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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인의 회복탄력성(5) : 공감능력 (눅 7:2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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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회복탄력성(5) : 공감능력 (눅 7:24-35)

요즈음 언론에 왕따 문제가 집중 보도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서산에서는 31살 청년이 엽총으로 옛 직장 동료를 1명을 살해하고 2명에게 부상을 입힌 후 자신도 농약을 먹고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학창 시절 왕따를 당해 심각한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컴퓨터에 "고3 때 왕따를 당한 고통이 가시지 않는다. 13년 전부터 힘들게 살아왔다. 이런 얘기 하면 다른 사람들은 나를 정신병원에 보내려고 한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자살하지 않고 버틴 것이 기적에 가깝다고 생각한다"는 글을 남겼답니다. 

직장에서도 왕따를 당하고 사표를 낸 후 살인게임 몰두하다 결국 엽총으로 난사를 한 것입니다. 왕따를 당하면 대구의 어느 학생처럼 견디질 못하고 목숨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성장하여서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로부터 '못생겼다'는 이유로 왕따와 폭행을 당한 한 여성은 그 후유증으로 고교 졸업 후 지금까지 제대로 된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친구 한 명 없이 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마트에 취직했지만 어느 날 물건 판매 대금이 맞지 않자 동료 직원이 "이거 왜 그런지 아느냐?"고 물었는데 "왜 나를 의심하느냐. 난 너무 억울하다"고 소리치며 뛰쳐나왔다고 합니다. 그녀는 밖에 나가지 않고 사람 만나기를 피하며 집에만 있으며 서른이 된 지금까지 정신과 치료를 계속 받고 있다고 합니다. 우울증, 대인기피증, 피해망상 등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초·중·고교생 720만 명 중 이른바 '왕따(집단 괴롭힘)를 당하고 있는 학생이 약 30만명(4.1%)에 이른다고 합니다(조선일보·한국교총 전국 初中高 조사) 전국 1만1000개 초·중·고교별로 평균 27명이 왕따를 당하고 있고 학급당 평균 1.3명 정도는 있다는 것입니다. 학교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취업포털 사람인(www.saramin.co.kr)이 직장인 2975명을 설문한 결과 45%가 "직장에 왕따가 있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왕따 문제로 퇴사한 직원이 있다"고 답한 경우도 58%였다고 합니다.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학교에서 직장에서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왕따를 당할 수 있습니다. 집단적으로 물리적. 심리적으로 따돌리는 것입니다. 자신과 다르다고, 있는 척 한다고, 잘난척한다고, 똑똑한 척을 하거나 고자질한다고, 튀려고 한다고, 분위기 파악을 못한다고, 돈을 안 쓰거나 지저분하다고 왕따를 시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속한 조직내부의 현실적 행위규범 및 행동준칙을 어긴 자라고 생각하고 왕따를 시키는 것입니다. 물리적 폭력을 행할 뿐 아니라 보이지 않게 거리를 두고 외면하는 것입니다. 대화를 거부하고, 모함하고, 약점을 들추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시비하는 것입니다. 직접적인 폭력(능동적 공격: 구타, 폭행)뿐만 아니라 간접적인 폭력(수동적 공격: 소외, 심리적 배제)를 행하는 것입니다. 

주로 어떤 사람을 왕따를 시킵니까?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왕따를 당하는 학생은 귀속적 지위와 업적적 지위 모두가 거의 없는 학생이거나, 혹은 두 가지를 모두 차지하고 있는 학생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귀속적 지위와 업적적 지위를 가집니다. 귀속적 지위란 '외모가 뛰어남', '집안이 부유함', '힘이 셈' 등과 같은 것으로 인하여 일정한 지위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업적적 지위는 '공부를 잘함', '모범생', '선생님의 편애' 등으로 얻는 지위를 말합니다. 

이런 지위가 없는 사람을 왕따 시키는 것은 사회적 약자를 대표하는 왕따입니다. 이런 것이 있는 사람을 왕따 시키는 것은 선망과 시기의 대상으로서의 왕따입니다. 가해학생의 유형 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유형은 제도적인 의미에서의 업적지위는 낮지만(공부는 잘 못하고 선생님이 미워하지만) 비제도적인 힘을 갖고 있는 학생이라고 합니다. 킹카의 유형으로는 "집이 부유하고, 외모가 출중하며, 성적이 상위권인" 주로 귀속적 지위와 업적적 지위를 모두 갖춘 학생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따를 당한다고 모두 자살하거나 우울증, 대인 기피증, 피해망상증에 빠져 인생을 망치지 않습니다. 왕따로 인생을 망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고 건강하게 사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지난 주 신문을 보니까 장애를 극복하고 장애인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시각 장애인으로 법관이 된 분과 청각장애인으로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은 분의 이야기가 나와 있었습니다. 시각장애인으로 대한민국 사법사상 최초의 법관이 된 최영(32세) 씨는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력을 잃은 1급 시각장애인이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법률서적을 음성 파일로 변환시켜 들으면서 공부하여 결국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판사가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국내 청각장애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은 오영준(37)씨는 제주도에서 태어나 영아 때 넘어져 청력을 잃었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공부하여 우리나라 청각장애인으로는 처음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먼저 보살펴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드리며 학업을 도와주신 교수님과 부모님께 감사드린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똑같이 30대로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왜 이런 차이가 나겠습니까? 오히려 왕따를 당하였으면 더 심각한 왕따를 당했을 법한데 왜 이렇게 인생이 다를까요? 왕따를 당한다고 다 자살하고 인생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십시오. 모세도 자기 백성들로부터 왕따를 당하였습니다. 요셉도 자기 형제로부터 왕따를 당하였습니다. 다윗도 최대권력을 가진 사울로부터 왕따를 당하였습니다. 바울도 자신의 백성인 유대인들로부터 왕따를 당하였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왕따를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였습니다. 역사 속에 혁혁한 업적들을 남겼습니다. 


왜 이렇게 다른 결과가 나올까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회복탄력성의 문제입니다. 마음의 근육의 문제입니다. 회복 탄력성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들의 차이입니다. 회복탄력성란 고무줄이 늘어났다 줄어드는 것처럼 원래 제자리로 돌아오는 힘을 일컫는 말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주로 시련이나 고난을 이겨내는 긍정적인 힘을 의미하는 말로 쓰입니다. 어떤 문제가 다가와도 포기하지 않고 자살하지 않고 일어서는 회복 탄력성이 있어야 인생은 성공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옷을 벗었는데 더 직업으로 일어섭니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더 활기차게 일어납니다. 선을 보아 퇴짜를 맞았는데 더 좋은 사람과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회복탄력성 지수(RQ)가 높을수록 역경을 잘 이겨냅니다. 제가 작년 8월에 “신앙인의 회복탄력성”에 대하여 4차례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 때 김주환 교수의 “회복탄력성”에 나온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다시 한 번 소개하자면 1955년부터 에미 워너와 루쓰 스미쓰 교수팀은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하기 그지없는 하와이의 어느 한 섬인 카우아이에서 그 해에 태어난 아이 833명 모두를 30년 넘게 추적 조사를 했습니다. 그들은 찢어지게 가난했고, 대부분 가족 구성원들이 가정불화, 이혼, 알코올 중독, 정신질환 등으로 시달렸답니다. 3분의 2 가량의 아이들이 이러한 열악한 환경의 희생자가 되어 일찍부터 학습부진에 시달렸으며, 약물중독에 빠지거나 정신질환을 앓았고, 범죄에 빠지거나 사회부적응자가 되었답니다. 18세가 되었을 때에는 많은 아이들이 전과자나 미혼모가 되었답니다. 

심리학자 에미 워너 교수는 그중에서도 특히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201명을 추려 성장 과정을 분석했답니다. ‘고위험군’이라고 불린 아이들 중 3분의 1인 72명이 밝고 건강한 청년으로 문제없이 성장했다고 합니다. 너무나 밝고 긍정적이고 건강한 청년으로 자란 것입니다. 그는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어떤 요인들이 아이들을 지켜주는가를 알기 위해 그 후 10년을 더 연구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제대로 성장해 나가는 힘을 발휘한 아이들에게는 예외 없이 그 아이의 입장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해 주고 받아주는 어른이 적어도 한 명은 주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한 명이 어머니나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 고모, 삼촌, 학교 선생님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인정해 주고 가까이서 지켜봐주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며 기댈 언덕이 되어줄 어른이 단 한 사람이라도 옆에 있었던 아이들은 역경을 이기는 내면의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아이들이 회복탄력성(resilience)이 높더라는 것입니다.

이 회복탄력성이 높으려면 자기 조절능력(감정조절력, 충동 통제력, 원인분석력), 대인관계 능력(소통능력, 공감능력, 자아확장력), 긍정성(자아 낙관성 생활만족도 감사하기)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복 탄력성이 높은 사람은 대체로 뛰어난 사회성을 지닙니다. 회복 탄력성이 높은 사람은 주위사람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게 됩니다. 운이 좋아서라고 만 볼 수 없습니다. 평소에 대인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입니다. 

대인관계의 핵심은 다른 사람의 마음과 감정 상태를 재빨리 파악하고 깊이 이해하고 공감함으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 대인관계가 내게 닥친 불행을 극복하게 하는 가장 큰 자산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대인관계는 잘하려면 세 가지를 잘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상대의 호감을 끌어내는 대화의 기술인 소통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아 확장성입니다.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정도입니다. 타인과 관계 속에서 자기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공감능력입니다. 공감능력이 뛰어나야 대인관계를 잘 맺게 되고 대인관계가 좋으면 회복 탄력성이 높아 어떤 경우에도 일어설 수가 있습니다. 


공감능력이란 무엇일까요?

'공감'(empathy)이라는 말은 '공통된 감정'의 축약어로 공유된 정서 또는 대리적 정서를 말합니다. 

독일어로 'Einfuhlen'라는 말인데 'ein'(안에)과 'fuhlen'(느낀다)'라는 말도 ‘들어가서 느낀다’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심리상태를 마치 나의 것처럼 이해하고 느끼는 정서적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 뇌에선 거울신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 것을 먹으면 나도 모르게 입에서 침이 나옵니다. 우리나라 권투 선수가 상대를 가격하면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는 것입니다. 친한 친구가 울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슬퍼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공감능력이라고 합니다. 타인의 어려움이나 고통을 이해하고 그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런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대인관계가 좋고 대인관계가 좋은 사람이 회복탄력성이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공감능력이 없으면 대인관계가 원만치 못합니다. 공감(empathy)이야말로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이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합니다. 우리 시대의 또 다른 키워드 '공감'이라고 합니다. 공감능력이 있는 사람이 사업도 성공하고, 공감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목회도 잘한다는 것입니다. 공감을 주는 책이 잘 팔리고, 공감을 주는 영화를 보고, 공감을 주는 의사를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공감능력이 찾아오는 환자의 수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드류 에릭 휘트먼이 지은 '캐시버타이징'이란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똑같은 책이지만 제목만 바꾸고 독자들의 반응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10시(Ten O'Clock)이라는 제목일 때는 2,000 부가 팔렸는데 똑같은 내용의 책을 제목만 "예술의 의미(What Art Should mean to You)로 바꾸었는데 9,000부가 나갔답니다. 인간은 "생존의 즐거움, 먹고 마시는 즐거움, 공포와 고통과 위험으로부터의 자유, 성적 만족, 안락한 생활 조건, 남보다 우월하고 이기고 싶은 마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관심과 보호, 사회적 인정" 등의 욕구가 있는데 공감할 때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공감할 때 물건도 사고 공감할 때 마음의 문도 연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사는 신앙인으로 공감능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1.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탈 중심적 사고로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과 세례 요한을 왕따시키며 진리에 대하여 공감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소개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메시아를 예비하는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율법의 교사들은 세례 요한을 왕따 시키며 거부합니다. 왜 공감하지 못하고 왕따를 시켰습니까? 

29절을 보십시오. 모든 백성들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이 전하는 말씀에 공감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당시 창기처럼 취급되며 백성들에게 왕따를 당했던 세리들도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서기관)은 어떠했습니까? 30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습니다. 이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요세푸스에 따르면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는 6천명의 바리새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팔레스틴의 인구는 약 60만 정도였다고 하니까 유대인구의 1%정도 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종교 지도자들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자들입니다. 자기만 옳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믿고 부활을 믿고 금식기도하며 십일조를 철저히 하고 자기가 최고 하나님을 잘 섬기고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메시아가 오신 새 시대가 되었는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중심적 사고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공감하지 못합니다. 결국 세례요한도 처형하고 예수님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합니다.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니까 어떤 결과나 나옵니까?

33절을 보십시오. 세례 요한이 와서 메뚜기와 석청을 주식으로 삼고 떡과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의 생활 습관을 트집 잡아 그를 귀신들렸다고 매도합니다. 세례 요한이 전달하는 말씀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의 삶의 방식만 보고 비난합니다. 그의 삶의 방식이 비난 받을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비난거리로 삼는 것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금욕생활을 하지 않고 당시 일상적인 생활 습관을 좇아 살았습니다. 그러자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비난합니다. 죄인들과 한 통속이라고 매도합니다. 

이런 사고를 프로크루스테스식 사고라고 말합니다. 마녀사냥식 매카시즘 사고(思考)라고 말합니다. 내가하면 로멘스고 남이 하면 불륜입니다. 남의 딸이 애인이 많으면 행실이 가벼워서이고, 내 딸이 애인이 많으면 인기가 좋아서입니다. 며느리에게는, "시집을 왔으니 이집 풍속을 따라야 한다." 딸에게는, "시집가더라도 자기 생활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며느리는 남편에게 쥐어 살아야 하고, 딸은 남편을 휘어잡고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남의 아이가 눈치 빠르면 약삭빨라서이고, 내 아이가 눈치 빠르면 영리하기 때문이다 라고 합니다. 남이 아이를 셋 두면 무식한 거고, 내가 아이를 셋 두면 다복한 것이다 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 공감능력 없습니다. 대인관계 원만치 않습니다. 회복탄력성 없습니다.

이런 사고를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식 사고라고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가 있습니다. '늘이는 자' 또는 '두드려서 펴는 자'를 뜻입니다. 아테네 근처의 케피소스 강가에 살면서 지나가는 나그네를 집에 초대하여 침대에 눕히고는 침대 길이보다 짧으면 다리를 잡아 늘이고 길면 잘라 버려 죽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해석하는 사고의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과를 이미 재단해 놓고 과정을 뜯어 맞춥니다. 확고한 신념에 따라 기쁘고 용감하게 철저히 악을 행합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편견과 아집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역지사지라고 말하지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피아제는 공감능력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공감능력의 발달을 아동의 자기중심적(egocentric)인 사고가 탈중심적(decentering)인 사고로 전환하면서 발달한다는 것입니다. 공감은 탈중심적인 사고가 가능한 7세 이후에나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대인관계에서 초점을 늘 자기에게 집중시키다가 7세 이후가 되면 자기 외에 다른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공감능력은 바로 나 중심적 사고에서 예수님 중심적 사고로 바꾸는데서 출발합니다. 그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고 구주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제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신앙입니다. 내 인생의 주제권을 예수님께 내어 주는 것입니다. 대인관계에서 다른 사람 중심에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공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7)” 예수님은 가난한 자, 고아, 홀로된 자, 소외된 자, 병든 자 입장에서 생각하시고 그들에게 다가가신 것입니다. 

2. 독선적 행동에서 공감적 행동을 해야 합니다. 

피아제의 후계자들은 공감을 설명하면서 탈중심적 사고 개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역할채택기능(role-taking skill)'이라는 말을 만들어 그것을 중시하였습니다. 여기서 역할채택은 자기중심적 입장에서 단순히 다른 사람의 역할을 해본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대방의 지각적경험이나 활동을 추론하고, 그 사람의 입장과 관점에 서서 역할을 해본다는 보다 타인지향적인 차원에서의 '역할 채택'인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를 관점 채택(perspective taking) 또는 관점에 대한 역할 채택(role-taking perspective)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는 것을 어려운 용어로 설명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이 공감하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은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결혼식과 장례식 놀이를 합니다. 한 아이가 결혼식 놀이를 제안하자 많은 아이들이 이에 호응하여 역할 분담을 하고 놀이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정작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습니다. 장례식 놀이에서 곡하여도 울지 않습니다. 공감적 반응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하여도 울지 않는 영적 자폐증에 걸린 것입니다. 영적 거울 뉴런이 깨져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비난할 거리만 찾고 다닙니다. 독선적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만 잘 난 것입니다. 타인을 무시합니다. 상대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회 계층 속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마 23:6; 막 12:38; 눅 11:43; 20:46). 

그들의 자신들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그 당시 상류층 사람들이 입고 다녔던 통으로 짠 옷을 걸치고 다녔습니다. 한 치도 낮아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낮고 천한 곳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배척했습니다(마 21:15). 예수님께 공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처형하였습니다(막 14:43,53; 눅 22:66). 

그것도 모자라 베드로와 요한을 핍박하고(행 4:5)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일에 동참하였습니다(행 6:12). 자신들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신분이 다르고, 아는 것이 다르고, 삶의 문화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월의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도 손을 들고 세리들과 다르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별거 아닙니다. 

어제 최집사님 이레 한의원 개원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데 태집사님께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한의원에 놓고 나오신 것입니다. 사업 잘하시고 나이 들었어도 스마트폰을 쓰면서 해외 사업도 하시는 분이지만 저나 별반 다르지 않고 성경 놓고 옵니다. 그런데 전집사님은 가방 체 놓고 가신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을 나와도 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내가 전집사님 가방 놓고 갔다고 말해 주었어요. 그런데 암기력이 뛰어난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주 전 아침밥을 먹으려고 앉아 있는데 반찬과 국을 가져다주고 한참 있어도 밥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밥 주는 것을 잊은 것입니다. 

그런 유머 있지 않아요. 40대가 되면 많이 배운 여자나 못 배운 여자나 학력의 평준화가 이루어지고, 50대가 되면 예쁜 여자나 미운 여자나 미모의 평준화가 이루어지고, 60대가 되면 자식 잘 둔 여자나 자식 못 둔 여자나 자식의 평준화가 이루어지고, 70대가 되면 남편이 있는 여자나 남편 없는 여자나 남편의 평준화가 이루어지고 80대가 되면 돈이 있는 여자나 돈이 없는 여자나 돈의 평준화가 이루어지고, 90대가 되면 산에 누운 여자나 집에 누운 여자나 삶의 평준화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조금만 가지고 있으면 잘난 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차등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등적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함께 세리 집에 가보고 창기 집에 가보고, 고아와 가난한 집에 참여해 보면 예수님에 대하여 공감했을 것입니다. 기적의 현장을 자신이 직접 체험해 보았다면 마음이 예수님께 충분히 공감하고 인생이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표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얼굴 표정은 감정의 변화에 직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얼굴 표정이 만들어 내는 근육은 뇌신경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감정이 늘 돌처럼 딱딱한 사람은 스스로의 감정도 파악하지 못하고 상대의 감정도 파악하지 못하니까 결국 대인관계가 원만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정흐름을 알고 통제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긍정적 정서를 가지려면 먼저 행동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웃는 표정을 먼저 하면 우리 뇌에서 웃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감정유발-신체변화-감정인식의 순서로 감정이 흐른다는 것입니다. 

얼굴이 웃으면 마음도 웃고, 마음이 웃으면 인생이 웃습니다. 일부러 라도 웃으면 웃음의 위력은 삶을 풍요롭게 바꾸어 줍니다. 입에 볼펜을 물고 입 꼬리만 올려도 뇌는 웃음을 알아차린다고 합니다. 눈이 웃으면 뇌가 웃고, 뇌가 웃으면 인생이 웃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공감이 되지 않는다면 의지적으로 예배에 참여하고 의지적으로 예수님께서 좋아하는 일을 해보고 의지적으로 말씀을 따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공감능력이 향상되고 대인관계능력이 좋아져 결국 회복경쟁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미국 UCLA대학의 앨버트 메리비언(Albert Mehrabian) 교수에 의하면 커뮤니케이션의 효과는 시각적인 요소가 가장 크다고 합니다. 그는 그의 저서《Silent Messages》에서 '메리비언 법칙'을 제시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상대방으로부터 받는 이미지는 시각이 55%, 청각이 38%, 언어가 7%에 이르는 백분율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의사를 전달할 때 말의 내용보다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듯한 요소들이 93%나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즉 커뮤니케이션 구성요소 중 내용이 7%, 태도가 20%, 표정이 35%, 목소리가 38%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사소통 작용상 가장 중요한 것이 시각적인 요소라는 것입니다. 그 중 표정이 35%, 태도가 20%나 차지합니다. 결국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무엇을 말하는가'보다는 '어떻게 말하는가',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시각적인 면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의지적으로 반응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고후 1:20)” 구약 성경에 보면 종종 말씀에 아멘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봅니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시 106:48)”


3. 관계의 단절로 단절된 정서에서 관계의 회복으로 소통된 정서를 가져야 합니다. 

공감이 되지 않는 세상은 정서가 소통되지 않는 것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피리가 전달하는 감정이 상대에게 전달되지 않는 것입니다. 곡을 하여도 곡을 하는 감정이 상대에게 전달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원인을 35절을 통해 설명합니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눅 7:35)” 이해가 잘 되지 않지요? 다른 번역을 보면 이해가 잘 됩니다. 

현대어 번역에는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가 참되다는 것은 그 지혜를 받아들인 사람에 의해서 밝혀지는 법이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공동번역은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지혜를 받아 들인 모든 사람들에게서 드러난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같은 맥락의 말씀인 마태복음에서는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 11:19)”라고 말씀합니다.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공감하지 않고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작정하면 그 어떤 것도 공감할 수 없습니다. 

지금 설교를 들으면서 한 번 나를 설득해보라 무슨 말을 해도 뻥이다 거짓말이다라고 생각하고 말씀을 듣고 있다면 제가 무슨 말을 해도 공감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받아들일만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길거리에 가다가 누가 울고 있다고 같이 웁니까?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의 장례식에 가서 울고 있습니까? 자신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공감하며 우는 것입니다. 

관계가 형성되면 친사회적이 됩니다. 친 협동적이 됩니다. 친 감정적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니까 반 사회적 반 협동적 반 감정적이 되는 것입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 것입니다. 

편안히 여행하고 싶으면 같은 것을 보아야 합니다. 자신과 비슷한 점이 있으면 낯선 사람도 금세 좋아지게 됩니다. 고속버스를 타고 가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같은 고향, 같은 학교 출신이라고 말하면 마음의 빗장을 열고 친밀감을 갖게 됩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가제는 게 편” “피는 물보다 진하다”등과 같은 우리 속담은 이런 인간의 마음을 반영한 것입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 “초록동색(草綠同色)”입니다. 

니콜라 게겐은 [소비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이런 인간의 심리를 실험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웨그너와 크래노는 실험자를 통하여 땅에 디스켓들을 ‘우연히’ 떨어뜨린 것처럼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더 도움을 주는가를 관찰했습니다. 디스켓을 땅에 떨어뜨린 자가 백인인 경우는 백인에게 더 도움을, 흑인인 경우는 흑인에게 더 도움을 받았습니다. 빅맨과 캄잔도 구걸하는 것을 통해 실험을 해 보았답니다. 백인은 백인에게 흑인은 흑인에게 더 돈을 줄 확률이 높았습니다. 같은 어투, 같은 옷차림, 같은 태도를 공유하게 되면 사람은 상대방에게 더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어떤 사람과 공통의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으면 단지 ‘공통분모’가 있다는 이유 하나로 더 도움을 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게겐은 통신 판매원이 전화를 하여 냉동 제품을 배달하는 사람이 그의 집에 직접 방문해도 좋을지 물었습니다. 그 통신 판매원은 잠재 고객에 대한 서류를 가지고 있어 자신의 이름을 상대방과 동일한 이름으로 소개했습니다. 동일한 조건에서 단지 이름이 같다는 이유 하나로 이름이 같지 않은 경우보다 4배 가까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집을 방문할 것을 승낙했다고 합니다. 통신 판매원이 남성일 경우, 그리고 전화를 받는 피 실험자가 여성일 경우 그는 그 여성의 이름과 동일한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할 수 없어 그녀의 남편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이때에도 여성들은 배달자의 방문을 2.2배나 더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며 승낙했다고 합니다. 친숙함 혹은 비슷함은 상대방을 더 쉽게 도와주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자신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면, 그를 더 좋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당시 종교적 지도자들입니다. 예수님이나 세례 요한에 대하여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편으로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밥그릇을 빼앗아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누렸던 종교적 지위를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로섬 게임으로 인간관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심리적인 상태는 탯줄을 통해 유아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유아도 어머니의 정서에 공감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학자들은 원식적인 '정서 감염(emotion contagion)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것은 동작모방(motor mimicry)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권투 구경을 하는 관객들이 어금니를 물고 주먹을 꽉 쥐고 있다든지, 우는 사람을 보고 얼굴을 찡그리는 것 등을 볼 수 있습니다. 

관계가 형성되면 공감적으로 듣게 됩니다. 

인간이 깨어있는 시간의 70%를 의사소통하는 데 사용하고 이 가운데 듣기에 45%를, 말하기에는 30%, 읽는데 16%,9%만 쓰는 데 사용한다고 합니다(Rankin 1926).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85%는 들어서 안 것이라고 합니다. 관계가 좋아지면 그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합니다. 공감적 태도 및 자세에서 공감적 경청 을 한 후 공감적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편견 없이 상대방의 입장에서 들으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민감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존중하며 상대의 말 속에 포함되어 있는 중요한 감정, 태도, 신념, 가치 기준까지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집중하여 경청하고, 주의 깊게 듣고 상대방의 이야기 듣는 것을 즐기는 것입니다. 수용적으로 듣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생각과 의견이 불일치하여도 들어 주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경청을 하는 것입니다. 맞장구치며 들어 줍니다. 감정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공감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화자의 말을 분석하거나 비판하며 듣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생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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