘의 소행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는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이스라엘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핵시설을 파괴하듯이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인의 불신앙은 파괴해야 합니다.
부활 신앙으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사도신앙을 계승하십시다! 


󰊲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38절)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게 하려면 내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신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려면 나도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이 나를 살리셔야 합니다. 내가 부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살아난 자의 하나님 되신다는 말입니다. 

죽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죽은 믿음을 가진 자의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 

죽은 믿음에게 하는 말씀을 들어 보세요.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2:18-22)

죽은 믿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살아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하신 말씀이 이렇습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수 있겠느냐? 에스겔이 대답하기를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니, 대언하라” 하셨습니다. 에스겔이 뼈에게 대언하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리라”(겔37:4-6) 뼈가 살아나서 자기를 살려내신 이가 여호와인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셨습니다. 그가 실로암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습니다. 전에 그가 구걸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 묻습니다.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예수라 하는 이가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날은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병을 고쳤다면 그가 어찌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라 할 수 있느냐? 그가 어떻게 표적을 행할 수 있느냐 하며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이 소경이었던 사람을 불러 말하기를 영광의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예수라는 사람이 죄인인줄 아노라 하니 대답하기를,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또 묻기를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그가 대답하기를 “이미 말했어도 듣지 않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느냐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하니 저희가 욕하며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고했습니다(요9:9,25-28)

옛날 어떤 수도원 원장이 많은 수도원생 중에서 유독 한 제자만을 사랑했습니다. 다른 원생들은 뒤에서 투덜대며 그 원생을 미워했습니다. 어느 날 원장은 모든 제자에게 새를 한 마리씩 주면서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죽여 오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모두 새를 죽여 왔는데 원장이 사랑하는 제자만 산채로 가지고 왔습니다. 원생들은 원장의 말씀에 불순종했다며 비난했습니다. 원장이 그에게 “왜 새를 죽여오지 않았느냐?” 물었습니다. “어디를 가도 하나님이 저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는 어디를 가도 하나님을 눈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람만이 하나님을 아는 자였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토록 심한 시련과 고통속에서 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내 구원자가 살아 계신다. 나를 돌보시는 그가 땅위에 우뚝 서실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내 살갗이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나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다. 내가 그를 직접 뵙겠다. 이 눈으로 직접 뵐 때에, 하나님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욥19:25-27)

부활의 자녀는 다시 죽을 수도 없는 영적 존재입니다. 부활하고도 부부가 되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38절)

암세포를 죽이듯이 절망을 죽여야 합니다. 나균이 흉악한 독성이지만 햇빛만 보면 금방 죽는다고 합니다. 절망은 희망으로 쏘아야 합니다.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 불신앙을 파괴해야 합니다. 부화도 있고 부활도 있습니다. 패자 부활전도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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