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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일꾼 (고후 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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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꾼 (고후 6:1-10)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1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4절 말씀에서는 “우리가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일꾼된 것을 세상의 어느 직책보다도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자부심, 그 자존감을 아무도 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아무도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순교의 제물이 되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일꾼된 사실을 후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일꾼된 사실을 감사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 하나님의 일꾼에게 주신 막중한 직책과 사명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시면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직책은 고후 5:18절을 말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화목하게 하는 직책입니다. 누구와 화목일까요? 사람 사이에 분쟁이 있을 때 화평케 하는 것도 화목의 직책이지만 하나님과 사람관계를 회복하게 하기는 것이 화목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직책과 사명을 받았습니까? 왜 그 직책을 받았습니까? 그 사명 왜 주셨을까요? 그 사명은 영혼 구원에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귀한 사명을 우리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주님의 일에 그의 생을 거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일꾼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꾼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인 증거와 요소들을 강력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스스로 주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자세를 살펴보고 우리도 하나님의 참된 일꾼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1. 하나님의 일꾼은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1절 중반절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화해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는 구속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받아 천국 백성이 되는 이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헛되어 받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지 않고, 그 은혜를 소중하게 간직하지 않고, 흔하게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공로 없이 값없이 받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겐세일처럼 값싸게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의 대가를 예수께서 대신 지불해 주셨음을 깨닫고, 그 은혜를 간직하기 위하여 비싼 대가를 치러야만 합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받는 은혜는 헛된 은혜가 되기 쉽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면했습니까? 그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도무지 은혜를 받은 사람들처럼 살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교회 안에 분쟁을 일어나고, 자기의 은사를 자랑하고, 교만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약한 자들을 판단하고, 성도 간에 소송문제가 있었습니다. 성찬식을 행하기 전에 먼저 배부른 자들, 취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문제들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은혜를 받되 헛되이 받은 자들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이런 교회는 주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목적은 이제는 더 이상 자신만을 위하여 자기중심적으로 살지 않고, 구원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성도들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살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은혜를 받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도 간에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입니까? 그렇지 못한 자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이미 소유하고 살아가는 천국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의 모든 삶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은혜를 많이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삶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나 중심이라면 은혜를 헛되이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판단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우리는 지금 은혜를 헛되이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고, 나의 성공이라면 우리는 지금 은혜를 헛되이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받은바 은혜를 끝까지 지키려는 자신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아서는 하나님과 함께 일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 되게 함으로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일해 나가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일꾼은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3절 말씀에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비방을 받지 않게 한다.”는 것은 “오해받지 않게 한다, 불신당하지 않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거리끼게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가는 길에 장애물을 갖다 놓아 넘어지게 하는 것”을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직분이 세상 사람들에게 오해받지 않도록, 불명예스럽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는 삶을 살았다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의 소원은 하나님의 영광의 증거가 되기를 소원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최고의 적은 무엇일까요? 바로 자기입니다. 이 “자기”란 옛사람의 나입니다. 자기는 바로 구원받기 이전의 우리의 육신의 소욕입니다. 자기는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교만의 자기입니다. 자기는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심의 자기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주님을 좇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내려놓았습니다. 남의 것을 탐내지 않았고, 남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손수 일을 했고, 약한 자들을 돕고, 모든 일에 모범을 보였습니다. 

특히 고전 9장에 보면 바울이 어떻게 자신을 내려놓습니까? 마땅히 사도로고 누릴 권리를 내려놓습니다. 먹고 마실 권리조차 내려놓고 자비량으로 천막을 만들면서 희생하면서 교회를 섬깁니다. 

행 20:33-35절에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들에게 모본을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전 8:13절에는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범사에 모든 사람들에게 장애가 없기 위해서 낮아져서 섬겼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같이 되었습니다.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아래 있지 않지만 율법아래 있는 자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지만 율법없는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이런 저런 사람들 앞에서 바울은 여러 사람들같이 되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조금이라도 거리끼는 것이라면 포기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모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서로의 유익을 위해 자기를 포기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것을 조금이라도 더 챙기려고 하고, 자기의 권리를 조금이라도 더 주장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일꾼의 자세가 아닙니다. 내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다가 다른 성도들을 실족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꾼의 모습은 아닙니다. 

아주 노련하고 존경받는 수도사 한 사람이 젊은 수도사의 교육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 수도사는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수도사는 젊은이에게 아주 딱딱한 흙덩이를 만지면서 “여기 물을 좀 부으라”고 했습니다. 젊은 수도사는 물을 부었습니다. 그런데 딱딱한 흙덩이라서 그냥 옆으로 흘러내리고 맙니다. 

수도사는 “이 딱딱한 흙은 물을 받지 못하네”라고 말하면서 옆에 있는 망치를 집어 들더니 그 딱딱한 흙덩이를 잘게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후에 젊은 수도사에게 다시 물을 부어 보라고 합니다. 젊은 수도사가 부서져서 부드러워진 그 흙 속에 물을 붓자 그 물이 흙에 스며들었습니다. . 그러자 수도사는 말합니다. “이 부드러운 흙에 씨를 뿌리면 틀림없이 싹이 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야? 우리는 이것을 깨어짐의 영성이라고 하지.”라고 했습니다. 

깨어짐의 영성이란 내가 깨어지고 내가 부서질 때 하나님은 거기서 기뻐하는 꽃과 아름다운 열매를 맺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열매를 위하여 아름다운 꽃을 위하여 때로 하나님이 나를 깨부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의 삶은 “자존심”을 앞세우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존심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높이는 마음입니다. 긍정적으로 자기를 인정하고 높이는 건강한 자긍심은 필요합니다. 

그런데 헛된 자존심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나를 높이고 나타내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자존심이 강하면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본질인 주님보다 비본질인 사소한 문제의 명분에 매달려 실패의 길을 걸어갑니다. 

여러분, 은혜를 헛되이 받은 사람은 마귀에게 쓰임을 받아 거리끼는 자가 되고 맙니다. 사람이 보기 싫어서 교회 나오고 싶지 않게 만들고, 은혜가 되지 않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사람은 다른 사람도 바로 세우게 됩니다.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본질을 위해 삽니다. 진리를 위해서 삽니다. 복음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 영광과 주님의 덕을 나타내는 사람은 내가 먼저 양보합니다. 내가 먼저 포기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나타내고, 한 영혼을 위하고, 교회를 위하고, 복음을 위하는 길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이된 성도 여러분, 이제 여러분은 누구에게도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와 성도들에게 해를 끼치고, 걸림이 되는 삶이 아니라 교회와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고, 기쁨을 주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거리끼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 하나님의 일꾼은 고난가운데서도 승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우셨습니다. 바울이 처음 세움을 입을 때부터 그의 고난은 예고되었습니다. 행 9:15-16절에 “주께서 이르시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예수님의 말씀처럼 생애동안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복음을 위한 것이요, 주님을 위한 것이며, 교회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4-5절에는 사도 바울이 고난당하는 모습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같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난도 많이 겪었습니다. 고후 1:8-9절에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는 고난 가운데서도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본문 6-7절에서 사도 바울은 고난 속에서 자신의 삶의 증거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환난을 당하면서도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육체적으로 볼 때 이름 없는 자요, 죽은 자요, 벌 받은 자요, 슬픔을 당한 자요, 가난한 자요, 아무것도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그렇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본문 9-10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은 유명한 자요, 살아 있는 자요, 기뻐하는 자요, 부요하게 하는 자요,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자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이렇게 고난 앞에서도 이처럼 당당하고 멋있는 승리의 모습이 될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꾼이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시고, 나를 인정해 주시고, 나를 통해서 하늘의 일을 이루신다’는 믿음 안에 살 때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 부요하게 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 모든 성도님들도 다 하나님의 일꾼, 그리스도의 일꾼임을 믿으시고 사도 바울처럼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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